30%의 밤
범인(凡人)의 여행 계획은 이를테면 수요일에 투어 일정이 있다면 화요일에 도착하는 것에 그친다. 나는 다르다. 계획의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다. 계획을 관철해 나가는 행위에 희열을 느끼기에, 수요일에 계곡 투어가 있다면 해당 월의 강수량을 찾아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월요일 오전 비행기의 결항 확률을 검색하고, 만에 하나를 대비해, 하루에 해당 공항에서 목적지까지 비행기가 몇 번 뜨는지, 그리고 다음 항공의 평균 좌석 점유율까지 따져본다. 그렇기에 내 여행은 실패한다 해도, 고작 하늘이 흐려 호수가 청록빛 대신 우중충한 녹빛을 띄는 데 그친다. 맞다. 참 피곤하게 산다.
그렇게 노력하기에 실패한 여행은 더더욱 기억에 강렬하게 남는다.
첫 번째는 바하마 여행.
숙소에 물 챙기러 돌아가는 그 5분이 귀찮아 3시간을 뙤약볕 속에서 걸으며 나는 사람이 탈수로 쓰러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배웠다. 떠나는 날에는 1시간 거리의 공항으로 걸어가다 몰아친 스콜에 정말이지 입 안 빼고 다 젖었다.
두 번 모두 지나가는 행인들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지만 돌이켜 보면 아찔한 순간들이었다. 신발이 녹아내리는 듯한 아스팔트 위에 쓰러지거나, 가시거리랄 게 존재하지 않는 차도 옆을 지나가다가 치이거나.
그렇게 걸어 도착한 공원에서 목으로 쏟아부은 오렌지 주스 두 캔은 아직까지도 내 인생 최고의 청량감으로 남아있다. 아무렴 시장이 최고의 반찬이다. 젖은 생쥐 꼴으로 나소 공항에 도착해 옷을 짜니 바닥이 흥건해졌고, 차마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어, 그대로 바닥에 앉아 옷이 물을 다시 머금을 때까지 기다렸다는 건 2년이 지난 이제야 처음 글로 밝히는 일이다.
애틀란타에서 바하마까지 가는 비행기가 고작 한국 돈으로 5만 원이 안 되었으니, 바하마 여행은 그저 '돈 쓰러 가는 곳을 돈 없이 가면 고생만 한다.'와 '그루퍼는 맛이 없다.'라는 교훈을 내게 안겨 주었을 뿐, 어떠한 실존적 의미를 가지진 못했다.
실존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붙일 만한 정도의 여행은 두 번 했다. 개중 한 번은 밀라노에서 맥도날드에서 노숙을 한 후 칼 든 괴한에게 쫓긴 일. 그건 굳이 적절한 비유를 찾을 필요도 없는 실존적 위기였다. ‘생존의 욕구란 게 내게도 존재하구나.‘ 한 달 정도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찾아온 달갑지 않은 깨달음이었다.
두 번째는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에서 나는 이별을 배웠다. 순간을 부둥켜안으려다 끝끝내 실패하는 법을 배웠고, 사람을 떠내 보내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서야 의미가 분명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착 가라앉은 해 뜰 무렵의 바람에 지나온 과거가 멀어져 가고 다가올 미래가 분기하는 아침들이 있다.
하늘은 맑되 해는 보이지 않고, 수목의 잎은 초록의 절정을 지나 가을 낙엽을 향해 내달리며, 거리는 한산하다 못해 고요한. 딛는 발걸음 사이로 스미는 차가운 미풍에, 지나온 과거와 작별하고 다가올 미래로 떠나야 한다 종용하는 그러한 아침들이.
아이슬란드로 향하는 날. 이른 아침, 호스텔을 나와 뉴크로스 역으로 걸어가는 길이 그랬다. 하늘은 적당히 맑되 해는 보이지 않았고, 이미 겨울이 찾아와 나뭇가지는 앙상했다. 거리는 한산하다 못해 고요했으며, 걸음걸음마다 바람이 뺨을 치고 지나갔다.
기차에 올라타 스탠스테드 공항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나는 말이 없었고, 차창 밖의 하늘은 흐려져만 갔다. A와 P는 입에 모터라도 단 듯 재잘거렸다. 드르르르. 입에 드릴이 달렸다면 지구 반대편 - 어디 아르헨티나라도 뚫고 나올 가공할 만한 수다력이었다.
