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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혜영 Jul 21. 2022

책으로 요새를 짓고 글쓰기로 무기를 만든다

아픔을 이겨내는 방법

덤덤하고 차분하다. 나를 아는 대부분 사람이 나를 보며 하는 말이다. 나는 누가 볼 때마다 책을 읽거나 수첩에 글을 쓰고 있었던 아이로, 무척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이 되었다. 책을 펼치면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지만 책이 주는 조용함 그대로 자랐다.

견디기 어려운 일을 겪은 사람들은 충격이 커서 말문을 닫는다.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그 일로 얼마나 괴로운지 말하지 않는다. 천천히 괴로운 감정이 줄어들고 무뎌지고 입 밖으로 내뱉을 만큼 고통이 줄면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 사람의 괴로움은 입 밖으로 나올 때 작아진다. 고통이 줄어들지 않는다면 몸 가득 깊숙하게 파고든 아픔은 뱉어내려고 해도 목에 가시처럼 걸려 나오지 않을 것이다.

내 슬픔도 내 고통도 그렇게 목에 걸려 입에서 막혀 나오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말이 없어서 전학 간 학교에서는 벙어리로 오해받았던 적이 있을 만큼 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물론 수업 시간에는 곧잘 떠들었다. 공부는 나를 드러낼 필요가 없으니까 대신 온전히 내 이야기를 하는 쉬는 시간은 입을 닫고 책을 보았다. 책을 보면 주변에서 나를 방해하려 다가오는 사람이 없다. 나는 책으로 방패를 만들고 책으로 요새를 지어 책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나를 괴롭게 하는 현실로부터 도망쳤다. 책은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를 글로 풀어놓으면서 주인공 혹은 작가의 감정이 하나씩 섬세하게 적혀있다. 나는 그 글 속에서 내 감정과 비슷한 모양을 가진 것들을 눈으로 찾아 나선다. 내 마음에서 표현하지 못하는 슬픔, 분노, 고통을 책에서 대신 말하고 있는 문장을 찾았다.

많은 책을 읽고 돌아와서는 내 감정과 내가 겪은 일을 글로 적었다. 머릿속에 떠다니는 마음과 생각을 두서 있든 없든 문장이 유려하든 말든 마구 써 내려갔다. 입 밖에 내놓지 못한 말을 노트에 털어놓았다. 내 감정에 단어를 붙여주었을 때 내 입 밖으로 말이 나왔다. 내 노트가 쌓여갈수록 내 말은 늘어갔다. 내 감정은 키가 줄고 부피가 줄어서 조그맣게 변했다.

글을 쓰고 나서 가슴 한쪽이 뜨거워졌다. 그러다가 속이 시원해졌다. 뒤이어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감정을 느꼈다고 지인에게 이야기했다. 이런 감정이 들었을 때 쓴 글을 지인에게 보여주었다. 지인은 조용히 앉아서 내 휴대폰에 저장된 글을 읽었다. 짧은 글인데 읽는데 한참 기다려야 했다. 글이 이상해서 쉽게 읽기 어려운가? 이해가 안 가나 생각할 무렵 다 읽었는지 고개를 들었는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리고 훌쩍이는 콧물을 서둘러 냅킨으로 닦아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라고 말했다.

감상평을 부탁했다. 오래 본 지인이라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었다. 문장이 유려하고 굉장히 잘 써서 감동적이라 눈물을 흘렸던 것이 아니라 글은 짧고 간결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게 눈물이 났다고 했다. 그것이 내가 가진 힘일 수 있으니 계속 글을 쓰라고 했다. 글을 쓰고 나서 행복감과 후련함을 느끼는 것이 흔하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닐 테니 꾸준히 해보라고 했다. 나는 놀라웠다. 내 글을 읽고 눈물을 흘리다니.

나는 그 후로 계속 쓰기로 결심했다. 그게 무슨 글이든 간에 잘 쓰든 못 쓰든 간에. 때로는 한 문장도 쓰기 싫다가도 어느 날은 한 번에 A4 용지 두 장쯤은 쉽게 써지는 날도 있다. 어느 날은 글감이 도저히 생각나지 않다가도 어느 날은 글감이 휘몰아치면서 떠오른다.

내 감정과 내 마음과 내 생각이 한 문장 한 문장 명료하게 글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아픔도 줄어들 힘이 생긴다. 내 감정을 표현하지 못해서 내 감정에 정확한 단어로 꼬리표 하나 붙이지 못해서 혼란스러울 때 그 혼란의 모래밭에서 날카로운 바늘 하나를 찾아서 부풀어 오른 감정 덩어리를 톡 터트리면 끝난다. 괴로운 감정이 다시 부풀어 올라 나를 괴롭혀도 다시 그 바늘로 터트리면 된다. 아픔은 이렇게 줄여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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