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실패한 여행

첫, 그리고 마지막 아이슬란드

by 노마드

밤새 잠을 설쳤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일어나니 알람이 울리기 한 시간 전. 슬며시 이불을 걷고, 2층 침대의 계단을 내려왔다. 커튼을 열었다. 하늘은 검었다. 아이 잠든 방을 떠나는 부모처럼 문을 닫고, 호스텔의 계단을 내려가 마지막으로 밖으로 나갔다. 여전히 하늘은 어두웠고, 구름은 우중충했다. 그리고 오로라는 보이지 않았다.


숨을 내뿜으니 뿌연 입김이 하늘로 올라가다 바람에 흩어졌다. 칼바람이었다. 일각여를 멍하니 서 있었다. 발로 애꿎은 눈만 문지르고, 괜히 집어들어 표지판에 던져가며. 하늘은 화답하지 않았다. 나는 무릎을 구부려 땅에 앉고는 장갑을 벗어 맨손으로 눈을 훑었다. 좌우로 조금씩 밀어내니 바닥이 보였다. 바람도 계속 불어와 구름을 밀어냈다. 또다른 무더기의 구름이 몰려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꾸역꾸역. 쉼 없이.


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마친 뒤, P와 A를 깨웠다.


"10분만 더 자면 안돼?" P는 침대에 앉아 베개를 무릎에 얹고 투정했다.


"결국 못 봤어." 나는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래 안 깨우더라. 덕분에 잘 잤어."


"못 깨운 거지."


"걱정 마. 오늘은 보겠지."


"그러려나... 씻어. 나가야지. 너도 일어난 거 다 아니까 어서 씻고." 무슨 보모라도 된 건지. P와 A를 방에 내버려두고, M과 N이 묵고 있는 방문을 가볍게 두드리니, N이 나를 맞이했다.


"일찍 일어났네. 우리 방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여하튼, 다들 씻으러 갔어. M은?" 나는 말을 이었다.


N은 답변하는 대신 방 안쪽의 침대로 고개를 돌렸다. 싸우긴 싸운 모양이었다.


이별의 싹은 그토록 사소한 균열에서 발아하고 있었고, 그 둘의 시간은 아이슬란드 여행을 마지막으로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마지막을 예감하고 있었을까. 내가 아는 사실 하나는 아이슬란드를 마지막으로 둘은 같이 여행하지 않았다는 것 뿐.


나는 다가가 M을 깨웠으나, M은 일어나지 않았다. 몸을 흔들고 난 후에 겨우 일어난 M은 눈 앞의 내 얼굴을 보고도 - N이 깨워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다는 듯 - 전혀 놀라지 않았다. M은 이불을 다시 덮어썼고, 나갈 때 즈음해서 다시 오겠다는 내 말에 이불이 위아래로 꿈틀거렸다.


이윽고 준비를 마친 우리는 밖으로 나가 Bus Travel Iceland사의 버스를 기다렸다. 첫 번째 목적지로 향하는 길, P와 나는 지난 밤에 이어 사랑의 불시착을 보려 시도했으나, 이어폰이 말썽이었다. 나는 포기한 채 눈보라 치는 창밖을 내다 보았다.



휴게소 하나를 거쳐 내리니 케리드 분화구였다. 흐렸던 하늘은 마침내 개였다. 거대한 구덩이 같은 분화구의 주위로 눈으로 덮인 산책로가 이어졌고, 나는 때로는 그 위에 눕기도, 또 미끄러져 가는 친구들의 모습에 웃음을 짓기도 했다. 해가 비친들, 아이슬란드의 추위는 살벌해, 눈 위를 뛰어갈 때면 바지 틈 사이로 눈 조각들이 튀어 들어왔다. 하늘이 야속했다.


이어 찾은 게이시르에서 다들 맛이 없다고 해 받아온 감자칩을 쑤셔넣는 것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간헐천은 정말 간헐적으로 분출해, 솟아오르는 모습을 한 번 밖에 눈에 담지 못했다.