어제저녁 늦게 호스텔에 합류한 M과 N은 오는 길에 싸우기라도 한 것인지 침묵을 고수했다. 나는 이어폰을 끼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흔들리는 기차에, 유리창이라도 깰 듯한 수다에 나라도 중심을 잡을 필요가 있었다. 헤드폰의 음량을 계속 올렸다. 헤드폰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올 때까지.
그러다 귀가 아파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를 대고 다른 칸을 서성였다. 소리를 키우나 줄이나 귀가 아픈 건 마찬가지였으니 나는 떠날 필요가 있었다. 하늘은 흐렸다. 옅은 음울이 곁든 2월의 하늘이었다.
다행히 스탠스테드 공항은 런던에서 별로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고, 우리는 공항에 도착했다. 나는 아침도 해결할 겸, 잠시 흩어질 것을 제안했다.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는 변명은 이럴 때면 유용했다.
통보에 가까운 이별 선언에 미안한 마음도 잠시 들었으나, 그보다는 내 귀에 더 미안했고, 어차피 저 둘은 내가 없더라도 개의치 않고 떠들 게 분명했으며, 이별이라고 하기에는 30분 후에 다시 볼 사이였다. 수많은 예행연습들.
파리에서는 파리바게트보다 드물게 관찰되는 Pret a Manger*는 런던을 블록마다 점령하고 있었고, 공항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차피 더 저렴한 대안도 없었기에 나는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M을 N과 떼어놓을 겸, 둘에게 다가가 M에게 눈짓하며 고개를 까딱였고, M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샌드위치 가게로 걸어갔다. 나는 참치오이 샌드위치를 주워 들었다. 음료는 비싸 구매할 엄두가 나지 않았고, 정수기까지 걸어가 빈 병을 채운 후 우적우적 오이를 씹어댔다. 아삭한 오이의 시원함과 마요네즈의 청량감보다도 M의 우울이 난 좋았다. 그는 “포장이요.” 한 마디, 필요한 말 한마디를 제외하고 일절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나와 M은 그렇게 앉을 곳을 찾아 공항을 배회하며 샌드위치 하나를 해치웠다. 결국 앉을 곳이 마땅치 않아, 우리는 의자에 앉으려 했다. 노숙하지 말라고 시위하듯 나무판자 여러 개를 겹겹이 굽이치게 이어 붙여놓은 의자가 공항의 중심에 여럿 놓여 있었다.
사실 의자보다는 거기 앉아있던 사람이 중요했다. 발각되고 만 것이다. 하필 눈까지 마주쳐 버렸다. 나는 입꼬리만 올리며 웃음 짓고 다시 그들에게로 돌아가 앉았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이후 우리는 터미널의 끝자락으로 걸어갔다. A, P, 그리고 N은 서로 자리가 가깝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창가에 앉아 모두가 탑승하기까지, 내 이름이 호명되기까지 물끄러미 주기된 보잉 737을 바라보았다.
"왜 도대체 빨리 안 타는 거야?" A는 내게 물었다.
"빨리 타서 좋을 게 없지 않아? 비행기 안은 너무 시끄러워." 나는 답했다.
"그러다 널 버려두고 가면 어쩌려고..."
“그러면 난 런던을 여행하겠지?”
A는 눈에 살기를 담아 나를 째려보다 P에게 소리쳤다. "런던에 남겠다는데?"
"런던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빨리 타." P는 지적했다.
"작년에 60번도 넘게 탔지만 그런 일 없었어. 누가 누굴 걱정해. 걱정 마." 괜히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그냥. 좀 같이 타자고." P와 N은 이미 탑승 게이트를 통과했고, A와 내게 빨리 오라며 손짓하고 있었다.
"먼저 가. 화장실이나 다녀오지 뭐." 나는 말을 얼버무렸다.
"알아서 해." A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나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나의 아집이었다. 런던도 싫고, 보잉도 싫고, 공항도 싫은데 왜 굳이 나는 마지막까지 공항에 앉아 있기를 자처했을까.
비행기 탑승교를 오른다는 건 결국 떠나간다는 것이고, 떠나간다는 것은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었을까. 그저 소음을 견딜 수 없었다고 해두자.
비행은 길었고, 창가에 앉은 나는 아이슬란드의 설경을 눈에 담는 호사를 누렸다.
