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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혜린 Sep 24. 2024

기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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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보니스입니다.


보니스의 얼굴이 노트북 화면에 나왔다. 축 처진 눈꼬리에 둥글둥글한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팔 년 전 그대로였다. 푸른색 셔츠를 입고 붉은 넥타이를 맸으며 물결 모양의 넥타이핀을 달았다. 그때는 검은색 바탕에 은색 구름 문양이 새겨진 넥타이핀을 달고 있었다는 것만 달랐다. 친절하지만 사무적인 인사만으로도 보니스가 잠들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면 기억하고 싶지 않거나.


진짜 김본 선배네.

여름잠이 중얼거렸다. 

닮은 사람 아닐까?

겨울잠의 말에 봄잠이 고개를 저었다.

선배 별명 기억 안 나? 보나 마나 뻔하지. 자기가 스스로 말했잖아. 어렸을 때부터 친구들이 본아, 본아 하고 부르면서 꼭 끝에 보나 마나 뻔하지, 라고 붙였다고. 김본 선배 맞아. 저 그린 듯한 미소를 봐.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리허설 안 하시나요?

아, 해야죠. 저희가 이런 영상 발표는 처음이라 긴장되기도 하고 리허설이지만 실전 같기도 해서요.

저도 그래요. 그래도 연구소에서 키우는 책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고무적이네요.

예, 저희 연구소가 환경이 좋지 않은데 그게 더 리얼리티가 살 것 같아서 일부러 물건을 고치거나 새로 사지는 않았어요. 지나치게 쾌적한 환경은 너무 인위적이잖아요. 그래서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숲을 키우다 보니 성실하게는 하게 되는데 뭐랄까…… 너무 정신없이 사는 것 같아서 스트레스를 풀 시간이 없기도 하구요. 긍정적으로 살려고 하는데 잘 안 돼요. 아무래도 자괴감이 많이 들죠. 그래도 이게 올해 사업의 마지막 실적이니까 최선을 다해 보려고 해요. 저희에게도 ‘마음의 재난 대응 매뉴얼 및 행동 지침’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러려면 아무래도 김본 선, 아니 보니스 교수님께서…….


그럼요. 역시 다르네요. 믿음직스러워요. 자료집은 미리 보셨죠? 제가 발표 중간에, 그러니까 본문 목차 1번 끝나고 제가 ‘마음을 챙기지 못하는 마음 재난의 실제 상황을 보여 주는 사례를 실시간으로 보시겠습니다.’라고 하면 그때 숲을 보여 주시면 돼요. 멀리서 한 번 보여 주시고, 점점 클로즈업해서 가까이 있는 모습으로요. 연구원분들은 그때는 약간 멀리 떨어져 계시면서 화면에 나오지 않게 해 주세요.


겨울잠이 한 땀 한 땀 힘겹게 말하던 중에 보니스가 말을 끊었다. 보니스의 얼굴에서 미소가 약간 사라졌다. 입이 일자가 되었다. 겨울잠의 얼굴이 붉어졌다. 겨울잠이 뒷걸음질을 쳐서 서서히 영상 바깥으로 나갔다. 대신 봄잠이 얼굴을 앞으로 내밀고 이어서 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런데 지금 바로 숲을 보여 드려 버리면 내일 별로 임팩트가 없을 것 같아요. 교수님도 실시간으로 보셔야죠. 이런 건 현장성이 중요하잖아요.

음…… 그건 그래요. 그래도 한 번이라도 미리 보면 좋을 것 같긴 한데.


내일은 또 상태가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요. 이 사업이 저희 연구소 대표 사업이라 연구원 네 명이 돌아가면서 실시간으로 상태를 모니터링하고 있어요. 요새 ‘돌봄’이라는 말이 들어간 사업이 트렌드거든요. 상위 부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구요. 연구자에게 가장 접근성이 높은 책의 상태를 통해 연구자의 마음 상태를 역추적하는 거죠. 지금은 일단 수기로 일지를 쓰고 한글 파일에 옮기는 정도지만 곧 유튜브 채널과 SNS로도 숲의 상태를 말할 생각이에요. 일단 리허설 때는 숲의 실제 모습 대신 일지만 추려서 보여 드릴게요. 사실, 지금은 숲을 보호할 필요도 있구요.

……그 정도로 상태가 안 좋은가요?

교수님도 아시잖아요, 척박할 수밖에 없다는 거.


