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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혜린 Sep 03. 2024

장편 소설 <아무는 개>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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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햇빛에 눈이 부셨다. 민형은 눈이 부시다는 걸 오랜만에 느껴 보았다. 문득 유우는 햇볕을 제대로 쬐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눈이 시렸다. 아이를 낳은 뒤에는 뼈가 약해졌을 테고, 약해진 뼈에 필요한 비타민 D를 위해서는 햇볕 마사지를 해야 할 텐데 자신이 유우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을 빼앗고 있는 것 같았다. 면역력도 낮아졌을 터였다. 눈을 감았다. 이마와 얼굴에 닿는 햇볕이 따스했다.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조금이라도 만족스러워하지 않으려고 했다. 여기에서 멈추면 안 되었다. 얼른 여기를 빠져나가서 유우와 아이를 만나러 가야 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민형의 손은 끊임없이 특수 프레임을 신문지 곤죽에 넣어 헬멧을 계속 찍어 내고 있었다. 


  “이거 좀 마시고 하슈.”

  민형의 눈앞에 종이컵을 든 손이 보였다. 민형의 옆에서 함께 헬멧을 찍어 내고 있던 기원이었다. 민형이 눈을 감고 있는 것을 피곤해서 그런 거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민형은 종이컵에 담긴 믹스 커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민형의 입맛을 어떻게 알았는지 종이컵의 3분의 2 정도로 물을 부어 연한 갈색을 띤 커피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장마철에 불어난 흙탕물 같았다. 그 흙탕물에 떠밀려 오는 유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없는 건지, 물속에 잠겨서 안 보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본 적이 없는 아이는 상상이 잘되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눈에 약간 물이 고였다. 


  민형은 기원에게서 종이컵을 받았다. 커피에서는 아직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물었다. 이곳에서 가장 인심이 후한 게 믹스 커피와 물이었다. 체육관에 설치된 정수기에서는 깨끗한 물을 24시간 내내 마실 수 있었고, 그 옆에 종이컵과 믹스 커피를 두어 언제든 마실 수 있게 했다. 커피와 설탕과 프림이 섞여 다디단 믹스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믹스 커피에 중독된 아무개들은 어느새 이곳을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잊어버렸다. 하루에 석 잔 이상, 많게는 다섯 잔 이상 마시는 이들도 있었다.


  “뭐,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때 되면 밥 주고, 아무 때나 물이랑 커피 마시고. 담배만 있으면 딱 좋을 것 같은데 말이야…….”

  “계속 여기에서만 갇혀 있어야 하는데 좋다구요?”

  “뭐, 설마 여기에서 평생 있겠어? 저 빌어먹을 놈의 검은 덩어리만 멈추면 우리도 나갈 수 있겠지. 저것 때문에 이런 괴상한 헬멧을 만들고 있으니 말야.”


  기원이 체육관 입구 쪽에 쌓인 헬멧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색소를 넣어 검은색이 된 헬멧이 쌓인 모습은 돌무덤 같았다. 검은 머리들만 모여 있는 괴기스러운 모습의 무덤이었다. 첫 월급 대신 처음 만든 헬멧들을 하나씩 받았지만 실내에만 있으니 쓸 일이 없어 다들 체육관에 가져오지도 않았다. 


  “동굴보다는 낫지만 답답하긴 해요. 여기에서 나갈 수 있는 걸까요?”

  헬멧에 노끈을 묶고 있던 여자가 물었다. 민형은 말없이 남은 커피를 단번에 들이켰다. 달짝지근한 뒷맛이 입안에 맴돌았다. 커피의 마지막 맛과 닮은 끈적한 단어가 떠올랐다. 탈출. 민형은 백만 번도 더 넘게 속으로 되뇌었던 단어를 또 한 번 마음속으로 지껄였다. 커피의 단맛에 빠져 이 단어를 잊으면 안 되었다. 이대로 마비될 수는 없었다. 여기에서 멈춰 있을 수는 없었다.


  체육관 안에는 아무개들을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대신 사방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다. 사람이 굳이 지킬 필요가 없을지도 몰랐다. 화장실과 교실, 식당과 복도에도 CCTV가 설치되어 있었다. 식사 시간에는 군대에서 차출된 취사병들이 밥을 가지고 왔다. 바깥으로 나가는 문과 창문은 모두 잠겨 있었다. 창문이나 문을 부수고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운동장을 빠져나가는 것부터가 어려웠다. 군인들이 운동장을 계속 지키고 있었고 경찰들도 당번을 정해 불침번을 섰다.


  “아니, 우리가 무슨 중죄인들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감시할 필요가 있나?”