아래는 검고 희었다. 식생은 메말라 있었고, 한때는 뜨겁게 섬을 달궜을 용암은 이제 대지에 검은 상흔만을 남긴 채 하얀 눈과의 대비를 강화하고 있었다. 황량하고 쓸쓸했다.
나는 영화 인터스텔라를 떠올렸다. 조셉 쿠퍼는 만 행성에 도착해 얼어붙은 구름을 밟고 선다. 그리고 구조를 위해 데이터를 조작한 만 박사와 사투를 벌인다. 창밖을 바라보며, 나는 생명 하나 디딜 곳 없는 외계 행성을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비행기는 여러 번 흔들리기를 반복했고, 착륙하고 10분이나 지났을까 눈이 몰아쳤다. 삭풍이 공항을 강타했고, 문을 닫던 지상직 직원은 휘청였다.
그럼에도 A, P, 그리고 N은 어린 여자 아이 특유의 명랑함을 결코 잃지 않았다. 모든 게 새로운 모양이었다. "하늘이 맑아야 오로라를 볼 텐데." 나는 굳이 들뜬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아 한글로 홀로 중얼거렸다.
M은 원래도 과묵했고, 내가 침묵을 깬 것이 달가운지 P는 눈을 반짝이며 다가와 "뭐라고 했어?"라고 물었다.
나는 거짓말했다. “우리가 오로라를 볼 거라고.”
분명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모두 오로라의 수도 레이캬비크에 도착했다. 아슬아슬한 순간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었으리라.
예정보다 30분 늦게 공항으로 출발했고, M과 N의 런던행 기차는 2시간 연착되어 늦은 밤에서야 호스텔에 체크인했다. 그럼에도 2024년 2월 2일 오후 2시에 비행기가 착륙했다는 결괏값만은 같았다. 단 하나, 계획에 없던 것이 있다면 그건 정체 모를 불안감이었다.
공항버스에 타자 여자 아이들은 비행기에서 자지 않았다는 듯 즐겁게 떠들며 셀카를 찍었고, 나도 프레임 속에 들어가 함께 웃었다. 억지로 끌어올린 입꼬리의 근육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이들은 계속 떠들었고, 나와 M은 정적에 잠겨 창밖을 내다보았다. 다가오지 않은 불안에 지금의 행복을 근심하는 건 비합리적인 행위였다. 그러나 밖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는데, 셔터를 눌러 순간을 담은들 과거로의 미끄러짐을 역행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한숨을 쉬니, P가 잠시 돌아보았고, 나는 머리를 등받이 기대고 눈을 감았다. A와 P는 여전히 재잘거렸다.
우리는 레이캬비크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라는 할그림스키르캬 근처에서 내려 성당을 향해 걸어갔다. 다행히 바람은 조금 잦아들었고, 길은 미끄러웠으나 성당까지 가는 길에서는 아무도 넘어지지 않았다.
화산의 땅에 거대한 주상절리처럼 내다꽂힌 성당은 인공적인 건축물임에도 대자연처럼 인간을 압도했다. 사진 몇 장을 찍고 밖으로 나오자 뼛속까지 파고드는 바람이 몰아쳤다. M은 장난 삼아 바람에 몸을 맡겼다 도리어 뒤로 밀려났고, 나와 N은 성당 옆의 얼어붙은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려다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우리는 비명을 지르며 웃었지만, 그 웃음을 살 에는 바람에 흩어져 가닿지 못했다. 장갑을 낀 마디 사이사이로, 실타래 사이사이로 바람이 스며왔다.
거리를 걸어 내려가 솔파리드(Sólfarið), '태양의 항해자' 동상 앞에 섰다. 바이킹 선의 뼈대를 모티프로 조각해 낸 동상은 바다 건너 에샤 산(Mount Esja)을 향해 뱃머리를 들고 있었다. 선체는 온데간데없고, 살만 덩그러니 남은 항해자. 선원도 승객도 없이 어디를 항해하려 하는가.
떠나지 못하는 배와 떠나기만 하는 여행자. 우리는 그 앞에서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항구에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어 보이는 선원처럼.
숙소행 버스를 타기 위해 언덕을 올라가는 길은 진창이었다. 애매하게 녹아내린 눈이 차도의 먼지와 뒤섞여 신발 속으로 스며 들어왔다. 2월의 레이캬비크는 추웠다.