봄잠이 애써 웃으면서 일지를 보여 주었다. 일지를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다. 그사이에 여름잠이 이름을 출력한 종이를 플라스틱 명패에 끼워 셋 앞에 하나씩 놓았다. 선, 율, 미철의 이름을 보고도 보니스의 표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다음 순간 보니스의 얼굴에 지진이 일어났다. 시선은 봄잠이 들고 있는 일지에 꽂혀 있었다. 가을잠이 쓴 부분이었다. 가을잠은 같은 말을 반복해서 썼다. 낡아가고 있다. 늙어가고 있다. 낡아가고 있다. 늙어가고 있다. 낡아가고 있다. 김본. 늙어가고 있다. 이제연. 낡아가고 있다. 늙어가고 있다. 김본. 이제연.

……제연이는 지금 어디 있죠?


보니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화면이 갑자기 꺼졌다. 겨울잠이 몸을 날려 마우스를 움직여서 화상 회의 프로그램에서 나가 버렸다. 노트북을 덮고 전원까지 빼 버렸다. 봄잠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름잠은 명패를 치웠다. 먹다 남은 푸딩들도 다 먹어 치웠다. 겨울잠이 체크리스트에 체크를 했다.     


∨ 리허설 때 우리의 상황과 감정을 말하면서 시간 끌기

∨ 리허설 때 사업 개요 설명으로 시간 끌기

∨ 리허설 때 숲 대신 일지만 추려서 보여 주기     


봄잠은 새로 온 메일이 있는지 체크했다. 봄잠에게는 당번이 아닐 때도 휴대폰으로 수시로 메일을 체크하는 병이 있었다. 학회 실무자에게서 자료집 최종본 메일이 와 있었다. 자료집을 열어서 보니스의 발표문부터 본 봄잠이 소리를 질렀다. 안 돼! 푸딩 껍질을 치우던 여름잠이 물었다. 왜? 여기 봐봐. 여기에 학회 실무자가 알려 준 김본 발표에 관해 나와 있는데…… 우리 게 김본 것하고 너무 비슷하잖아! 제목은 ‘연구자의 관계와 정신 건강의 상관관계 연구’인데 개요가…… 오래된 연구소 생활이 연구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수프’라는 이름을 지닌 책으로 실험한 결과를 발표한다? 왜 실무자는 이걸 미리 안 알려 준 거야? 개요 한번 안 읽어 보고 일만 한 거야?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자료집 초고에는 ‘수프’라는 말이 없었잖아? 설마 고쳤다던 오타가 수프였나? 오타가 원래 뭐였지?


최근 들어 봄잠이 가장 길게 말한 대사였다. 말끝에 봄잠이 기침을 했다. 여름잠이 봄잠의 등을 천천히 쓸어 주었다.

봄잠이 기침과 함께 비명을 토해 냈다.

망했어! 이제 진짜 시간이 얼마 없는데 어떻게 고치지?

잠깐, 잠깐. 진정해. 방법이 있을 거야. 일단 가을잠한테 계속 연락해 보자.     


∨ 가을잠에게 계속 연락 시도하기     


겨울잠이 휴대폰으로 가을잠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눈물을 표시하는 이모티콘을 최대한 많이 써서 지금 가을잠의 부재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리고자 했다. 여름잠은 연구소 전화로 가을잠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니스가 연구소로 전화를 걸더라도 계속 통화 중이라는 소리만 들을 수 있을 터였다.


아, 연락이 계속 안 돼.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안 받아.

겨울잠이 울먹거리듯이 말했다.

가을잠이 한다는 유튜브 채널이 뭐라고 했지? 일지에는 없는데.

전에 한번 말했던 것 같은데…… 숲이라는 말이 들어갔을 거야.

가을잠이 쓰던 다이어리나 메모 같은 거라도 있나 한번 찾아보자.     


∨ 그동안 연구소에서 가을잠의 흔적 뒤지기 

    

봄잠과 여름잠은 연구소를 돌아다녔다. 스무 걸음도 채 걷기 전에 한 바퀴를 다 돌 수 있었지만 다섯 바퀴 이상 돌았다. 여러 번 멈추어서 서랍과 책상 옆, 책장 구석, 쓰레기통까지 살펴보았다. 가을잠이 목숨처럼 중요하게 여기던 다이어리는 연구소 안에 없었다. 메모라도 찾아야 했다. 상자 안에 쌓아 두었던 책들을 들춰 보았다. 보고서까지 하나하나 꺼내서 넘겨보았지만 나오는 건 없었다. 먼지만 더 날릴 뿐이었다.


