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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색 고양이 Jan 11. 2021

어느 날, 내가 잘못했다고 빌었다.

2014년 영국 런던 

 2014년 초. 히드로 공항에서 픽업 기사를 만났다. 처음 만난 이방인이었다. 그는 능숙하게 공항을 빠져나가며 런던엔 왜 왔느냐 물었다. 특유의 영국 액센트. 앞으로 무수히 듣게 될 질문이었다. 왜 떠났더라? 서울에선 앞이 안 보여서 짐을 싸긴 했는데. 말을 고른 끝에 '잠깐 쉬러 왔다'고 했다. 그는 말을 잇고 싶은 눈치였지만 난 시차와 오랜 비행으로 한마디도 벅찼다. 창문 밖으론 새로운 시각정보가 쏟아지고 있었다. 


 더 거슬러 올라간 2012년. 난 나를 미워하고 있었다. 생각지 못한 분야에서 초년생 테잎을 끊거나 믿었던 오랜 연인의 배신, 이별같은 것은 또래의 클리셰였다. 보편적인 일에 나는 왜 이렇게 휘청댈까. 약해진 자아는 내면을 좀먹었다. 그러나 서울은 내게 성찰을 허락하지 않았다. 자정까지 이어지는 야근, 점심 시간엔 각종 병원 다니기 바빴다. 주말엔 공허한 소비가 이어졌다. 출근길 강남행 전철에서 호흡곤란을 겪고, 병원에선 위장이 아니라 정신이 아픈거라는 말을 들었다. 이렇게 살아도 될까. 사람에 대한 존경심이나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내 근간을 흔들었기 때문에 일상성이 훼손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서 떠났다. '그 나이에' 하는 비웃음을 냉소하며 영영 돌아오지 않을 듯이 서울을 등졌다. 


  런던의 봄은 서울보다 빨리 왔다. 2월 말인데 차가운 바람 속에 따뜻함도 느껴지고 꽃이 움트려고 했다. 3월엔 첼시의 싱글 스튜디오로 거처를 옮겼다. 작은 방이었지만 필요한건 모두 있었고 무엇보다 하늘이 뻥 뚫려 있어서 들어서자마자 반해버렸다. 버선발로 웨이트로스에 뛰어 가 꽃을 사왔다. 권태로웠던 서울의 관성이 차단된 곳에서 내가 할 일은 하루하루 새로움에 맞서는 것이었다. 도로 방향, 버스 노선, 오이스터 카드, 생활문제해결 같은 것들 말이다. 변화하는 계절은 나에게 어제와는 다른 도시 풍경을 다채롭게 보여주었다. 런던의 봄은 나에게 삶에서 여전히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고 알려줬다. 그렇게 묵은 습관을 걷어내고 새 일상을 영위해내자 마침내 날 것의 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일어나 창문을 열고 침대에서 푸른 하늘을 본 3월의 어느 아침에 나는 처음으로 나에게 잘못했다고 빌었다. 

 

" 그 동안 나를 괴롭히던 괴물이 조금씩 힘을 잃어간다. 만물이 살아나는 봄 기운에 밀려 잘못했다고 울고 빈다. 나는 괜찮다고 말한다. 용서한다. 끌어 안는다. " - 2014년 3월 23일 일기 


 괴물은 물론 나였다. 당연하기도 헤어진 연인 따위나 직장, 서울이 아니었다. 그동안 괴롭혀서 미안했다고 싹싹 손을 빌어대는 내면아이를 정면으로 응시하고서야 비로소 용서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랑 어떻게 화해하지? 번역투 문장 거슬리는 자기계발서 목차에서나 보던 내용인데. 늘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비법을 묻고싶다. 아직까진 만나보지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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