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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혜린 Aug 29. 2024

장편 소설 <아무는 개> (13)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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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희는 다음 날 오전이 다 지나도록 일어나지 않았다. 얼굴이 여전히 창백했다. 선희의 얼굴은 더 창백해졌다. 선희는 창백해진 얼굴로 계속 기침했다. 그러면서 유우 2세에게 기침이 옮을까 봐 염려되었는지 팔로 입을 막았다. 마스크가 없으니 이렇게라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유희의 이마를 짚어 본 남 노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상허네. 열도 없고 맥도 정상인데 왜 안 일어나지?”

  “기절한 거 아닐까요?”

  유우가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혹시 머리를 다친 건 아니겠죠? 우리 유희, 머리 좋고 똑똑해서 큰 사람 되어야 하는데 머리 다치면…… 아니, 그것보다 머리를 다쳤다면 병원에 가서 CT라도 찍어 봐야 할 텐데 돈도 없고…… 내가 이 모양 이 꼴이라…….”


  선희가 울먹거렸다. 그러다가도 간간이 기침했다. 선희는 동대문에서 옷 장사했을 때를 떠올렸다. 좁은 가게마다 옷들을 채워 넣고 손님들을 영업하기 위해서는 목소리도 크고 성격도 세야 했다. 선희는 옷을 보고 가라는 이야기조차 잘하지 못했다. 손님들과 눈도 똑바로 마주치지 못했다. 진상 손님들이나 막 나가는 이웃 주인들과 싸우는 일은 유희의 몫이었다. 유희는 학교가 끝나면 곧장 가게로 왔다. 좁은 가게 한쪽에 놓인 작은 스툴에 앉아 숙제하거나 책을 보았다. 그러다가 손님을 가로채 갔다는 둥, 구경만 하려고 들어온 건데 옷을 사라고 강요했다는 둥 이상한 소리가 들리면 벌떡 일어나서 달려왔다. 말을 제대로 하기도 전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선희 대신 우리 언니 건들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유희의 앙칼진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비실비실 물러나곤 했다. 유희가 두 손을 허리에 댄 채 의기양양하게 선희를 쳐다보면 선희도 그제야 눈물을 닦고 미소를 지었었다.


  선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유우 2세가 선희에게 아장아장 걸어갔다. 앙증맞게 쥔 주먹으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선희는 유우 2세를 꼭 껴안았다. 유우 2세가 숨이 막혔는지 팔과 다리를 버둥거렸다. 우으응, 하는 소리를 낸 뒤에야 선희는 유우 2세를 놓아주었다. 동민은 말이 없었다. 침묵한 채 제 손등에 생긴 상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이나 내일쯤 기성이가 올 것이니 그때 한번 데리고 나가서 봐 주라고 함세. 오늘 기성이 월급날이니까 병원비는 일단 그걸로 내고.”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꼭 갚을게요.”

  “무얼, 서로 돕고 사는 게지.”


  유우는 유희의 이마를 다시 짚어 보았다. 이마가 차가웠다. 유우는 자신의 카디건과 스웨터를 가져와 유희에게 덮어 주었다. 그것도 선희가 준 것이니 선희가 유희를 덮어 주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민형이 생각났다. 아직도 경찰서에 있을지 궁금했다. 뉴스를 볼 방법이 없으니 배급자들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는데 유희마저 지금 굴 안에 있으니 답답했다. 일단 기성을 기다려야 했다. 조강은 동민과 싸웠기 때문에 당분간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으음…….”

  그때, 유희가 미간을 찡그리면서 신음을 냈다. 

  “유희야!”

  선희가 유희의 손을 잡았다. 손도 차가웠다. 

  “언니…….”

  “그래, 이제 정신이 들어?”

  “나 왜 여기 있어? 수학여행 가야 하는데!”


   유희가 벌떡 일어났다. 유우가 덮어 준 카디건과 스웨터가 동굴 바닥에 떨어졌다. 유우는 얼른 자신의 옷들을 주웠다. 굴 안에서는 빨래할 수 없으니 옷도 최대한 깨끗하게 보관해야 했다. 떨어지자마자 주웠는데도 옷에 먼지가 묻었다. 유우는 조용히 먼지를 털었다. 


