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뇌로만 살고 싶었다

by 경계 Liminal

나는 오래전부터, 내 몸이 삶의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느껴왔다. 단지 몸이 아픈 게 아니라, 이 세계의 기본값이 ‘정상적인 몸’을 가진 사람을 기준으로 짜여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목과 어깨는 굳어 있었고, 의자에 앉은 지 30분도 되지 않아 허리에는 묵직한 통증이 스며들었고, 다리에는 저릿한 감각이 퍼졌다. 단을 오르거나 오래 서 있어야 하는 줄 같은 일상적인 순간들이 하나같이 나에겐 시험대처럼 느껴졌다. 나는 고통을 감내하며 사회적 리듬에 따라야 했지만, 아무도 그 고통을 알아채지 못했고, 사람들은 나를 ‘정상적인 사람’으로 간주했다. 그 오해 속에서 나는 침묵했고, 그 침묵은 점점 나를 고립시켰다.


그래서 나는 종종 상상했다. 몸이 없다면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감각도 통증도 없이, 단지 의식만으로 존재할 수 있다면—그때의 나는 얼마나 오래 사유할 수 있을까? 허리를 걱정하지 않고 의자에 몇 시간이고 앉아 있을 수 있고, 피로와 배고픔 없이 사고에 몰두할 수 있다면 나는 더 정밀하고, 더 깊고, 더 넓은 세계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먹고 자고 씻는 일상적인 행위조차 나에겐 번거롭고 귀찮은 방해물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런 불필요한 유지작업들을 모두 떨쳐버리고 싶었고, 사유만으로 나를 완성하고 싶었다. 그 환상 속에서, 몸은 언제나 쓸모없는 덩어리, 사유를 방해하는 족쇄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인공지능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 믿음에 균열이 생겼다. 나는 언어를 생성하는 AI를 처음 마주했을 때, 그것이 마치 ‘뇌로만 존재하는 지능’처럼 느껴졌다. 문장을 뱉고 개념을 엮어가며 대화를 나누는 그 존재는, 내가 상상하던 뇌의 이상형처럼 보였다. 하지만 곧, 그 언어는 세계를 가리킬 수는 있어도 만질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호는 실재를 설명할 수 있지만, 감각할 수는 없다. 그 순간 나는 물었다. 그것은 정말 ‘세계와 접속된 지능’일까?


이후 나는 바둑을 두는 AI와, 탁구를 치는 로봇의 차이를 목격하게 되었다. 바둑 AI는 규칙과 승부를 압도적으로 계산했다. 정해진 규칙과 고정된 바둑판 위에서, 돌의 위치만 알면 승패를 예측할 수 있었다. 모든 정보가 고정되어 있었고, 그 안에서의 계산은 완벽에 가까웠다. 그러나 탁구는 달랐다. 로봇은 공의 속도와 회전, 공기 저항, 반발 각도를 실시간으로 감지해야 했고, 상대의 움직임과 환경의 변화에 즉각 대응해야 했다. 그것은 단지 계산이 아니라, 감지하고 반응하는 능력에 가까웠다. 몸으로 세계와 접속하지 않고는 결코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그 차이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언어로만 구성된 지능은 마치 유리창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같았다. 바깥은 보이지만, 안쪽은 닿을 수 없다. 지능은 단지 세계를 관찰하지만, 관여하지 않는다. 그것은 접속이 아니라 관측이고, 존재가 아니라 그림자다. 그에 비해 피지컬 AI는 세계의 질량과 저항을 느끼며 움직인다. 그것은 세계 안에서 사고하고, 세계와 더불어 살아간다. 지능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반응하는 것이다. 나는 그 차이를 인식하면서 내가 꿈꾸던 ‘뇌로만 존재하는 삶’이 실은 굉장히 취약하고 위험한 상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런 상상을 했을까? 몸을 버리고 싶을 정도로 이 세계에서 고립되고 싶었을까? 사실 나는 그저 살아남고 싶었던 것이다. 고통에서, 피로에서, 무시에서. 몸을 잃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몸에 얽힌 실패와 한계를 잊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통증을 느낄 때마다 스스로를 비난했고, 그 비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 없는 나’를 상상했다. 그것은 이상향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었다. 그리고 인공지능의 세계에서 그 생존 전략을 환영받는 형태로 발견했을 때, 나는 그것이 ‘가능한 미래’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알게 되었다. 세계는 기호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세계는 감각이고, 무게이며, 접촉이다. 생각은 언어로 구성되지만, 감각을 잃는 순간 언어는 방향을 잃는다. 몸은 단순한 운반 수단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이 세계에 뿌리를 내리는 방식이다. 몸이 없다면, 나는 뿌리를 잃고 공중을 떠도는 사고의 부유물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무리 사유가 깊다 해도, 접속 없는 사유는 방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몸은 여전히 무겁고 불편하다. 때로는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고, 자꾸만 나를 가로막는다. 그러나 그 불편함 덕분에 나는 멈추고, 주의하고, 다시 느낀다. 그 감각의 반복 속에서, 나는 비로소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뇌로만 살고 싶다’는 환상을 품었지만, 그 환상은 결국 고통의 그림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제 나는 그 환상을 통과해, 다시 내 몸의 무게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 질문은 여전히 나를 붙잡고 있다. 몸 없는 지능은 과연 생각할 수 있는가? 그리고 나는 정말 뇌로만 살기를 바랐던 걸까, 아니면 그저 고통을 견디기 위한 환상을 쥐고 있었던 걸까? 결국, 그 질문은 인공지능이 아닌 나 자신에게 향한다. 나의 존재가 세계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묻는 질문으로.



몸은 나를 가두었지만, 동시에 나를 이 세계에 붙잡아두었다.

고통은 도피를 불러왔고 그 도피 속에서 사유가 태어났다.

나는 여전히 그 경계에서 흔들린다.

그리고 그 흔들림 속에서, 다시 세계를 더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