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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지 Mar 26. 2018

#80 <더 포스트> 명명백백하기에 공허한 것들

왜, 선한 것은 명백한가?

나는 기자가 나오는 드라마를 좋아했다. tvN <나인: 아홉 번째 시간여행>은 여전히 나의 인생작으로 꼽히고 HBO의 <News Room>을 밤새 몰아보며 열광했던 시절도 있다. 작년 tvN <아르곤>이나 SBS <조작>도 흥미롭게 본 편이다. 아, 드라마는 아니지만 <스포트라이트>는 말할 것도 없다. 기자에 뜻도 없으면서 왜 기자 이야기를 유난히 좋아했을까. 드라마 속 기자들의 세계에 선과 악은 명백했고, 명백한 선을 추구하는 그들의 모습은 숭고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통해 믿고 싶었다. 세상에 선한 길은 늘 뚜렷하고, 그 길을 치열하게 추구하는 이들이 세상을 이끌고 있다는 것을. 물론, 이것이 허무맹랑한 꿈이었다. 선과 악의 길은 현실에서 그리 명백하지 않고, 선의 길을 따라가는 데에는 훨씬 더 복잡한 것들이 얽혀 있는 세상이다.


내가 열광했던 그 숱한 이야기에 대한 배신감을 뒤로하고 물었다. 그 많은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선한 길을 추구하는 것은 어떻게 그토록 명백할 수 있었을까? <스포트라이트>에서 기자들에게 목표는 명백했다. 악행을 너머 더 큰 시스템을 찾아 고발하는 것. 그걸 향해 달려 나가는 데에 주인공의 욕망은 조금도 섞여 있지 않다. 물론 보스턴 글로브의 기자들이 그만큼 숭고한 믿음을 갖고 싸워나갔을 것이란 데에 의심이 없다. 그들의 직업의식은 여러모로 회자되고, 칭송받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의 많은 보통의 사람들에겐 선과 욕망의 길이 그렇게 명확하게 갈려 선의 길로 자연스럽게 이끌어지지 않는다. 그럼 이제 조금 다른 질문을 해야 한다. 선과 악과 한 사람의 욕망이 복잡하게 얽혀 있을 때, 우리는 스스로 '어떻게' 더 나은 가치 쪽으로 향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것인가?

 

기자가 아닌 발행인, 남성이 아닌 여성의 이야기

이 '어떻게'에 대한 과정은 늘 생략되어 있었기에 <더 포스트>의 로그라인과 예고편은 신선했다. 기자가 아니라 발행인의 서사, 남성이 아니라 여성의 서사. 그건 수많은 언론 드라마와는 다른 이야기이자 색다른 시각이기 때문이다. 기자가 아니라 비즈니스맨이기에, 당연한 명제로 넘겨졌던 절대 '선'이 당연한 명제일 수 있는지 다시 되짚어보게 된다. 그 수많은 드라마 속 기자들의 비장하고도 처연한 사명감, 무언가를 찾아서 고발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기자의 명분이 정말 자본주의의 현실에서 매 순간 중요할 수 있는가? 또 남성이 아니라 여성 주인공이란 점에서도 이 논의를 확장한다. 여성 발행인이 유일무이했던 시절, 자신의 선택 하나가 여성의 역량 전체를 대표할 때, 그것이 설령 올바른 길이더라도 그녀는 정말 도박을 할 수 있는가? 혹은 정의와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숭고한 기자들이 역설적이게도 여성을 차별하는 이중성은 왜 존재하는가? 캐서린 그레이엄을 스크린에 올릴 때 우린 이런 것들을 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선한 시각에서 시작한 영화가, 전략적으로 특별한 입장의 캐릭터를 스크린 위로 올려놓았지만, 이러한 질문들에 충분한 대답을 주지는 못했다.


