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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혜린 Aug 29. 2024

장편 소설 <아무는 개>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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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들 나와. 갈 데가 있으니까.”

  경찰들이 폐터널의 입구에 대고 소리쳤다. 잡초가 우거져 있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곳에 폐터널이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아무개들은 감쪽같이 숨어 있었다. 아니,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안에 모여 살고 있던 아무개들은 숨소리 하나도 내지 않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좋은 일이야. 일자리를 주려는 거라고.”

  “정부에서 지원해 주는 거다. 잡아가는 게 아니라.”

  경찰들이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그 뒤로 일 분의 시간이 지났다. 굴 안에 시계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정확히 일 분이 지나자 폐터널에서 작은 고개 하나가 튀어나왔다. 바가지머리를 한 남자아이였다. 일곱 살 정도 되어 보였다. 오랫동안 세수하지 않아 흰 얼굴이 땟국에 절어 있었다.


  경찰들은 저렇게 작은 아이가 아무개로 살고 있었다는 것에 놀랐다. 그럴수록 사명을 다해야겠다는 결심이 뚜렷해졌다. 아이를 구해야 했다. 저렇게 비위생적이고 위험한 환경에 어린아이를 오랫동안 두면 안 되었다. 피로에 지쳐 매뉴얼대로만 대충 끝내려고 했던 경찰들의 눈빛이 또렷해졌다.

  남자아이는 고개를 내밀고 경찰들을 응시했다. 곧 겁을 먹었는지 다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경찰들이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폐터널에서 한 여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경찰들을 본 여자의 눈은 남자아이처럼 두려움에 물들었다. 여자는 곧바로 폐터널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반대로 상반신을 좀 더 내밀며 물었다. 


  “……진짜 일자리를 주는 건가요?”

  미심쩍어하는 말투였다. 

  “그렇다니까.”

  “지금 그 말을 믿어? 살려면 이렇게 꼭꼭 숨어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함부로 얼굴을 내밀면 안 돼!”

  폐터널 안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의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더 이상은 못 참겠어요. 이건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니에요. 사람답게 살려고 이렇게 참고 있는 건데 더 이상은 아닌 것 같아요. 저는 그냥 경찰들을 따라가야겠어요.”

  “설마 저들을 믿는 거야? 믿을 사람을 믿어야지!”

  “자격도 안 되는데 아무나 지원해 주겠냐고. 더 버텨야 하는데. 갑자기 우리 같은 사람들을 지원해 준다는 것도 이상…….”


  “조심해!”

  경찰 한 명이 소리쳤다. 블랙 헤일이 떨어지고 있었다. 경찰들은 헬멧을 쓰고 있었는데도 당황했다. 블랙 헤일은 아무리 맞아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퉁, 퉁, 퉁. 블랙 헤일이 헬멧에 떨어진 뒤 튕겨 나갔다. 튕겨 나간 블랙 헤일에 맞은 경찰이 소리를 질렀다. 

  “굴, 굴 안으로 들어가!”

  지금 이 주변에서 지붕이 있는 것이라고는 폐터널밖에 없었다. 열 명도 더 넘는 경찰들이 폐터널로 몰려가자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블랙 헤일을 피하기 위해서라고는 했지만 습격이나 다름없었다. 입구 쪽에 있던 남자아이와 여자는 폐터널 안쪽으로 달려갔다. 더 깊은 안쪽에서 남자가 큰 소리로 욕했다. 그 욕도 터널 안에 울려 세 겹의 메아리로 굴 밖에 뻗어 갔다. 그 욕을 배경음악처럼 깔고 경찰들도 조금씩 안으로 들어갔다. 


  “셋뿐인가?”

  맨 앞에서 지휘하던 경찰이 물었다. 아무개들에게 묻는 건지, 다른 경찰들에게 묻는 건지 애매한 말투였다. 다른 경찰들은 다섯 명씩 두 줄로 선 뒤 양쪽에서 아무개들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등 뒤로 블랙 헤일이 떨어지고 있는 모습이 풍경으로 겹쳐 보였다. 검은 그림자들과 검은 우박은 낮도 밤처럼 보이게 했다. 


  “으윽!”

  갑자기 앞쪽에 있던 경찰 두 명이 얼굴을 감싸며 쓰러졌다. 그 뒤에 있던 경찰 두 명도 연이어 엎어졌다. 그들의 얼굴을 맞힌 블랙 헤일이 바닥을 굴렀다. 끝이 뾰족해서 블랙 헤일을 맞은 경찰들의 얼굴에서는 금방 피가 뚝뚝 떨어졌다. 