장을 보고, 호스텔에 체크인했다. 여장을 풀고 공용 부엌에 모였다. 몇몇은 아이슬란드 전통 음식이라는 하카를(Hákarl)을 시도했다. 진공 포장을 뜯자마자 터져 나온 지독한 암모니아 냄새에 여자 아이들을 비명을 질렀다. 나와 M은 그들을 뒤로하고 하카를을 밖으로 눈밭에 던져두었다. 안에서 아이들이 웃고 떠들 동안 하카를은 얼어갔고, 결국 나는 다시 밖으로 나가 하카를을 챙겨 호스텔의 쓰레기 봉지 구석에 처박았다. 내 저녁은 라면이었다. 뜨거운 국물에 몸은 녹았으나 손은 여전히 얼음장 같았다.
그날 밤, P와 나는 침대에 나란히 앉아 '사랑의 불시착'을 봤다. P는 K 드라마를 좋아했다. 나는 읽으면 소설을 읽지 드라마는 좋아하지 않았다.
"넌 왜 드라마를 안 봐?" P는 물었다.
"현실과의 괴리." 나는 답했다.
북한에 떨어진 손예진은 현빈을 만난다. 여행을 마무리하고 대충 훑어본 시놉시스에 따르면, 결국 둘은 재회한다. 북녘의 현빈과 남녘의 손예진은.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이유로 유럽을 선택해 미국을 떠나왔고, 여러 우연이 겹쳐 함께 아이슬란드로 왔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기어코 다시 만나지만, 이 여정의 끝에 우리에게 재회란 게 존재하기는 할까. 학기가 끝나면 우리는 각자의 일상으로 흩어질 터였다.
P는 졸린다며 눈을 비비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듯 내게 얘기했다. "2024년은 근 10년 중 태양의 활동이 가장 강한 해레. 여기까지 왔는데 분명 볼 수 있을 거야."
그 위로는 내게 닿지 못했다. 모두에게 밤 인사를 건네고 침대에 누웠다. 새근새근 숨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손을 이마에 올린 채로 누워 있다, 어둠 속에서 휴대폰을 켰다. 눈에 들어온 건 태양의 활동 같은 막연한 희망이 아닌 오로라 예보 앱이 띄운 차갑고 냉혹한 숫자 하나였다.
30%.
나는 고작 3할의 확률에 기대 이 차가운 곳까지 떠나온 것일까. 저 30%라는 숫자가 정말로 가리키는 바는 무엇일까. 학기가 끝나기 전까지는 아직 3개월이 남았고, 우리는 아마 룩셈부르크나 파리 정도는 같이 한 번 더 찾게 될 터였다. 다만 아이슬란드는 아니었다. 두 밤만 보내고 떠나야 했다. 그러한 맥락에서 30%는 잔인한 선고였다. 대략 70%의 확률로 마지막 기억이 춥고 어두운 아이슬란드의 밤으로 점철되고 마리라는.
다시.
대관절 오로라를 볼 수 있는 확률이 30%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오늘 같은 날이 열밤 이어지면 그중 세 밤의 하늘에 오로라가 드리운다는 것일까. 아니면 밖에 열 번 나가면 세 번 오로라를 볼 수 있다는 것일까.
30%
결국 한국으로 귀국하는 데 성공한 손예진처럼 나 역시 언젠가 다시 아이슬란드를 찾게 되리라는 것만은 분명했지만, 그게 언제일지, 그리고 그때는 누구와 함께일지 알 수 없다는 게 이별이라는 단어의 본질인 것 같았다. 나는 여행의 마지막이 허무한 실패로 귀결되리라는 예감에 몸을 떨었다.
그래서 나는 밖으로 나갔다. 잠을 자려다가도 몇 번이고 이불을 박차고 나와 1층으로 내려가 이를 딱딱이며 눈 위를 걸었다.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무심했다. 30%라는 숫자는 적어도 열 번 나가면 세 번 오로라를 볼 수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열 번째로 밖으로 나가는 길, 나는 M의 방을 찾았다. M은 고요히 자고 있었다.
그러다, 나도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자기 전, 나는 눈밭에 던져두었던 하카를에 대해 생각했다. 결국 쓰레기 통에 버려진 하카를을.
*(Manger가 불어로 먹다를 지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