'LET'S GO' 그 뒤에 생략된 과정 

워싱턴 포스트의 발행인 캐서린 그레이엄. 그녀는 다양한 입장과 관계 속에 놓여 있다. 그녀는 신문사의 존립을 위해 매 순간 투자자들을 설득해야 하고 회사 경영의 리스크를 줄여야 한다. 펜타곤 페이퍼 작성을 직접 지시한 당시 국방부 장관 로버트 맥나마라의 오랜 친구이기도 하며, 또 정권이 오랜 친구이기도 하다. 펜타콘 페이퍼가 그녀의 회사 수중으로 들어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 또한 보도에 회의적이었다. 합리적인 고민이다. 정부를 이길 수 있는 확률이 낮고 회사가 무너질 확률은 높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망설이며 그녀의 다양한 관계 속의 사람들의 의견들을 듣는다. 결정적 순간 그녀는 위대한 기자의 사명감을 지키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린다. 그러한 결정은 오직 단 한마디로 설명된다. Let's go. 그냥 '가자'이다. 그 이외에 어떤 설명도 붙지 않는다. 그녀가 그런 결정하기까지 어떤 사고의 과정을 거쳤는지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영화 속에 그 결정의 과정과 근거가 생략된 이유는, 그것이 영화 속 영웅 서사에는 명백하고 당연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캐서린 그레이엄은 선한 영웅이고, 여러 고난이 있지만 결국 눈에 훤히 보이는 선한 길을 택할 것임은 설명하지 않아도 영화 속에서 용인된다. 궁극에 정의의 길을 택하는 숭고한 모습만으로도 우린 포만감을 얻는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보도를 하는 것이 결국 더 많은 국가적 피해를 가져오고 그것은 곧 개개인의 피해를 가져오기도 한다. 또 보도를 하여도 결국 정부가 승리하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언론사는 수도 없이 많기에, 보도를 포기하는 언론사는 수도 없이 많다. 이 모든 위험과 피해, 결정에 따르는 책임들. 이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보도'를 향해 'LET'S GO'라고 말하는 이 발행인의 생각은 무엇인가. 어떤 가치관에서 시작된 것이며 그 가치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대체 무엇인가? 영화는 이런 질문들은 괄호 안에 넣은 채 오직 '가자'고 말하는 언론인의 숭고한 모습만을 화면에 가득 채울 뿐이다. 


과거로 돌아간 페미니즘

'여성도 남성이 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영화가 캐서린을 통해 명확하게 말한다. 페미니즘 논의가 뜨거워지고, 양성평등을 향한 요구가 날로 상승하는 현 사회에 꼭 필요한 메시지이다. 그러나 또한 영화는 너무 명백한 논의를 통해 쉽게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 시대는 과거였다. 여성이 직업 전선에 뛰어드는 것 자체에 훨씬 더 높고 견고하고 비합리적인 벽들이 세워져 있던 시기였다. '여성이 경영하는 회사는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오가는 시대였다. 여성혐오가 뚜렷하고 명백한 '악'으로 드러나던 시기였고, 영화를 보는 '현대인'은 그 시대에 문제를 제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이견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여성혐오와 성 불평등을 현실에서 훨씬 더 복잡한 지표로 마주하고 있다. 현대인은 훨씬 더 교묘하고 훨씬 더 딜레마적 상황에서 페미니즘과 여성혐오를 논의하고 있다. 그렇기에 영화가 공허하게 느껴진다. 더욱 복잡한 현실에 맞딱뜨리며 매일 수많은 질문들을 꼬리를 물며 고민해야 하는 나에게, 영화는 그 어떤 대답도 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것에 질문을 던진다

영웅의 세계에서 정의는 늘 명백하다. 저 순간 저 영웅은 당연히 정의롭고 승리할 수 있는 길을 간다. 그러나 왜 현실에서는 그렇게 명백할 수가 없을까. 왜 그렇게 모든 길이 복잡하고 모든 길이 흐릿하게 보일까. 영화에서처럼 선과 정의의 길, 승리의 길은 명백한 하나가 아닌 것일까. 

우리 사회가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보고 있으면, 우리는 거기서부터 다시 논의를 시작해야 하는 것 같다. 당연한 선을 따르는 영웅 서사가 아니라, 흐릿해지는 현실 속 정의에 대해서. 현실 속 수많은 가치 지표들 사이에 우린 무얼 믿고 따라야 하는가? 궁극에 더욱 선한 것을 선택한다는 확신을 어디서 얻어야 할까? 글쎄, 영화는 거기에서 만큼은 명료하게 대답하지 않은 것 같다. 


스필버그의 영화답게 <더 포스트>는 위대한 인물의 승리를 숭고하고 아름답게 그려낸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나는 뿌듯한 미소를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영화관을 나오며 마주하는 더욱 복잡한 현실 속에서 나는 캐서린 그레이엄에게 궁금하다. 이 영화가 묘사하는 것보다 당신의 현실은 더욱 복잡하고 정의의 길은 더욱 흐릿했을 텐데 현실 속 수많은 길 사이에서 당신은 어떻게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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