  “지금 수학여행이 문제가 아니야. 너 어제 우박 맞고 기절했다가 지금 일어났어. 어디 아픈 데는 없어? 머리라든가…….”

  “아, 몰라! 내가 수학여행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게 다 언니 때문이야! 괜히 왔어!”

  “지금 그게 언니한테 할 소리니? 네 언니가 여기에서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데…… 이게 혼자 잘살자고 하는 거야? 널 위해서 희생하고 있는 거야.”

  “난 희생해 달라고 한 적 없어요!”


  남 노인이 나무라자 유희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그러다가 왼쪽 머리를 문지르면서 다시 신음을 흘렸다. 선희가 놀라서 외쳤다.

  “그래, 그래. 내가 다 잘못했어! 일단 굴 밖으로 나가자마자 병원부터 가. 알았지?” 

  “내가 알아서 할게. 신경 쓰지 마.”

  “나가면 기성이 소식 좀 알아봐 다오. 아무래도 이상해. 기성이 일하는 중국집 알지?”

  유희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에 한 손으로 머리를 문지르면서 일어났다. 그러다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손등의 상처를 보고 있던 동민에게 말을 걸었다.

  “어제 구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뭘, 이후에도 아무 일이 없어야 감사할 수 있는 일이지. 수학여행은 어차피 물 건너갔으니 네 언니 말대로 병원부터 가 봐.”

  “네.”


  유희는 남의 일이라는 것처럼 무심하게 말한 뒤 깨진 플라스틱 대야를 들었다. 어제 굴 밖에 있던 플라스틱 대야와 책을 동민이 다시 굴에 들여왔던 것이다. 대야는 가운데에 금이 가 있어서 금방이라도 반으로 쪼개질 것처럼 보였다.

  유희는 대야를 머리에 뒤집어썼다. 대야에서 블랙 헤일 하나가 떨어졌다. 금귤만 한 크기였다. 유우 2세가 블랙 헤일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유우가 그보다 먼저 재빨리 블랙 헤일을 집었다. 

  “아얏!”

  생각보다 힘을 많이 주었는지 유우의 손바닥이 블랙 헤일의 모서리에 긁혔다. 긁힌 부분에 금세 피가 맺혔다. 


  “왜 그래, 어디 다쳤어?

  “괜찮아요. 별거 아니에요.”

  남 노인의 물음에 유우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유우는 눈썹을 찌푸린 채 상처를 바라보았다. 가운데 손금과 상처가 하나로 겹쳐 있었다. 감정선과 지능선이라는 두 개의 손금이 하나로 붙어 있는 막쥔 손금이었다. 원숭이 손금이라고도 불렸다. 극과 극의 운명을 가진 손금이었다. 부자가 되거나 낙오자가 되거나. 바보가 되거나 천재가 되거나. 지금은 낙오자이고 바보가 된 것 같지만 버티는 데 성공하면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었다.


  그것도 민형이 무사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혼자서는 ― 물론 유우 2세가 있긴 하지만 ― 아무 의미도 없었다. 막쥔 손금에 피가 맺히자 마치 손목을 가로로 그어 자해하는 것 같았다. 유우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되었다. 눈을 한 번 세게 감았다가 떴다. 민형이 보고 싶었다. 약해진 마음이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저 보고 싶었다. 


  “……제 남편이 지금 붙잡혀 있어요.”

  보고 싶은 마음이 큰 나머지 민형에 대해 말해 버렸다. 그 말을 듣고 굴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커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유이 아비가 지금 경찰서에 있다고?”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헐, 그럼 감옥 가는 거예요?”

  “빠빠, 빠빠?”

  아비라는 말을 듣자 유우 2세의 눈이 초롱초롱했다. 유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눈물이 손바닥에 떨어져 피와 섞여 번졌다. 손바닥이 쓰라렸다. 유희는 수학여행에 관한 건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았다. 선희도 눈물을 그치고 유우를 바라보았다. 남 노인은 허공을 보았다.