봄잠이 다시 기침하기 시작했다. 냉장고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났다. 겨울잠은 단체 채팅방에서 유튜브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았다. 숲의 후보가 될 뻔했던 발제문들도 다시 넘겨보았다. 연구소는 더욱 건조해졌다. 단것을 많이 먹었던 여름잠의 목이 더욱 탔다. 가을잠이 어디로 갔는지, 왜 갔는지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 책상에 두었던 미니 가습기에서 바람이 빠지는 소리가 났다. 색색으로 조명을 바꿀 수 있는 투명한 가습기의 불빛은 붉은색이었다.


그런데, 진짜 가을잠은 왜 사라진 거지? 어떤 감정이었길래?

여름잠이 중얼거렸다. 가을잠의 감정. 이제연의 감정. 가을잠이 사라졌다는 사실에만 집중해서 가을잠이 (     ) 감정이었는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다이어리나 메모가 아니라 감정이 문제일지도 몰랐다.


그때, 습관적으로 메신저에서 지인들의 프로필 사진을 훑어보던 봄잠이 외쳤다.

프로필 사진이 핵폭발 사진으로 바뀌었어!

명백한 시그널이었다. 가을잠의 스트레스가 최고치에 달했다는 뜻이었다.

봄잠이 조용히 체크리스트에서 체크를 지웠다.     


□ 가을잠에게 계속 연락 시도하기     


가을잠이 핵폭발 사진을 프로필에 올린 적이 또 있었다. 팔 년 전 여름방학 세미나 때, 선과 율과 미철과 제연과 김본 선배까지 다 같이 있었던 다섯 번째 세미나이자 마무리 세미나 때. 공동체를 주제로 한 세미나 분위기가 훈훈했는데도 가을잠은 세미나가 끝난 뒤 프로필 사진을 핵폭발 사진으로 바꾸었다.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는 듣지 못했다. 다만 가을잠은 지나가듯이 말했다. 칭찬받아서 기쁘긴 한데, 기쁘면서도 찝찝해. 그때 세미나 반장이었던 김본 선배가 세미나를 마무리하면서 분명 제연을 칭찬했었다. 아이디어가 신선해서 조금만 더 생각을 발전시키면 좋은 연구가 나올 것 같다고. 그리고 그다음에…….


나도 폭발 직전이야. 더 이상 못 하겠어. 그냥 나를 페이드아웃 처리해 줘!

겨울잠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외쳤다. 여름잠이 다급하게 말했다.

떨지 마. 이번 고비만 넘기면 돼. 가장 중요한 것만 말하지 않으면 되는 거야. 관절을 유연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융통성 있게 생각해야 해. 긴장을 풀고. 침착하게.

아니, 여기가 (     ) 감정연구소면 뭐 해? 우리 감정은 누가 챙겨 주냐고? 우린 대체 (     ) 연구하고 있는 거야?


봄잠은 조용히 반야심경 어플을 틀었다. 딱 딱 딱 딱 딱따따다따따따다다다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백팔 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겨울잠은 컴퓨터에서 재생했던 가을잠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보니스 교수님, 아니 김본 선배. 저는 선배를 보면서 제가 밟을 수 없는 세계에 관해 생각했어요. 선배는 언제나 저보다 앞서나가는 느낌이었고 저는…… 늘 저만의 기지에서 붕 떠 있는 기분이었죠. 저와 다른 공간을 밟고 있는 선배 때문에 저는 여러 감정을 느꼈어요. 불안, 분노, 체념, 무력감, 헛된 기대와 희망…… 그래도 선배가 세미나에서 칭찬 하나 해 주시면 엄청 기뻤는데요. 그래서 선배와 학회에서 발표로 재회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뻤어요. 선배가 저희 연구소의 존재를, 저희들의 존재를 좀 더 알아주면 좋은 동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지금은 아니지만요.      

 

답은 그 세미나에 있어. 그때, 우리 모두 다 있었잖아.

겨울잠이 중얼거렸다. 반야심경의 소리를 뚫고 그 말은 봄잠과 여름잠의 귀에 박혔다. 


가을잠에게 전화를 거는 것을 멈춘 사이에 연구소 전화가 울렸다. 봄잠이 전화를 받았다. 봄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일그러진 얼굴과는 달리 산뜻한 목소리로 봄잠이 말했다. 김본 선배님, 저희 아시죠? 저, 선이에요. 아직도 보나 마나 뻔하지, 하면서 남 무시하는 건 여전하시네요. 저희 아직도 기억 안 나세요? 세미나도 같이 했었는데.


말로 장풍을 쏘는 선의 능력은 여전했다. 보니스는 겉으로 멀쩡해 보여도 속에 있는 장기 하나쯤에 약간의 스크래치를 얻었을 것이다. 간이거나, 위이거나. 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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