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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바댁 린다 Apr 02. 2023

말벌은 무서워요

토요일 낮, 점심을 먹고 난 후 거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온몸이 나른해지더니 몸은 축 늘어지고 눈꺼풀은 자꾸만 내려와서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자기, 우리 남산에는 내일 가야겠어. 잠이 너무 와."

"알겠어, 자기"

그리고는 방에 들어가서 이불을 덮고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그런데 한창 잘 자고 있는 나를 남편이 갑자기 깨우기 시작했다.


"자기, 아비스파(avispa)가 들어왔어. 나 아비스파 알레르기 있단 말이야. 물리면 큰일 나!"


한참 잠에 빠져있던 데다 아비스파가 뭔지 몰랐던 나는 잠이 덜 깬 채 멍하니 남편을 쳐다보며, 뭐라고?라고 했고, 남편은 아비스파가 들어왔다며 흥분한 표정을 감추지를 못했다.

아베하(aveja) 아니고?라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다. 아비스파라고 했다.

아비스파가 뭐지? 하며 정신을 차리고 사전을 찾아보니 말벌이었다.

아... 말벌...


남편에 말벌 알레르기가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말벌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나서는 말벌이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복도에 있다며 현관문을 열었다. 난 또 집 안에 말벌이 들어온 줄 알고 놀랐는데, 복도에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사 온 우리 집은 옥상이 있는 주택인데 옥상으로 올라가는 복도에 있는 창문이나 옥상 입구 미닫이 문을 통해서 말벌 두 마리가 들어온 것이었다.

계단을 올라가서 남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창문이었다. 커다란 창문에 말벌 두 마리가 사이좋게 나란히 붙어 있었다. 벌레는 남편이 아니라 내가 무서워하는데 말벌 앞에서 꼼짝하지 못하는 남편이 몹시 귀여웠다.

 

갑자기 그날이 떠올랐다.  

작년 6월 초, 내 생애 첫 수술을 한 후 혼자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온 첫날 새벽에 화장실에 가려고 불을 켰다가 엄지 손가락보다 조금 작은 커다란 바퀴벌레 한 마리가 거실 바닥에 있는 걸 보고는 기겁을 해서 엉엉 울었던 그날.

혼자도 아니고 결혼을 했는데 남편은 멀리서 오지도 못하고 혼자 퇴원하고 집에 왔는데 유일하게 나를 맞이해 준 게 커다란 바퀴벌레였다니.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남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동안 쌓여있던 서러움이 폭발해 버렸다. 멀리서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던 남편은 엉엉 울면서 서러움을 폭발하는 나에게 괜찮아, 미안하다밖에 말할 수 없었던 그날.


그날 이후로 바퀴벌레 퇴치제를 구입해서 온 집에 무장을 했고, 그 후론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사 온 집은 남산타워가 바로 보이는 남산 아랫동네에 있는 오래된 주택인 데다 옥상까지 있어서 바퀴벌레뿐만 아니라 각종 벌레들의 놀이터가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가졌기에 말벌이 들어온 게 놀랍지는 않았다. 서울시가 한눈에 보이는 끝내주는 전망과 남산타워가 눈앞에 보이는 멋진 루프탑을 가진 반면 남산에 있는 각종 벌레들과 바퀴벌레까지 함께 가지게 된 것이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는 법칙에 순응한 것이라고 할까.

최강의 바퀴벌레약을 찾아서 집안 곳곳에 설치해 둔 덕분에 지난달에 바퀴벌레가 나온 이후 아직까지 보진 못했는데, 날벌레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어서 벌레퇴치기를 주문해 놓았다.


그런데 말벌이 들어왔단다.

그렇게 무서워하는 말벌이 복도에 있는 데에도 아침이 되자 문을 열고 나가서 말벌들이 창문에 붙어 있는 걸 확인한 후 조심스레 복도에 있는 식물들에게 물을 주고 들어온 남편은 아마도 말벌을 퇴치하기 전까지는 루프탑에 올라가지 못할 것 같다. 남편이 복도 창문을 활짝 열어뒀는데 말벌들이 창문에 부딪치기만 하고 나가지는 못했다며 한숨을 쉬는 남편이 나는 왜 이리도 귀엽고 재밌는지.


주문한 살충제가 도착하기 전에 말벌들이 훨훨 날아가서 말벌 알레르기가 있는 남편의 마음이 편해지길.

전 세계적으로 벌이 없어지고 있어서 문제가 심각하다고 한다. 꿀벌에만 해당하는 건지, 말벌도 해당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복도에 들어온 김에 애플수박 모종에 핀 꽃 수정을 해주고 가기를 바라본다.


말벌들아, 편히 쉬었으면 떠나기 전에 일 좀 해주고 가렴!

 

좌-복도에 있는 애플수박과 토마토 모종 우-애플수박에서 핀 샛노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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