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가 물었다
어릴 적, 기억에는 없지만 나도 종손 하면 안 되겠냐고 할아버지깨 물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종손으로 가족의 역사에 대해 굉장히 자랑스러워하셨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고서를 한글로 번역하시겠다며 잘 다루지 못하는 컴퓨터를 손녀에게 물어가며 여든이 다 되어 가는 연세에 독수리 타법으로 한자 한 자 써 내려갔다. 총 12권이라는 여느 유명한 작가도 쓰기 힘든 권수를 할아버지는 몇 년 동안 시간과 품을 들이셨다.
방학 때마다 서울에 올라가면 우리 집안에 얼마나 위대한 위인들이 많은지 사극을 보면서는 우리 집안에서 몇 명이 왕비로 나왔는지, 얼마나 권세 있는 가문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렇다 보니 차세대 종손인 동생과 나에 대한 할아버지의 애정도는 마치 기울어진 시소 같았다. 그러니까 나도 종손 하고 싶다는 말은 그 차이를 느낀 것이리라. 기울어진 시소를 조금 평행에 가깝게 만들어준 것은 할머니의 애정이었다. 이제 사실을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어릴 때는 할아버지는 동생을, 할머니는 나를 더 좋아한다고 굳게 믿었다.
머리가 굵어지면서 종손이라는 이름에 따라오는 귀찮은 일들이 꽤나 많다는 사실을 알고는 철회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어린 시절의 나는 할아버지의 차별에 상처를 받았다.
대학교 졸업 후 직장을 서울에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이제 막 돈을 벌어 놀고 싶은 20대 청춘의 혈기 왕성한 손녀와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식사하시고 책을 쓰시는 구도자와 같은 학자의 삶을 사셨던 할아버지와는 꽤나 부딪치는 일이 많았다. 말로 투닥거리는 날이면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어 저녁 식사시간에 맞추어 슬그머니 동네 슈퍼에서 장수 막걸리를 사 와
“할아버지 막걸리 한잔 하실래요?”
라고 묻는 게 애교 없는 손녀딸이 건네는 사과였다. 할아버지는 “그럴까?” 하시며 한 잔, 두 잔 주고받는 잔에 우리는 서운함을 녹여냈다.
할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보내드린지 채 열흘도 되지 않아 할아버지가 갑자기 위독해지셨다. 요양원 부원장의 말이 할머니가 돌아가신 걸 눈치채신 거 같다고 했다. 가족 모두 말하지 않았는데 할아버지는 할머니 부재의 이유를 느낌으로 알아차리신 거 같다. 할아버지께서 부원장에게 이제 삶의 의지가 없어라고 말한 그 다음날 요양원에서 병원으로 입원하셨다.
삼촌이 00이 왔어요 라는 말에 “응”이라는 답하는 할아버지께 나는 바보처럼 "할아버지 저 왔어요"라는 말 밖에 하지 못했다. 내 기억 속의 할아버지보다 너무 약한 모습에 뭐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 왔어요라니... 마지막 말이 이게 되면 안 되는데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사탕처럼 걸려 목만 메고 나오질 않았다.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상태에서 걸려온 남편 전화에 그냥 이렇게 떠나보내면 어떻게 하냐고 전화통을 붙잡고 울었다. 할아버지가 그토록 사랑했던 동생이 호주에서 도착할 때까지만 제발 버텨주시길 바라며 하루가 지났다.
다음날, 모두가 둘러앉아 내가 몰랐던 젊었을 적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할아버지 의식이 돌아왔다.
그때 목에 걸렸던 사탕이 튀어나오듯 말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사랑해요. 알죠?
응
몇 시간 뒤, 할아버지가 할머니 곁으로 가셨다. 호주에서 동생이 도착하기 두 시간 전이였다.
모든 상처에 딱지가 앉고 새살이 돗듯이 어릴 때의 마음의 상처에도 어느새 단단한 새살이 돋았다. 이제 사진첩을 보면 상처가 아닌 즐거웠던 추억이 생각난다. 사랑의 크기를 떠나 할아버지가 주시는 사랑은 진짜였고 사랑 받았던 기억이 모여 지금의 나라는 사람을 만들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알고 표현 할 수 있는 성인으로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주신 사랑을 주셔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