  기원이 바깥을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우리가 나간다는 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이곳에 관해 이야기하는 게 문제가 되는 거겠죠.”

  신문지 곤죽을 젓고 있던 남자가 말했다. 그 말을 하면서도 그의 표정은 무척 평화로워 보였다. 젓고 있는 게 곤죽이 아니라 점심때 먹을 수프라도 되는 것 같았다.


  “여기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굴에 외로이 있는 것보다는 낫겠죠.”

  민형도 짐짓 속마음을 숨기고 말했다. 수상해 보이는 말을 굳이 할 필요는 없었다. 옆에서 검은색 색소를 넣고 있던 아이가 길게 하품했다. 그 옆에서 첨가물을 넣고 있던 노인도 따라서 하품했다. 하나로 틀어 올린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한 뭉텅이나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그 뒤로 헬멧을 스무 개쯤 더 만들었을 때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일렬로 섰다. 아무도 앞다투어 나가지 않았다. 민형도 느긋하게 뒷줄에 가서 섰다. 맛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배를 든든하게 채워 줄 식사가 기대되었다. 인생에서 기대감이라는 감정을 지닌 게 얼마 만인지. 금방 조리한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유우와 아이와 함께 나란히 둘러앉아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그들이 이곳에 들어오는 건 바라지 않았다. 수색대들이 유우의 굴에 쳐들어가기 전에 자신이 먼저 이곳을 나가서 유우와 아이를 구해야 했다. 


  “오늘이 며칠이나 되었을까요?”

  노끈을 묶었던 여자가 물었다. 그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이 며칠인지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민형도 날짜를 세려다가 금방 잊어버렸다. 그날이 그날 같았다. 시간이 간다는 게 초조해질 뿐이었다. 매일 관심을 두는 것은 날짜가 아니라 식단이었다. 오늘은 감자조림과 김칫국, 시금치나물, 돈가스가 나왔다. 모두 민형이 좋아하는 반찬들이었다.


  “단순하게 생각해. 주는 밥 먹고, 할 일 하고 그냥 마음 편히 있다 가자고.”

  “어쩌면…… 너무 힘들지 않게 하는 게 계략일지도 모르겠어요. 차라리 끝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여자의 말에 민형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힘들어도 무기력해지지만, 적당히 힘들어도 생각이 없어진다. 견디는 게 아니라 그냥 사는 거다. 그냥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민형은 초심을 생각했다. 그냥 살기 위해 아무개가 된 건 아니었다. 한 번쯤 제대로 살아 보고 싶어 그런 선택을 한 거였다.    



  

  늦은 밤이 되었는데도 박 형사는 퇴근하지 못했다. 아니, 퇴근하지 않았다. 저녁에 걸려 온 이상한 전화 때문에 퇴근할 수 없었다. 모두 저녁을 먹으러 나간 시간, 홀로 경찰서를 지키고 있던 박 형사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02로 시작되는 번호였다. 박 형사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공중전화 번호라는 것을 눈치챘다. 거리에서 공중전화를 찾는 게 불가능에 가까워진 시대였다. 


  전화를 건 사람은 대뜸 물었다. 

  “……제보 하나 하려고 하는데 가능합니까?” 

  장난 전화인가 싶었지만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발신자의 목소리에 물기가 돋아 있었다. 차분해 보이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네, 물론입니다. 어떤 제보입니까?”

  “경찰서에서 아무개 굴을 수색한다고 들었습니다. 지금도 수색 중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전국적으로 아무개의 수를 파악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곳에 아무개들의 굴이 있습니다.”


  박 형사는 전화기를 세게 쥐었다. 근처는 충분히 둘러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구멍이 있었다. 제보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시간을 단축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비워진 구멍도 메워 주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어디에 있습니까?”

  박 형사의 질문에 제보자는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굴의 위치를 이야기해 주었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었다. 

  “총 몇 명이 살고 있는지도 알고 있습니까?”

  제보자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젊은 여자 두 명, 아기 한 명, 노인 한 명입니다.”

  그 말만 남긴 채 전화는 매정하게 끊겼다. 수색대가 된 경찰서를 제보자가 어떻게 찾았는지 그제야 의문이 들었지만 물어볼 길은 없었다.


  박 형사는 굴의 위치와 거주자를 메모해 놓은 메모지를 들여다보았다. 젊은 여자, 아기, 노인. 흔히 말하는 노약자들만 모여 있었다. 이렇게 노약자들만 모여 있다면 아무개 생활의 수혜자는 누구란 말인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굴을 수색해 이들을 데려간다고 해서 헬멧을 제대로 만들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래도 그곳에 가야 했다. 그것이 박 형사가 해야 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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