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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혜린 Sep 03. 2024

장편 소설 <아무는 개>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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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희는 중국집 근처에 있는 대학병원에 들어갔다. 청소부가 알려 준 대로 가니 십 분 만에 병원을 찾을 수 있었다. 일단 1층에 있는 안내 데스크로 갔다. 

  “한기성 씨 병문안 왔는데 어디로 가면 돼요?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하던데……”

  “가족분이신가요?”
   “네, 급하게 오느라 병원 이름만 들어 호수를 몰라서요.”


  유희는 최대한 어두워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불쌍한 기성 아저씨. 억지로 생각했다. 거울을 보지 않았는데도 표정이 더 잘 나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7층으로 가시면 돼요. 701호.”

  유희의 표정이 그럴듯해 보였는지 안내 데스크에서는 기성의 병실을 알려 주었다. 유희는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7층이 다가올수록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많이 다쳤으면 어떡하지? 남 할머니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엘리베이터 안에는 유희밖에 없었다. 7층에서 내린 유희는 701호를 찾아갔다. 701호는 복도 맨 끝에 있었다. 이름표에 한기성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흔한 이름은 아니었으니 남 노인의 아들이 맞는 것 같았다.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육인실로 된 병실은 꽉 차 있었다. 입구 쪽에 있는 두 개의 침실과 가운데에 있는 침대에 남자 환자들이 누워 있었다. 모두 기성은 아니었다. 간병인이나 보호자는 병실에 아무도 없었다. 맨 끝에 있는 침대 두 개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다. 유희는 병실 바깥으로 가서 이름표를 확인했다. 오른쪽 맨 끝 침대가 기성의 자리였다. 


  유희는 다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망설이지 않고 오른쪽 맨 끝 침대로 갔다. 커튼을 젖혔다. 드르륵. 조용했던 병실에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커튼을 젖히자 드러난 것은 놀라서 크게 떠진 기성의 눈이었다. 원래도 눈이 컸는데 놀란 표정을 지으니 얼굴에서 눈밖에 보이지 않았다. 


  기성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떨어뜨렸다. 유희는 바닥에 떨어진 것에 눈길을 주었다. 손바닥 크기의 검은색 수첩. 여권이었다. 해외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늘어나 쉽게 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인생에 끼어들 틈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아무개에게 그랬고, 배급자인 아무개 가족에게는 더욱 그랬다. 그런데 기성이 여권을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 가요?”

  유희가 곧바로 물었다. 원래는 어디 아프냐고 물어보려고 했다. 기성은 겉보기에는 아픈 구석이 없는 것 같았다. 교통사고라는 게 꼭 외상만 있는 건 아니니까. 외상이라는 말은 의학 드라마에서 우연히 보고 인상 깊어서 기억해 둔 말이었다. 유희는 이것이 꽤 어른스러운 말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기성의 눈이 유희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양옆을 돌아다녔다. 불안정해 보이는 모습을 보니 어디를 가긴 가는 것 같았다.

  “아니, 내, 내가 가길 어딜 간다고 그래? 어머니 냅두고…….”

  “그러니까요. 철가방에 탕수육과 짜장면 갖고 오는 효자 아들이 설마 어머니를 내버려 두고 혼자 어디 가지는 않겠죠.”

  “마, 맞아…… 이건 나중을 위해 미리 만들어 놓은 거야. 나중에, 잘살게 되면…… 그때 어디든 가려고…….”

  “네, 남 할머니는 그때 세상에 없겠지만요.”

  “그래, 어머니는 그때…… 아니, 그게 아니라.”

  “저까지 속이실 필요는 없어요. 전 남 할머니하고 별로 안 친하거든요. 아저씨한테 짜장면이랑 탕수육 얻어먹은 게 생각나서 부탁 한 번만 들어주려고 온 거예요. 남 할머니가 아저씨 소식을 궁금해해서요.”


  기성은 바닥에 떨어진 여권을 주웠다. 주운 여권을 베개 밑에 넣었다. 그 뒤에 냉장고를 열어 오렌지 주스 한 병을 꺼내 주었다. 유희는 주스를 받자마자 뚜껑을 따서 마셨다. 단맛과 신맛이 익숙하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마시고 난 뒤에도 이에 끈적하게 붙는 맛이었다. 


  “교통사고 났다면서요? 어디 다친 거예요?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데.”

  유희는 기성을 바라보지 않고 주스 병을 쳐다본 채 말했다. 속으로는 오렌지 주스를 열심히 품평했다. 

  ‘오렌지 외에 다른 것도 섞인 게 틀림없어. 오렌지 맛이 아니라 오렌지 시럽 맛이 나잖아.’


  “갈비뼈 부러지고…… 허리도 좀 아프고. 머리도 아파서 이것저것 검사받고 있어. 자세한 건…… 결과 나와 봐야 알겠지만.”

  “흠…….”

  “어머니한테는 그냥…… 일이 너무 바빠서 그런 거라고만 전해 줘. 퇴원하면 곧바로 찾아뵐 거야.”

  “흠…….”

  “정말이라니까? 나이도 어린 게…… 의심도 많다.”

  “그렇게 안 어리거든요?”

  “몇 살인데?”

  “열다섯 살이에요.”

  “난 너보다…… 나이 두 배는 더 넘게 먹었는데.”

  “으악! 그럼 서른 살 넘었어요? 진짜 아저씨였네.”

  “너도 그 나이 금방이야. 지금은 멀어 보이겠지만……. 그런데, 진짜 어머니한테 비밀…… 지켜 줄 거지?”

  “네, 네. 그래야죠. 역시 효자로 소문난 사람은 다르네요.”

  “그 말…… 비꼬는 거 아니지?”
   “그럼요. 여권도 모른 척해 드릴게요. 대신…….”


  유희는 남은 주스를 단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기성이 유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유희는 주스를 다 마신 뒤에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주스가 달라붙은 것인지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기성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허리를 다친 사람치고는 꽤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 모습도 유희는 모른 척했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기성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자신에게 유리했다.


  “……대신?”

  기성이 다시 유희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아무리 봐도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차라리 몸보다 마음이 아프다고 하면 믿을 정도로 표정이 공허해 보였다. 공허. 반 아이들 때문에 옥수수 통조림을 억지로 먹었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저한테 방법 하나만 알려 주세요. 저보다 인생을 두 배 이상 살았고, 또…… 그냥 인생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서요.”

  “어떤 방법?”

  유희는 침을 한 번 삼켰다. 방금 전에 들이켠 오렌지 주스의 새콤달콤한 맛이 혀를 감쌌다. 유희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말했다. 


  “……저주하는 사람에게 복수하는 방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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