  “식량 사러 나갔을 때 뉴스에서 봤어요. ‘최초의 블랙 헤일 현장에서 발견된 아무개 이민형 씨 체포’라는 제목의 자막이었는데…… 민형 씨가 아무개라는 걸, 아니 지금은 제가 아무개지만, 어쨌든 어떻게 안 건지 모르겠어요. 아니, 어쨌든, 중요한 건 지금 민형 씨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는 거예요.”

  “제가 알아볼게요. 나가면 뉴스를 볼 수 있으니까요.”

  유희가 말했다. 그리고 대야를 쓴 채 누가 말릴 틈도 없이 굴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번에는 아무도 유희를 잡지 않았다. 

  “일단 기다려 보죠. 그리고 그건 저 주세요.”


  잠자코 있던 동민이 말했다. 동민의 손가락은 유우가 아직도 손에 쥐고 있던 블랙 헤일을 가리키고 있었다. 유우가 그것을 동민에게 주었다. 동민은 옆에 있던 자신의 가방에서 조각칼을 꺼냈다. 어둠 속에서도 조각칼의 날이 빛났다. 굴 안에 그렇게 위험한 물건이 있다고는 생각한 적이 없어 유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유우 2세가 만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동민은 블랙 헤일을 한 손에 잡고 다른 손으로 조각칼을 쥐었다. 조각칼이 블랙 헤일의 모서리를 툭, 툭 건드렸다.


  “조심하세요, 동민 씨. 그러다가 동민 씨도 다칠 것 같아요.”

  “유이가 항상 심심해 보여요. 내내 어둡고, 장난감 하나 없는 굴에서 생활하는 게 아이한테는 쉬운 일이 아니죠. 저도 요새 글도 안 써지는데 이거나 다듬어서 장난감 만들면 시간이 좀 빨리 갈 것 같아서요.” 

  유우의 말에 동민이 희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금방이라도 땅으로 꺼질 것처럼 힘이 없어 보이는 미소였다. 굴 안의 공기처럼 축축해 보이기도 했다. 동민은 다시 고개를 숙인 뒤 블랙 헤일을 깎기 시작했다. 뾰족한 모서리 부분에 왼손으로 조각칼을 대고 오른손으로 조각칼 손잡이를 툭툭 치면서 조금씩 뭉툭하게 만들어 나갔다. 능숙한 솜씨였다. 모서리가 점점 둥글어지는 블랙 헤일은 투명한 공처럼 보였다.


  “조각칼은 왜 가져오신 거예요?”

  “굴 밖에서도 글이 안 써지면 나무토막 같은 걸 깎곤 했어요. 집중도 잘되고 스트레스도 풀리더라구요. 조각가나 될 걸 그랬나…….”

  선희의 질문에 동민이 입가에 다시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동민의 손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남 노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걸 저렇게 함부로 깎아도 되는지 모르겠네.”

  “왜요, 할머니, 미신 같은 거 믿으시는 거예요?”

  “선희야, 믿는다고 해서 반드시 불길한 건 아니여. 안 믿기 때문에 불길한 것도 있는 법이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도 아무것도 아닌 게 간혹 우리를 배신하니까 일단 너무 마음 놓지는 말라는 거여.”

  “그래도 설마, 진짜 무슨 귀신 씐 것도 아니고 저거 하나 칼로 좀 깎았다고 뭔 일 생기겠어요?”

  “……이미, 이렇게 아무개가 된 것만으로도 일은 충분히 생긴 거 아닙니까?”


  동민의 말에 남 노인과 선희는 입을 다물었다. 동민의 손은 그동안에도 멈추지 않았다. 타각. 타각. 타각. 때에 따라서는 백색소음처럼 편안하게 들릴 수도 있는 소리가 굴 안에 번졌다. 저 소리만 듣고 있어도 금방 잠이 들 것 같았다. 유튜브 같은 데서 유행한다는 ASMR처럼 조각칼로 그런 영상을 만들면 효과가 있을 듯했다.

