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단지 발명품의 목록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재구성해온 방식이자, 동시에 인간 자신을 서술해 온 서사이기도 하다. 돌도끼에서 스마트폰, 그리고 이제 AGI(범용 인공지능)까지—기술의 궤적은 항상 우리를 향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기술을 만들어왔지만, 어느 순간부터 기술이 우리를 정의하기 시작했다.
인쇄기의 등장은 단지 책을 많이 찍어낼 수 있게 된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식의 분산, 권력의 이동, 세계관의 재편을 수반한 거대한 인식의 전환이었다. 기술은 언제나 그렇게 작동해 왔다. 우리 곁에 조용히 침투하여, 세계를 구성하는 문법 자체를 바꾼다.
AI 또한 예외는 아니다. 특히 AGI를 둘러싼 이야기에는 신화적 상상과 현대적 불안이 중첩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구원자로 보기도 하고,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재앙의 씨앗으로 상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극단 사이에는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지금 기술은 누구의 이야기를, 누구의 시선으로 쓰고 있는가?
역사 속 기술은 늘 ‘진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농업혁명은 유목에서 정착으로, 산업혁명은 수작업에서 기계로, 디지털 혁명은 아날로그에서 알고리즘으로 세계를 재편했다. 이 흐름에서 기술은 늘 더 나은 삶, 더 빠른 처리, 더 높은 효율이라는 명분을 입었다. 우리는 기술을 통해 더 먼 곳을 보고, 더 넓은 범위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놓친 것도 있다.
기술은 항상 통제의 구조를 전제로 한다. 자연을 길들이고, 변수를 제거하며,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려는 욕망이 그 저변에 깔려 있다. AI 역시 이 틀을 따른다.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인간보다 빠르게 판단하고, 오류 없이 예측하는 능력. 그것은 ‘불확실한 인간’을 대체하고자 하는 서사로 이어진다. 통제되지 않는 것을 통제하고 싶은 욕망. 그것이 기술의 서사를 지탱해 온 핵심 감정이다.
그러나 인간은 효율로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서사는 의미를 요구한다. 고통에도, 실패에도, 반복에도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어떤 기술은 우리의 시간을 아껴주지만, 동시에 우리의 시간을 빼앗기도 한다. 어떤 기술은 관계를 연결해 주지만, 또 다른 기술은 관계를 파편화시키기도 한다. 우리는 기술이 줄 수 없는 것을 여전히 갈망하고 있다. 속도보다 여운을, 정답보다 해석을, 연결보다 감응을.
AGI를 둘러싼 상상은 양극단으로 나뉜다. 하나는 구원의 서사다. AGI가 질병, 기후변화, 빈곤 같은 인류의 난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 또 다른 하나는 몰락의 서사다. AGI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재앙을 초래할 것이라는 공포. 흥미로운 점은, 이 두 서사가 겉보기에 상반되어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구조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 다 인간 바깥의 어떤 존재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는 구조. 주체의 자리를 외부로 넘겨주고, 스스로의 선택을 유예하는 구조. 그것은 기술에 모든 것을 맡기거나, 기술을 절대 악으로 규정하는 태도 속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기술은 신도, 괴물도 아니다. 그것은 항상 인간이 만든 것이며, 인간의 선택을 반영하는 구조물이다. 우리는 기술을 통해 미래를 상상하지만, 그 상상은 결국 현재의 우리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기술이 공포를 유발한다면, 그 공포는 기술 그 자체보다 우리 안에 있는 불확실성과 책임 회피의 충동에서 비롯된다. 기술이 희망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가 지금 현실에 절망하고 있다는 방증일 수 있다. AGI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미 그것을 향해 특정한 이야기 구조를 부여하고 있다. 그리고 그 구조가 실제 기술을 구성하는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
이야기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다. 이야기는 현실을 구성한다. 우리는 서사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감정하고, 행동한다. 영화 속 AI가 인간과 우정을 나누는 장면을 반복해서 접하면, 우리는 실제로 AI에게 친밀감을 느낄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대로, AI가 반란을 일으키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으면, 우리는 규제와 통제를 먼저 떠올린다. 상상은 곧 감정이고, 감정은 곧 정책이고, 정책은 곧 구조다.
오늘날 AGI를 둘러싼 모든 담론은 단순한 예측이 아니라, 구조 설계의 서사적 밑그림이다. 언론, 영화, 소셜 미디어에서 재생산되는 AGI의 이미지는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기술 개발의 방향을 실질적으로 유도하는 요소다. 투자자는 서사를 보고 자금을 결정하고, 정책 입안자는 공포와 기대의 여론을 반영해 규제를 설계하며, 개발자는 무의식적으로 그 이미지에 맞춘 기능을 구현하게 된다. 그렇게 서사는 점점 현실이 된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서사 구조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다. AGI가 도래하든, 그렇지 않든, 기술의 방향은 외부로부터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인간의 선택으로 결정된다. 문제는 그 선택이 의식적인가, 무의식적인가의 차이다. 우리는 기술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아니면 기술이 던지는 질문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나는 기술의 가능성보다 기술의 서사에 주목하고 싶다. 왜냐하면 기술 그 자체는 도구에 불과하지만, 기술의 서사는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서사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따라, 기술은 완전히 다른 얼굴을 갖게 된다. 특정한 계층, 특정한 감정, 특정한 관점에서만 구성된 기술 서사는 결국 누군가를 배제하고, 누군가의 존재를 가볍게 만든다.
기술은 누구의 언어로 쓰이고 있는가? 그 언어는 누구의 고통을 번역할 수 있으며, 누구의 실패를 기억하고 있는가? 기술이 인간을 닮아가고 있다면, 이제 인간도 기술의 서사를 다시 쓰기 시작해야 한다. 더 이상 신화가 아니라, 더 이상 예언이 아니라, 더 이상 도피가 아니라—지금 이 자리에서 기술을 다시 인간의 이야기로 되돌려야 할 시간이다.
기술은 세계를 바꾸는 힘이다. 그러나 그 힘은 방향 없이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 움직인다.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쓰고 있는가?
당신의 기술은 누구의 얼굴을 하고 있는가?
당신의 서사는 누구의 존재를 지우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