  경찰들은 곧 양손에 블랙 헤일들을 가득 들고 있는 아무개들과 마주쳤다. 숫자는 많지 않았다. 파악했던 대로 남자아이 한 명에 여자 하나, 남자 하나, 그 외에 여자 두 명이 더 있을 뿐이었다. 행주치마에 돌을 가득 담아 적군을 물리쳤다는 이들처럼 여자들은 보자기에 블랙 헤일을 가득 담은 채 경찰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진짜 잡으러 온 거 아니라니까?”
   이번에는 맨 뒤에 있던 지휘 경찰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여기에 뭐 하러 왔든 상관없어요. 중요한 건 이곳을 들켰다는 거니까.”

  아까 전에 날카로운 어투로 말했던 남자가 이번에는 무뚝뚝한 말투로 말했다. 

  “설마, 우리를 이상한 곳으로 끌고 가려는 건 아니죠?”
   “진짜 아니라니까. 나라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게 될 거야. 그리고 여기에서 더 튀게 행동했다가는 공무 집행 방해죄로 엉뚱하게 진짜 잡혀갈 수도 있어. 일단 그거 내려놓고. 그게 아무리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해도 자칫하면 살인 무기 될 수 있다는 거 몰라?”

  “확실하게 말해 주시오.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그건 우리도 잘 몰라.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이 폐터널이 정말로 폐쇄된다는 거지. 다 나가자마자 블랙 헤일들과 시멘트로 다 막아 버릴 거야. 여기에 생매장당하고 싶지 않으면 지금 당장 나가는 게 좋을 거야.”

  “…….”

  “왜 여기에서 아무개로 사는지 알고 있어. 몇 년만 더 참고 거액의 구제금 받아서 인간답게 살려고 생각한 거겠지. 그 인내심은 칭찬해. 그런데, 이제 이렇게 발각된 이상 불가능해졌어. 게다가 성공하면 사기꾼 되는 거라고. 그러니 이제부터는 그 인내심으로 한번 착실하게 살아 봐. 요행 바라지 말고, 인생 파산하지 말고 차근차근 돈 모아. 우리들처럼.”


  생매장이라는 말에 여자들은 보자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블랙 헤일들이 거친 바닥을 구르면서 난폭한 파열음을 냈다. 주먹을 쥔 채 떨었던 남자는 고개를 숙였다. 남자아이는 불안한 눈빛으로 눈을 굴리면서도 경찰들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나가겠습니다.”

  남자의 말에 다른 아무개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쓰러져 있던 경찰들도 어느새 일어나서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 

  “경찰 폭행죄는 넘어가 줄 테니 얌전히 따라와.”


  블랙 헤일을 맞지 않았던 다른 경찰들이 아무개들에게 헬멧을 하나씩 씌워 주었다. 블랙 헤일이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오 분 이내로 내렸는데 이제는 한번 내리기 시작하면 적어도 십 분 이상 내렸다. 한두 시간 이상 내릴 때도 있었고, 하루에 몇 번씩 내릴 때도 있었다. 양도 처음보다 많아졌다. 폐터널 안에서 대치 아닌 대치를 하는 동안에도 밖에서는 바닥에 블랙 헤일들이 쌓여 갔다. 블랙 헤일들이 쌓여 있는 모습은 무덤처럼 보였다.


  헬멧을 쓴 아무개들이 한 줄로 나갔다. 남자아이는 헬멧이 큰지 자꾸만 눈앞을 가리는 헬멧 유리를 올리려고 애를 썼다. 올리자마자 내려가는 헬멧 유리 때문에 시야가 깜빡깜빡했다. 굴 밖으로 나가자 아무개들은 눈이 부셔 눈을 찡그렸다. 블랙 헤일이 내리고 있어서 하늘을 제대로 쳐다보지는 못했다. 굴 밖을 나왔지만 여전히 쳐다볼 수 있는 건 바닥뿐이었다. 


  바깥에는 몇 대씩 늘어서 있던 경찰차 외에도 대형 트럭 한 대가 서 있었다. 아무개들은 트럭 뒤에 태워졌다. 좋은 차를 타고 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막상 트럭 뒤에 타게 되자 아무개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일자리를 준다고 하면서 이상한 곳으로 가게 되는 건 아닐지 두려웠다.


  “어, 성공. 아무개들 다 밖으로 나왔어. 불러서 막아.”

  지휘했던 경찰이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막는다는 말도 무섭게 들렸다. 곧 차출된 군인들이 폐터널로 와서, 온 동네에서 긁어모아 자루에 넣어 두었던 블랙 헤일들을 폐터널에 퍼부을 것이다. 그 뒤에 그 틈을 시멘트로 메울 것이다. 폐쇄된 폐터널은 더 이상 아무개들의 거주지가 될 수 없다. 블랙 헤일의 무덤일 뿐이었다.


  아무개들을 태운 트럭과 경찰차들은 가야 할 한 방향으로 향했다.   