  유우 2세는 자신의 장난감을 만든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동민을 보며 웃었다. 유우는 웃을 수 없었다. 아이의 얼굴만 봐도 평소에는 웃음이 나왔는데 지금은 웃으려고 해도 입가만 비틀렸다. 머릿속이 온통 민형의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민형은 자신의 앞에 놓인 국밥을 보면서도 숟가락을 들 생각을 못 했다. 국밥에서 피어오르는 향이 코를 자극하기는 했다. 유우와 아이를 생각하면 한 입도 먹을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유우에게 따뜻한 국물 한 사발을, 아이에게는 밥을 만 국밥 한 숟가락을 먹이고 싶었다. 따뜻한 밥을 함께 먹을 식구가 그리웠다. 민형은 아무개 생활을 시작한 것을 후회했다. 거리에 나앉더라도 셋이 함께 다녔어야 했다. 


  곧 고개를 저었다. 거리에 있다고 해도 오래 있지는 못할 것이다. 무료 배식을 받으면 밥은 굶지 않겠지만 어린아이를 차가운 거리에서 자게 할 수는 없었다. 시설로 갈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또다시 헤어지게 되는 거나 다름없었다. 시설에서 나와 자립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번만 잘 넘기면, 유우가 조금만 더 버텨 주면 단번에 삶을 뒤엎을 수 있었다. 뭐라도 다시 시작해 볼 수 있었다. 인생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었다. 목표는 최소생존비. 최대 1억이었다.


  국밥이 빠르게 식어 갔다. 민형은 초점 없는 눈으로 국밥을 쳐다보다가 국밥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새로 살 힘을 내려면 먹어야 했다. 한 입 먹을 때마다 유우와 아이가 목구멍에 걸리겠지만 이까짓 거, 구제금만 받으면 매일 먹을 수 있었다. 국밥이 아니라 뷔페라도, 아니 고급 코스 요리라도 얼마든지 사 줄 수 있었다. 지금 유우는 차가운 통조림만 먹고 있겠지만 곧 속을 데워 줄 음식들을 먹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민형은 국밥을 한 숟가락 가득 떠서 입에 넣었다. 국물과 섞인 쌀알이 부드럽게 씹혔다.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벌써 목구멍으로 넘어가 버렸다. 오랜만에 먹는 국밥의 맛은 달콤했다. 소주 한 잔이 절로 생각날 정도였다. 민형은 어느새 유우와 아이에 관한 생각을 잊고 국밥을 정신없이 퍼먹었다. 열 번도 떠먹은 것 같지 않은데 어느새 국밥 한 그릇을 모두 비웠다. 이 기세라면 두 그릇, 아니 세 그릇이라도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민형은 입가를 훔쳤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치장 안은 굴처럼 차가웠다. 아직까지도 자신이 왜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블랙 헤일이 생긴 원인은 아무도 몰랐다. 취해서 난동을 부린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니었다. 고작 인터넷에 퍼진 말 때문에, 아무개라는 이유만으로 와 있는 거라면 억울했다. 아무개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 다시 한번 살 기회를 몰래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유우의 존재를 아직 들키지 않았기 때문에 잠재적인 범죄라고 말하기에도 뭐한, 살려고 몸부림치는 발버둥 정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유치장에 있는 것을 보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박 형사는 골똘하게 생각에 잠겨 있는 민형의 옆모습을 보았다. 그 뒤에 자신이 들고 있던 종이 한 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공문 하나가 내려와 있었다. 아무개 수색대 조직에 대한 공문이었다.

  SNS에서는 블랙 헤일이 아무개 때문에 내린다는 말이 퍼졌다. 그들이 세상에 내린 저주가 우박을 검게 물들여 검은 우박이 내리게 되었다고. 유언비어 수준이었다. 처음에 유포한 사람을 찾지도 못한 채 그 말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것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흉흉해지자 정부에서는 아무개들이 살고 있는 폐터널들을 찾아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겠다고 발표했다. 블랙 헤일의 원인이 아무개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아무개가 굴에 있는 것은 위생에도 좋지 않고 치안에도 방해가 되며 국민들의 불안감을 조성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아무개들이 사는 폐터널을 찾아 폐쇄한다는 게 요지였다. 기간은 내일부터 열흘 동안. 전국에서 뽑은 비공식적인 수색대가 폐터널들을 샅샅이 뒤지게 될 것이다. 빛 터널 등 관광 명소로 개발된 곳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런 곳들을 제외하더라도 전국에는 아직 폐터널들이 많았다. 

