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 치메로 향하는 트레일 입구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짐을 싸서 호스텔을 체크아웃 한다. 아내는 도비아코 유스호스텔이 더 편하고 좋다고 계속 머물기를 원하지만 오래전 이미 근처의 R 호텔에 이틀 더 머물려고 예약을 해두었다. 호텔비도 이미 선불했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다. 도비아코 호스텔에서 1 km 정도 거리의 R 호텔은 숙박비는 지금 호스텔에 비해 2배 이상 비싼 고급(?) 호텔이다. 나 혼자라면 언감생심 묵을 수 없는 호텔이다. 그러나 아내에게 호스텔과 싸구려 숙소에만 머물게 하는 것이 미안해서 큰맘 먹고 예약한 전통적 알프스 살레 스타일의 목조호텔이다.
아무리 부자라도 여행다운 여행을 경험하려면 한번쯤 저렴이 여행을 해보라고 한다. 편안한 비행석, 고급 호텔, 최고급 식당 등 호화로운 여행이야말로 누구에게나 선망의 대상일 게다. 하지만 때론 우리처럼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저렴한 숙소에서 자면서 길 위에서 뜻밖의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해보는 것도 여행의 참맛 아닐까? 반대로 우리처럼 매번 저렴이 여행만 하는 사람도 한번쯤은 다소 호사(?)로운 여행을 해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아무리 주머니가 얇아도.
거리는 별로 멀지 않지만 무거운 캐리어가 두 개나 있어 호스텔 직원에게 택시를 좀 불러 달라고 했더니 난처한 표정이다. 여기 택시는 일반 택시와는 다른 8인승 승합차인데 둘만 타더라도 8인 요금을 내야 한단다. 할 수 없어 R 호텔에 전화를 했더니 금방 주인이 차를 가지고 와 픽업을 해준다. 호텔은 가족이 경영하는 듯한 소규모 호텔인데 깨끗하고 살레 풍의 아름다운 호텔이다. 문을 열면 전망이 탁 트이고 발코니도 있어 좋은데 단지 앞으로 차들이 지나다녀 좀 시끄러운 것이 흠이다. 주인장의 배려로 이른 체크인을 하고 방에 짐을 둔 체 오늘은 피스칼리나 계곡(Val Fiscalina)으로 가기 위해 호텔 바로 앞의 정거장에서 446번 버스를 탄다. 피스칼리나 계곡으로 갈려면 세스토(Sesto) 지역의 후니비에 몬테 엘모(Funivie Monte Elmo, 독일지명 Helm) 정거장에 내려 다시 440번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440번 버스는 10분 만에 피스칼리나 계곡(Val Fiscalina) 입구에 우리를 내려준다.
세스토(Sesto)는 어제 우리가 기차로 가려다 못 가고 돌아온 곳이다. 돌로미티는 워낙 넓은 곳이라 바쁜 여행객들은 이곳의 이름도 잘 모르고 그냥 지나쳐 버리기 마련이다. 우리도 여기 오기 얼마 전까지도 잘 몰랐으니까. 돌로미티의 동쪽에 위치한 세스토 돌로미티(Sesto Dolomiti)는 웅장함, 장쾌함으로 돌로미티의 남성적인 야성미를 자랑하는 곳인데 세스토가 중심마을이다. 이곳에서 특히 유명한 곳은 피스칼리나 계곡이다. 이 계곡에서 시작되는 102번 길은 트레치메의 로카텔리(Locatelli) 산장까지 이어지는 유명한 트레킹 코스 중 하나이다. 우리는 트레일 초입에 위치한 폰도 발레(Fondo Valle) 산장까지 4.5km의 평탄하고 아름다운 숲길을 걸어보려고 아침부터 서둘러 온 것이다.
피스칼리나 계곡(Val Fiscalina ) 입구에서부터 V 자 계곡의 절경이 펼쳐진다. 마침 오늘은 일요일이라 많은 하이커들이 가벼운 차림으로 이 길을 걷고 있다. 길은 깊은 계곡 사이로 평탄하게 이어진다. 아내는 챙겨 온 스틱에 의지하며 천천히 걷는데 길이 어렵지 않아 신바람이 나서 잘도 걷는다. 날씨는 점점 더워지고 하늘에 가끔씩 구름이 걸리기도 하지만 걷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이다. 걷다가 길가 벤치에 앉아 간식을 먹기도 하며 쉬엄쉬엄 1시간쯤 걸으니 마침내 오늘의 목적지 폰도 발레(Fondo Valle) 산장이 나타난다. 산장 주변은 얼마 남지 않은 늦여름의 주말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주위의 경치가 일품이다. 우리나라의 유명 사찰들이 물 좋고 정자 좋은 절경에 위치하듯 대부분의 돌로미티의 산장들도 주변에 아주 뛰어난 경관들이 펼쳐진다. 우리는 사람들 틈에 섞여 사진도 찍고 그늘의 벤치에 앉아 쾌청한 늦여름의 날씨를 즐긴다. 대부분의 하이커는 가족을 동반한 현지인들 같다. 동양인은 우리 말고는 없다. 점심때가 되어 식사를 하려는데 대기줄이 한참 길다. 점심을 먹고 2시 20분경 천천히 하산을 시작하여 호텔에 돌아오니 4시다. 적당히 피곤하지만 매우 만족스러운 하이킹이었다.
굳이 구분하는 것이 우습지만 트레킹과 하이킹은 무엇이 다른가? 통상 트레킹은 잘 다듬어진 길을 백팩을 메고 1~2일간 다소 고생스럽게(?) 걷는 것이라면, 하이킹은 가벼운 차림으로 하루 또는 몇 시간을 편하게 걷는 것일 게다. 하이킹이면 어떻고 트레킹이면 어떤가? 늦여름 아직도 다소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이런 아름답고 호젓한 알프스의 산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은 돌로미티가 우리에게 주는 크나큰 선물이다. 동부 돌로미티가 주는 또 다른 선물은 대부분의 지역에서 케이블카를 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서부 오르티세이 쪽은 가는 곳마다 케이블카를 타야 되어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 그런데 동부 쪽에는 거의 케이블카를 탈 필요가 없고 대중교통으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R호텔의 다소 비싼 숙박비에는 아침과 저녁 식사가 포함되어 있다. 7시부터 시작되는 저녁 식사는 역시 기대 이상이다.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식당 분위기에 손님들도 최대한 젊잖은 복장 차림이다. 남티롤 전통 복장 차림의 종업원들은 저녁 식사 내내 정성을 다해 서비스한다. 전채부터 후식까지 5가지나 되는 풀 코스 메뉴 하나하나가 정성이 가득하다. 오랜만에 아내와 제대로 된 저녁 식사를 즐겨보는 모처럼의 기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