  유희는 죠스바를 한입 가득 물었다. 입안에 있는 아이스크림 덩어리를 최대한 천천히 침으로 녹였다. 입술이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더 진하게 물들수록 좋았다. 그런다고 아파 보이지는 않겠지만 그 입술로 나는 지금 정상이 아니라고, 너희들의 장난을 받아 줄 때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우리 언니가 아무개야. 굴에 살고 있어.


  유희는 아무 생각 없이 이 말을 친구들에게 했던 걸 후회했다. 중학교 2학년, 사춘기는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는 나이였다. 아무개라는 말이 주는 부드러운 굴림이 그 안에 드리운 검은 장막을 보지 못하게 했다. 아무개라는 말에 호기심을 보인 친구들의 반응이 더 재미있었다.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했던 관심이었다. 그 관심이 악의 어린 장난으로 변하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교실로 들어가는 게 무서웠다. 점심시간이 이미 끝나 가고 있었다. 급식을 먹는 건 진작 포기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면서 같은 식판에 같은 밥을 먹을 자신이 없었다. 배탈이 날지도 모르지만 죠스바만 연달아 세 개를 먹었다. 당연히 배는 부르지 않았다. 속이 시려서 마음도 함께 추운 것 같았다. 가슴속도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교실로 돌아가는 걸음이 묵직했다. 수학여행까지 못 가는 바람에 아이들과의 사이를 만회할 기회가 영영 막혀 버렸다. 자신의 이야기를 할 기회도 놓쳐 버렸다. 아니, 처음부터 기회는 없었을지도 몰랐다.


  드르륵.

  교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모두 뒤를 돌아보았다. 점심시간은 아직 오 분 정도 남아 있었다.


  “야, 아무개. 너네 때문에 그 거지 같은 우박 덩어리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라며? 수학여행 갈 돈도 없어서 수학여행도 못 간 거냐? 거지냐?”
   “지구 멸망하면 책임질 거야?”

  “아, 시발. 난 지금 죽기 싫은데.”

  “굴에나 처박혀 있을 것이지 학교엔 왜 기어 나왔어?”

  “야, 아무개는 우리처럼 밥 안 먹는다며? 통조림만 먹는다며?”

  “간편하네. 이런 거 먹나?”


  한 아이가 옥수수 통조림을 손에 들고 흔들었다. 유희가 사 가면 선희가 앉은 자리에서 곧잘 숟가락으로 퍼먹곤 했던 옥수수 통조림이었다. 옥수수의 달짝지근한 맛이 모든 걱정을 잊게 해 준다면서 밥처럼 퍼먹었다. 그걸 본 유희는 다시는 옥수수 통조림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아무리 아무개라고 해도 품위를 지키는 건 중요했다. 옥수수 통조림이나마 숟가락으로 우아하게 떠먹어야 나중에 삶을 회복하게 되면 떳떳할 것 같았다. 품위는 물질이 아니라 태도에서 나오는 거라 믿었다. 선희도 끝까지 품위 있는 태도를 지키길 바랐다.

  그러니 자신도 지금, 이 상황에서 끝까지 품위를 지켜야 했다. 


  딱.

  통조림을 따는 소리가 들리자 유희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눈앞을 잊어버리기 위해 딴생각하는 게 습관이 되고 있었다. 입술이 더더욱 진한 보랏빛으로 물들 것 같았다. 눈앞도 보랏빛으로 물든 것 같았다. 아이들의 웃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유령처럼, 점점 커지고 있는 검은 입만 보였다. 그 검은 입이 자신을 금장이라도 삼킬 것 같았다.


  통조림을 딴 아이는 카드 패를 뒤집듯 옥수수 통조림을 뒤집었다. 통조림의 내용물이, 옥수수 알갱이와 끈적이는 국물이 교실 바닥에 쏟아졌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 같았다. 아니, 우박이라고 해야 하나. 자잘하면서도 크기기 일정한 노란 우박들이 사방에 흩어졌다.


  “먹어. 식량 배급받아야지. 점심도 안 먹었잖아? 입술도 파랗네. 불쌍해라.”

  옥수수 알갱이들은 끈적이는 국물에 푹 젖어 있었다. 국물 위에 떠다니는 먼지가 보였다. 먼지는 교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빛났다. 평소에는 있는지도 몰랐는데 햇빛이 들어오니 비로소 보였다. 유희는 다시 눈을 감았다. 


  “야, 눈 뜨라고.”

  “눈 뜨고 저거 먹으라고!”

  “왜, 손으로는 못 먹겠어? 숟가락이라도 줘? 너한테는 숟가락도 아까워.”

  “손으로 집어 먹든, 혀로 핥아먹든 빨리 바닥 청소해. 더러운 아무개야.”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것도 싫다. 더러운 숨이 섞여 버렸어.”

  “기분 나빠. 끈적여.”

  “옥수수 통조림 국물 같네.”