  폐터널들이 사라지면 블랙 헤일도 멈추게 될까? 아닐 것 같았다. 그렇게 이상한 인과관계는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공문서에 버젓이 나와 있는 문구들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했다. 활자의 마술. 요지경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박 형사는 책상에 있는 블랙 헤일을 손에 들고 표면을 문질러 보았다. 길에서 주워 온 작은 블랙 헤일이었다. 탄생석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것을 만지고 있으면 묘하게 안정감이 들었다. 담배를 피우고 싶을 때마다 박 형사는 블랙 헤일을 문지르곤 했다. 우연히 시작한 행동이었는데 금연 껌이나 사탕도 잠재우지 못한 금단 현상에 꽤 효과가 있었다. 

  “선배님, 저희도 내일부터 출동하는 거 맞습니까?”

  그때, 후배 김 형사가 박 형사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말했다. 점심때 먹은 국밥 냄새가 코에 끼쳤다. 박 형사는 눈살을 살짝 찌푸린 채 대답했다. 

  “음, 아무래도. 일단 위에서 내려온 거니까 따라야겠지.”

  “그런데 아무개들을 수색해서 뭘 하려는 걸까요? 다 가둬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가둬 놓을 곳도 없고, 가둬 놓을 이유도 없는 것 같은데. 전부 시설에 보낼 수도 없고…….”

  “그래서 나도 그게 찝찝하다는 거야. 한국말인데 여기 있는 말 중에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어, 빌어먹을.”

  박 형사가 공문을 책상에 던지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다가 곧 입을 다물었다. 민형 쪽을 보았다. 깍두기와 함께 국밥 한 그릇을 맛있게 비운 민형은 모로 누운 채 깊게 잠들어 있었다. 식곤증까지 몰려와 오랜만에 단잠에 빠진 듯했다. 누에고치 속에서 포근하게 잠든 애벌레처럼.


  박 형사는 작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 남자도 그렇고. 수색해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오히려 여론만 더 뒤숭숭해질 수도 있어. 이런 것들은 대체 어디에서 결정하는 거야?”
   “저희가 뭐 그런 것까지 일일이 알 수 있는 군번이 되나요, 공문 내려왔으니까 따르는 거지. 그래도 이상하긴 이상하네요.”

  “뭐, 일단 시키는 대로 하긴 하겠지만 너무 열심히 하지는 말자고. 시늉만 내고 적당히 보고해도 되니까.”

  “어, 다시 떨어지네요.”

  “뭐가?”
   “그거요, 악마의 공.”

  “어허, 악마를 믿는 거야? 명색이 경찰인데 이성적인 말을 쓰자고. 제대로 된 이름을 불러야지.”

  “네, 뭐. 블랙 헤일요. 그런데 인터넷에서 그렇게 부르니까 저도 모르게 입에 붙어서. 요새는 하루에 한 번씩은 떨어지는 것 같네요. 진짜 헬멧 없이는 밖에 나가기 무서운데 무거워서 헬멧 계속 쓰고 다니는 것도 힘들어요.”


  김 형사가 툴툴거리며 말했다. 김 형사의 말대로 박 형사 역시 밖에 나갈 때마다 헬멧을 챙겨 써야 하는 게 귀찮았다. 그것이 누군가가 간절히 바라는 대상일지라도. 기습적인 무기력은 극한 상황도 가리지 않았다.

  박 형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크기는 제각각이지만 색깔은 한결같이 검은색인 블랙 헤일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헬멧을 쓰지 못한 사람들이 처마 밑으로 들어가며 비명을 질렀다. 비를 긋는 것도 아니고, 우박을 긋는다고 해야 하나. 헬멧을 쓴 사람들도 블랙 헤일이 머리에 떨어지면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땅에 떨어진 블랙 헤일들은 바닥에 무더기로 쌓였다. 도시의 고분들이었다. 한 편의 지옥도였다. 바라보고 있는 사람마저 불안에 떨게 하는 체험 영상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박 형사는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아직까지 쥐고 있던 블랙 헤일의 모서리가 손바닥을 찔렀다. 아플 법도 한데 한동안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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