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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혜영 Jun 18. 2022

자살하는 사람에 관하여

나는 주일이라 부르는 일요일에 교회에 가지 않는 기독교인이다. 하나님은 내 마음속에 있지 꼭 교회에 가야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하면서 안 간 지 어언 십 년째다. 나는 모태신앙이라서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내 종교는 정해졌고 아픈 사람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기도가 끊이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잠이 없던 어린 시절 엄마에게 새벽에 교회 가자고 깨우는 꼬마이면서 교회에 자주 가서 목사님들에게 기도를 받는 아이였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자살하면 안 된다는 말을 들으면서 자살하면 천국에 가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는 주입식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 교육의 마지막 슬로건은 자살을 반대로 하면 살자!로 마무리되었다. 내가 자살을 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그런 소리를 들은 것이 아니라 주일학교에서 성경 공부를 하면 자연스럽게 듣는 소리였다. 그래서 나는 자살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 굳게 믿으며 살아왔다.

이런 이유로 나는 스스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년이 넘은 기독교 학교에 들어갔다. 일제 신사 참배를 거부하며 지조와 강단으로 하나님 이외의 것에는 절할  없다며 자진 폐교하고 이후 복교를 기념하며 학교 문을 다시  역사가 있는 곳에서 6년간 학교생활을 했다. 학교 목사님을 줄여 교목이라 부르는 사람들과 아침 채플 시간과 수요 기도회 그리고 종교 시간(심지어 종교 부장도 했었다) 성가 경연대회까지  주변에는 온통 기독교적인 삶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것은 몰라도 남에게 해를 가하면  된다, 죄지으면  된다, 자살하면  된다는 강하게 머리에 박혀있었다. 어느 , 너무 아파서 삶이 버겁고 막막해서 신에게 나를 그냥 죽여 달라는 기도를  적은 있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을 엄두는 내지 못했다.

오랜 병원생활로 질병사와 자연사 혹은 사고사에만 익숙한 내가 처음 자살을 목격했다. 때는 심장 시술을 받고 나서 대략 2 정도가 지난  검진을 위해 서울 병원에  날이었다. 시술한  얼마 되지 않아서 정신도 없고 아프고 기운도 없는 상태로 용산역에서 집에 가는 ktx 타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가는 중이었다. 지하철이 갑자기 급정거하려고  기기 - 소리가 나다가 갑자기 “!” 하는 둔탁한 굉음이 들렸다.  소리와 동시에 지하철이 멈추었다.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방송이 흘러나왔다. “선로에 사람이 뛰어들어서 급하게 열차를 멈추었으니 상황이 수습될 때까지 기다리면 문을 열겠다라는 멘트였다.

내 앞에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 한 중년 남성분이 아직 앳된 얼굴을 한 나에게 살짝 겁을 주며 말했다. “아까 난 그 퍽! 하는 소리가 뭔 줄 알아? 사람이 부딪히면서 두개골이 깨지는 소리야, 자살은 저렇게 무서운 거야 그러니까 악착같이 살아야 해” 잘살아 보겠다고 시술받고 경과가 좋은지 나쁜지 검진받고 돌아오는 나에게 크게 도움이 될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이 열리고 지하철 밑에 끼인 사람의 몸을 꺼내는 작업을 보고는 뭔가 알 수 없는 경각심이 생겼다. 행여 죽어도 저렇게 죽진 말아야지...

시술  3개월이 지났다. 3, 춥지만 봄이었다. 나는 스무 살이었다. 건강과 활기 그리고 생명과 열정을 상징하는 빨간색 니트를 생일 선물로 받았다. 그리 좋아하는 색은 아니었지만 건강하게 살라는 의미로 받은 것이라서 입고 병원 검진을 갔다. 우연히 병원 검사실 탈의실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이 사람은 판막에 역류가 발생한 환자였다. 수술해야 하는 상황인데 수술하지 않고 약도 먹지 않고 그냥 살다 죽을 때가 되면 죽겠다는 중년의 환자였다. 극단적인 자살을 보고 난지 3개월  느린 자살을 하는 사람을 보았다. 내가 입은 빨간 니트를 보며 “청춘이네~ 젊다~ 예뻐~”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시들어져 가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 예쁘다고 말하는  사람의 모습이 애달파서 슬펐다.

