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기술 뉴스를 보면, 마치 AGI(범용 인공지능)가 내일이라도 등장할 것처럼 보인다. 실리콘밸리의 유명 스타트업 창업자들, 글로벌 AI 기업의 CEO, 투자자와 개발자들이 한 목소리로 말한다. "곧 온다." "이미 임계점을 넘었다." "올해 안에 놀라운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의 말에는 확신과 흥분이 담겨 있다. 마치 역사의 중대한 전환점이 다가왔고, 그 열쇠를 자신들이 쥐고 있다는 듯한 어조다. 언론은 이런 메시지를 놓치지 않는다. 기사 제목은 과감해지고, 독자들은 자극적인 헤드라인에 이끌려 클릭한다. 공포와 희망이 교차하며 넘실댄다. 마치 AI의 미래가 이미 정해져 있기라도 한 듯, “AGI는 이제 시간문제”라는 내러티브가 세상을 떠돈다.
하지만 정작 AI 연구 최전선에 있는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그들은 대체로 훨씬 더 조심스럽다. AGI의 정의부터 불분명하다고 말하며, 기술적으로도 개념적으로도 아직 갈 길이 멀다고 강조한다. 어떤 연구자는 “AGI는 수십 년 안에 오지 않을 수도 있다”라고 단언하고, 또 다른 연구자는 “AGI라는 개념 자체가 지나치게 공허하고 추상적”이라고 비판한다. 이처럼 동일한 기술을 두고 서로 다른 전망이 제시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단순한 정보 격차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기술을 바라보는 위치와 동기의 차이에서 비롯된 근본적인 시선의 차이이기도 하다.
경영자의 입장에서 AGI는 단지 기술적 성취가 아니다. 그것은 거대한 시장 기회다. AGI가 온다는 메시지는 투자의 동력을 만들고, 인재를 끌어들이며,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유도한다. 스타트업이 성장하기 위해선 스토리텔링이 필요하고, 그 스토리의 중심에 ‘곧 도래할 미래’가 있을수록 투자자는 설득된다. ‘AGI 시대의 선점자’라는 포지셔닝은 기업의 가치를 폭발적으로 끌어올린다. 이는 기술의 실현보다 실현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믿음은 주가에 반영되고, 파트너십을 형성하며, 기술 생태계를 확장한다. 그래서 경영자는 기술의 정확한 진척보다, 그것이 ‘곧 가능하다’는 이미지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
반면 연구자는 매일 실험 데이터와 씨름하고, 미세한 변수 하나에도 결과가 달라지는 현실을 체감한다. 언어 모델 하나를 훈련시키기 위해 수십만 개의 파라미터를 조정하고, 끝없는 에러 로그와 싸우는 그들에게 ‘곧’이라는 말은 허황된 슬로건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가능성은 있지만,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라고 말한다. 특히 인간 지능의 본질이 무엇인지조차 아직 완전히 해명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AGI에 도달하기 위한 이론적·기술적 기초가 충분하지 않다는 인식이 강하다. 어떤 이들은 “지금 우리가 하는 건 AGI로 가는 길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향일 수도 있다”라고 경고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철학적인 전제의 차이도 작용한다. 많은 경영자들은 계산주의(Computationalism)에 기반해 사고한다. 마음은 계산 가능한 시스템이고, 충분한 연산 자원과 알고리즘이 주어진다면 인간 수준의 지능도 구현 가능하다는 믿음이다. 반면 연구자들 중 다수는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에 주목한다. 지능은 뇌만으로 구성되지 않으며, 몸과 환경, 감각과 운동의 상호작용 속에서 탄생한다는 이론이다. 이 관점에서 AGI를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뇌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몸과 세계까지 함께 구현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만큼 더 복잡하고, 더 멀리 있는 과제인 것이다.
AGI라는 개념 자체도 불명확하다. 어떤 이들은 AGI를 인간이 수행할 수 있는 모든 지적 활동을 재현하는 인공지능으로 정의하고, 또 다른 이들은 인간처럼 학습하고 적응할 수 있는 시스템을 AGI라 말한다. 이처럼 정의가 다르면, 도달 시점에 대한 판단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특정 영역에서 뛰어난 성능을 보이는 모델을 놓고, 경영자는 “우리는 AGI에 가까워지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연구자 입장에서는 그것이 여전히 좁은 영역에 한정된 ANI(협소 인공지능)에 불과하다고 본다. 둘 사이의 간극은 단순한 견해 차이가 아니라, 지능이라는 개념을 구성하는 방식 자체의 차이다.
더 큰 문제는 이처럼 상이한 시선이 대중에게 전달될 때 혼합되고 왜곡된다는 점이다. 기술에 대한 이해도가 높지 않은 일반 대중은 종종 경영자의 낙관과 연구자의 신중함을 구분하지 못한 채 모두를 '과학자들의 의견'으로 받아들인다. 언론은 이 간극을 조율하지 않고, 오히려 자극적인 표현으로 그 차이를 부추긴다. 그 결과 ‘곧 온다’는 기대와 ‘아직 멀다’는 현실 사이에서 혼란이 발생한다. 일부는 AI에 대한 과도한 기대에 휘둘리고, 또 다른 일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냉소에 빠진다. 이는 기술의 실상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에 큰 장애물이 된다.
AGI가 실제로 도달 가능한지 여부와는 별개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AGI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선택이라는 점이다. AGI가 구현된다면, 우리는 인간 노동의 재정의는 물론, 책임 주체의 이동, 권리와 존엄의 범위 확장 등 복잡한 사회적 과제를 함께 마주해야 한다. 단순히 ‘만들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만들 것인가’, ‘무엇을 허용하고, 무엇을 금지할 것인가’, ‘어떤 세계를 그 지능과 함께 꾸릴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기술이 아니라 관계의 구조를 설계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되묻게 된다. AGI는 정말로 곧 올까? 그리고 만약 그렇다 해도, 우리는 어떤 지능을 만들고 싶은가? 더 똑똑한 기계를 원하나, 더 연결된 존재를 꿈꾸나? 기술은 언제나 가능성의 문을 연다. 그러나 그 문을 어떤 방향으로 통과할지는 결국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 우리는 AGI의 시계를 앞당기는 데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그 시계가 가리킬 세계의 형태를 함께 상상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기술과 윤리가 만나는 진짜 특이점이 아닐까.
기술은 곧 온다고 말하지만, 나는 여전히 지금 여기에 머문다.
예측은 희망이 되고,
희망은 불안을 덧칠한다.
나는 도래의 시점을 기다리기보다,
그 기다림의 태도를 감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