  유희는 눈을 뜨지 않았다. 목소리들의 주인을 구별하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무뎌지기로 했다. 귀를 끝까지 열지 않았다. 감정을 가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차라리 먼지가 되고 싶었다. 그제야 아무개라는 단어에서 ‘개’가 돋을새김되었다. 개는 숟가락을 쓰지 않는다는 것도 자각했다. 그렇다고 해도 숟가락을 안 쓸 수는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잘살지 못한다면 언니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렇게 중요한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난 아무개가 아니야!”


  유희가 눈을 뜨고 소리를 질렀다. 자신은 아무개가 아니었다. 언니 선희가 아무개였다. 문득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는 굴속에 있고, 자신은 굴 밖에 있을 뿐이었다. 


  점심시간이 끝나는 것을 알리는 종이 쳤다. 유희는 바닥에 흩어져 있는 옥수수들을 밟았다. 교실을 박차고 나가려고 했다. 누군가가 유희의 머리채를 잡았다. 다른 누군가는 유희의 팔을 끌어당겼다. 유희의 얼굴이 바닥에 처박혔다. 입을 다물기 위해 턱에 힘을 주었다. 또 다른 누군가가 유희의 등을 팔꿈치로 찍어 누르는 바람에 입이 벌어졌다. 벌어진 입으로 옥수수 알갱이가 들어왔다. 침이 흘렀다. 눈물이 고였다. 말을 하려고 했다. 말이 튀어나오는 대신 입속으로 옥수수 알갱이가 밀려 들어왔다.


  선생님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불이 켜지자 도망가는 바퀴벌레처럼 아이들이 흩어져서 자신의 자리에 정확하게 앉았다. 유희는 마지막에 자리에 앉는 세 아이의 뒷모습을 보았다. 통조림을 땄던 아이, 자신의 머리채를 잡았던 아이, 자신을 팔꿈치로 찍어 눌렀던 아이. 세 아이가 눈에 들어와 버렸다. 얼굴을 각인해 버렸다. 어느새 자리에 앉지 않은 사람은 유희뿐이었다. 


  “이유희, 뒤에서 뭐 하고 있는 거니?”

  유희는 영어 선생이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었다. 아이들이 앉는 자세 하나도 흐트러지는 것을 싫어하는 깐깐한 선생이었다. 고개를 들고 싶지 않았다. 입을 벌렸다. 입에서 옥수수 알갱이들이 침과 함께 떨어졌다. 침과 국물이 섞인 걸쭉한 액체에 떠 있는 먼지가 보였다. 지금 이걸 뭘 하고 있다고 표현해야 할지 유희는 알지 못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요.”


  유희는 무릎을 짚으며 일어났다. 무릎과 종아리와 교복 치마에도 옥수수 알갱이들과 국물이 잔뜩 묻어 있었다. 유희는 웃었다. 그러면서 새로 알게 된 감정에 대해 떠올렸다. 태어나서 처음 생각해 보는 어려운 단어였다. 원한. ‘원한다’와 ‘원한’의 거리를 생각해 보았다. 멀지 않을 것 같았다. 원한을 원한다. 원하니까 원한을 가진다. 원한을 가지니 여기에서 나가길 원한다.


  유희는 교실 뒷문을 열고 나갔다. 가시적인 반항을 눈앞에서 목격한 영어 선생이 새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아이들이 튀는 목소리로 웃었다. 웃는 아이들을 향해 영어 선생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유희는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누군가가 쫓아올 것 같았다.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모습도 모든 이들에게 발각될 것 같았다. 뒤꽁무니가 따가웠다.


  이제 운동장을 밟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블랙 헤일이 떨어진 뒤로 체육 시간에는 실내 체육관에서만 활동했다. 지금 블랙 헤일이 떨어져도 상관없었다. 다시는 학교에 오지 않을 것이다. 굴에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유우 2세가 보고 싶었다. 그 아이의 맑은 눈망울을 보고 있으면 뭐라도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가 유희는 자신에게 주어진 숙제를 생각해 냈다. 남 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 노인은 배급자인 아들 기성이 며칠째 연락이 없어 불안해하고 있었다. 자신을 싫어하는 남 노인의 부탁을 들어주기 싫었지만 선희에게 갈 때마다 자신을 귀찮게 할 것 같았다. 까짓거, 부탁 한번 들어주기로 했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기성이 남 노인의 생일 때마다 철가방 안에 짬뽕과 탕수육을 가지고 굴에 와서 함께 먹었던 기억 때문에 들어주는 것이기도 했다. 덩어리가 큼직하고 쫄깃하고 달콤한 탕수육과 오징어가 아낌없이 들어가 얼큰한 짬뽕 국물을 생각하자 침이 고였다. 지금 가면 뭐라도 얻어먹을 수 있을지 몰랐다. 아이스크림만 몇 개씩 욱여넣은 배 속이 헛헛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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