 번째 자살 목격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었다. 어릴 때부터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의 자살이었다. 원로 목사님 이후 바통을 이어받은 목사님이었다. 내가 아플  같이 기도해주었고 목사님의 아들과 나이가 같아서 중학교도 같이 다녔었다. 그래서 매우 친한 사이는 아니어도  집안 사정이며 성격이며 가족들 모두 알고 있는 목사님이었다. 내가 심장 시술을 받을   받고 와야 한다며 기도해주었고 내가 나아져서 대학에   있는  상태가 되길 간절히 바랐던 분이었다. 어느  목사님이 실종되었다는 식을 듣고 며칠이 지난  저수지에서 자살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교회는 난리가 났다.   가끔 목사님이 꿈에 나온다. 죽었는데 나타나는 상황이 아니라 죽지 않고 어딘가에서 살아있는 모습으로 나온다. 어떤 꿈에서는 죽었는데 사실 죽지 않아서 살아 돌아왔다는 내용으로 나타난다.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고 하던 목사님의 죽음은 교회 사람들을 보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표현하기 어려운 괴리감. 나는  사건 이후 일요일에 교회에 가지 게 되었다.

올해 2월 대학교 동기의 부고 소식이 과 단톡방에 올라왔다. 28살 만으로는 27살 여자 동기의 죽음. 연락을 하고 지내는 사이도 아니고 학교 다닐 때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니었지만, 같이 조별 과제 조원으로 참여해서 과제를 하거나 아침에 학교에서 만나면 간단히 인사 정도를 나누는 사이였다. 밝고 성실한 친구였다. 내가 모르는 어떤 병이 있어서 죽었는지 아니면 사고를 당해 죽었는지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장례식장에 가야 할지 어쩔지 알아보다가 자살로 인한 죽음이란 소리를 들었다. 그 소식을 듣고 충격이 커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내 전화를 받으며 뉴스를 보고 있던 엄마가 20대 여자 공무원 자살 뉴스가 나오는데 혹시 네 동기 아니냐 물으셨다.

어렵게 들어간 공무원 생활을 겨우   근무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이었다. 믿기지 않았지만   언론과 sns  내용은  친구의    힘든 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다른 자살 소식을 들었다. 친한 친구의 친구가 자살했다는 소식이었다. 건너 건너 이야기를 들어서 어느 정도 어떤 친구인지 알던 사람이었다. 친구는 며칠간 정신을  차리고 힘들어했고 나는  친구마저 끔찍한 선택을 생각할까  매일 연락하며 상태를 확인했다.

연이은 죽음 앞에서 나는 말로 설명할  없는 감정에 휩싸여 아직 봄이 오지 아 몹씨 추운 겨울 날씨를 무시하고 걸어 다녔다. 멍하니 한두 시간을 걷다 들어와서   시간 정도 누군가와 전화하고 나야   시간이 사라졌다. 사람이 놀라면 머릿속이 백지상태가 된다던데  상태가 한동안 그렇게 되었다. 회사에 가서는  생각만 하고 열심히 일하다가 퇴근하려고 돌아서서 나오는 순간부터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 슬프지도 화가 나지도 기쁘지도 않은 상태였다. 타인의 연이은 죽음들이  정신도 잠시 죽음과 같은 상태에 빠지게 했다.

동기가 그렇게 가고 나서 동기 생각이 나게 하는 우울에 심하게 빠진 사람을 만났다. 우연히 내 삶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매일 마주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이해는 안 가지만 잘 해주자 마음먹었다. 내가 잘해주어 이 사람의 우울이 줄어들면 내 동기의 죽음과 같은 안타까운 일이 더는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리고 주변에서 느끼기에도 나는 최선을 다해서 잘해주었다. 잘해줄수록 힘에 부쳤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이해와 배려를 나누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내게 점점 더 많은 것을 바랐다. 자신의 말, 자신의 불안, 자신의 불평, 자신의 고민을 지속적으로 털어놓았다. 나는 정신과 전문의도 전문 상담사도 아니었다. 6개월간 지속되는 상황에 점점 지쳐갔다. 더더욱 들러붙어 나의 에너지를 뽑아가는 이 사람은 하나를 주면 열을 바라는 습성의 인간임을 깨닫고 실망했을 때 알아서 내 인생에서 나가주었다.


동기의 죽음도 목사님의 죽음도 지하철에서 목격한 죽음도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사람의 죽고 사는 문제도 그 우울함의 깊이도 내가 어떻게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알 수 없는 괜한 죄책감인지 막지 못했다는 후회인지 모를 그 찜찜한 기분이 나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임을 알게 되자 속 시원하게 해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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