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맡에 약이 쌓여가는 세
나이가 들수록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자주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은 부산에서 보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4월의 어느 봄날, 우리 가족은 갑작스럽게 부산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당시 경찰관이셨던 아버지는 이미 2년 전부터 부산시청으로 근무지를 옮겨 가 계셨다. 내 기억으로는 당시 부산 부시장이 아버지의 친구분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2년 동안 서울에서 아버지 없이 지내던 우리 가족은 갑자기 연고도 없는 부산으로 향했다. 전학 간 학교에서 '서울 아이'는 구경거리였다. 아이들은 신기한 듯 나를 놀려댔고, 나는 늘 서울 친구들이 그리워 향수병을 앓았다.
그 그리움이 얼마나 컸던지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방학만 되면 혼자 짐을 꾸려 서울로 달려갔다. 방학식 이튿날이면 어김없이 서울행 기차를 탔고, 방학이 끝날 즈음이 되어서야 겨우 부산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서울에는 이모와 외삼촌들이 많았다. 모두 10명이었다. 그래서 외할아버지와 할머니 댁을 시작으로 이 집 저 집 인사를 다니며 지내다 보면 한 달여의 방학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외할아버지께서는 붓글씨 솜씨가 정갈하셔서 서예 학원을 운영하셨다. 국선에서 최고의 상도 받으시고 당시 꽤 명성이 있으셨던 터라 학원은 늘 붐볐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머니께서 가끔 할아버지가 쓰신 ‘불(佛)’ 자 휘호를 몇 장 받아 오라고 하셨는데, 당시 부산에서 20~30만 원이라는 꽤 큰 금액에 팔리기도 했다. 특히 일본 관광객들이 할아버지의 글씨를 자주 찾곤 했다.
외갓집에 머물 때면 할머니는 자주 냉면을 만들어 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트에서 파는 간편식을 사다가 정성스레 고명을 얹어 내어주신 것 같다. 할머니는 종일 방바닥을 닦고 살림을 정돈하시던 정갈한 분이셨는데, 유독 경대 근처에는 이름 모를 약병들이 가득했다.
“할머니, 왜 이렇게 약이 많아요?”
어린 마음에 걱정이 되어 물으면 할머니는 아침 식사 후 소화가 안 된다며 활명수 한 병을 시원하게 들이켜고는 대답하셨다.
“야 이놈아, 너도 늙어봐라. 다 이렇게 된다. 할미는 이 약 없으면 벌써 죽었을끼다.”
약 더미를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웠던 나는 잔소리를 보태곤 했다.
“할머니, 이렇게 많은 약을 매일 드시면 큰일 나요.”
“그런 말 마라. 니는 지금 몰라서 그런다. 나이 먹으면 다 이렇게 머리맡에 약이 쌓이는 기라.”
할머니는 허허 웃으시며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긴 세월이 흘렀다. 이제 내 머리맡은 아니지만, 책장 한쪽에는 몇 가지 건강보조식품이 자리를 잡고 있다. 비타민 C, 마그네슘 같은 것들이다. 다행히 고혈압이나 당뇨 같은 지병은 없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오늘따라 영양제를 챙겨 먹으며 문득 아내에게 말을 건넨다.
“갑자기 외할머니가 보고 싶네. 그때 할머니도 참 약을 많이 드셨는데….”
조금 전 비타민 C 를 먹으면서 “나이가 들면 머리맡에 약이 늘어난다”던 외할머니의 말씀이 다시 떠 오른다. 그땐 그저 노인의 넋두리라 생각했던 그 문장이, 나이 듦의 길목에 서 있는 오늘따라 유난히 생생하게 귓가를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