내가 간헐천의 변덕에 매여 있는 동안 P와 A는 다른 즐길거리를 찾은 모양이었다. P가 흥분한 얼굴로 달려와 내 팔을 잡아끌었다. "저기 봐, 저 커플!" P가 가리킨 건 아까 우리 옆에서 서로를 힘껏 껴안았던 커플이었다.


P의 설명에 따르면, 간헐천을 내려다보던 여자의 등 뒤에서 남자가 그녀에게 손짓해 카메라를 건넸다고 했다. 평범한 영상 촬영 부탁인 줄 알았는데, 그것은 청혼이었다. 여자는 뒤돌아 눈물을 터뜨리며 남자를 부둥켜안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간헐천 앞에서 안정적인 관계의 약속을 맺는다는 사실이, 내게는 하나의 거대한 아이러니로 다가왔다. 저 맹세는 얼마나 갈까. 저 확신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그들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 짧은 웃음의 정체를 나조차 알 수 없었다. 덧없는 세상에서 영원을 믿는 순진함에 대한 냉소였을까. 아니면,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을 용기에 대한 서글픈 부러움이었을까.


문득 파리에서 만난 여자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관계에 확신이 있다면, 결혼이라는 진부한 제도로 서로를 가둘 필요는 없지 않아?” 반박할 힘이 없어 그저 라따뚜이가 맛있다며 말을 돌렸던 나.


할 수만 있다면 그녀를 데려와 보여주고 싶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그것은 서로를 옭아매는 고루한 족쇄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건 이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서로의 유일하고 굳건한 피난처가 되어주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들은 이 여행지에서 서로의 유일한 ‘일상’이 되어, 함께 돌아갈 것이다. 서로의 간격을 ‘나’와 ‘너’에서 ‘우리’라는 단단한 1인칭 복수로 좁혀낸 채.


그러나 유럽이라는 이 공통분모가 사라진 뒤의 우리는.


욱여넣은 감자칩에 목이 맸다.



버스는 우리를 싣고 굴포스로 떠났다. 나는 일행과 조금 떨어져 걸었다. 이름을 두어 번 불러서야 못 들은 척 다가가 사진을 찍었다. 폭포는 무심히도 흘렀고, 그 사실은 내게 적잖이 위안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들른 싱벨리어 국립공원에서 나는 애써 기분을 북돋으려 노력했다. 눈싸움을 하고, 계단을 미끄럼틀 삼아 내려가기도 했으며, 아이들 앞에서 고드름을 이로 부러뜨려 씹어 먹었다. 하지만 발 밑의 이 거대한 균열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분기하는 두 개의 땅덩어리. 나는 벽에 다가가 장갑을 벗고 돌을 어루만졌다. 차가웠다.


돌아온 이후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숙소에서 집결지로 걸어가 버스에 탔을 것이고, 나는 머지 않아 잠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 P는 몇 번이고 나를 깨워 밖으로 나갈 것인지 물어보았다. 나는 졸음에 취해 매번 되물었고, P는 매번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고갯짓이 한 번, 두 번 반복될수록 30%의 희망은 0%의 현실로 고정되어갔다. 마지막으로 버스가 숙소에 가까워졌을 때, 그녀는 더 이상 나를 깨우지 않았다.



우리는 제대로 자지 못한 채로 공항에 도착해 벤치에서 잠시 눈을 붙인 후, 오전 6시 48분 오로라의 수도를 떠났다.


< 2N번째 공항 노숙 >


영국 스탠스테드 공항에 착륙해, 대영박물관을 잠시 구경하고, 근처의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왁자지껄한 런던의 소음과는 조금 떨어진 그곳에서, 모두가 식사를 해결하고 일어나려던 그때, P는 일어서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우리는 끝내, 오로라를 볼 수 있을까...


<M과 나, 10분만에 날씨가 좌에서 우로. >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02화재회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