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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ligitis Sep 25. 2017

JM1 Disco Club, 카이스트에서 생긴 일

예술과 과학이 만나면 

24/7 Open Labs with thousands of fruit flies © Lisay G.

시도 때도 없이 아프다

 9월의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떴는데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목은 아프지 않은데 열이 나 머리가 깨질 듯하고 근육 마디마디 끊어지는 듯 아팠습니다. 오전 미팅은 취소되었지만, 오후 미팅이 있어서 나가려고 씻는데 샤워기 물방울이 바늘처럼 등에 꽂힙니다. 이대로 나갔다가는 가을날에 낙엽처럼 바스러질 것 같아 약속을 취소한다는 문자를 보내고 쓰러졌습니다. 눈을 떠보니 응급실입니다. 바이탈은 정상인데 이틀간의 기억은 없고 고열 때문에 3kg이 빠졌습니다. 의사 선생 왈, 갱년기가 시작된 것 같다고. 그러고 보니 몇 달 전에도 실신한 적이 있었고, 시도 때도 없이 에어컨을 쐬거나 창문을 열어놓고 잤는데... ‘영원할 것 같던 젊음도 이제 저무는구나.’ 젊어서 놀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입니다. 이메일과 전화를 확인하니 100여 통의 이메일과 문자가 잔뜩 와 있습니다. 반가운 소식을 담은 메일 한 통, <아티언스 크리에이션 챌린지 30X30>에 참가자로 선발되었습니다. 다음 주 대전에 갈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섭니다. 창작에 필요한 기자재는 각자 준비해서 오라는데, 달팽이처럼 작업실을 지고 가야 할 것만 같습니다.

트라우마의 그곳으로

 아티언스가 열리는 하루 전 날  KAIST에 도착해보니 때마침 포카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연고전 (고연전)처럼 두 학교 간에 열리는 친선대회로 2002년부터 시작되었지요. 축구, 농구, 야구 같은 운동경기뿐 아니라 이공계 특성 대학만이 할 수 있는 해킹, A.I. 등의 종목도 있어 재미를 더합니다. 매년 양쪽에서 번갈아 열리는데 어웨이 경기에 해당하는 학교를 앞으로, 홈경기에 해당하는 학교를 뒤에 넣기에 카이스트에서 열리면 포카전으로 부릅니다. 가을이 한창이라 하늘은 푸르고 날씨도 좋았건만, 30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 내에 작품을 완성해야 하기 때문에 축제를 즐길 여유는 없었습니다. 해커톤의 특성상 미리 팀을 알 수 없어 복불복이 작용하는 것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대전 이외 지역 참가자들에게는 하루 전날 숙박이 제공되었는데, 운 좋게 룸메이트를 팀으로 만난 동성팀도 있었습니다. 서류 접수를 할 때 선호하는 상대방 전공 순위를 사전에 제출하기는 했지만 성사된다는 보장은 없었습니다. 아티언스 대전,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주한 영국문화원의 지원으로 무박 2일 30시간 동안 순조로운 행사가 이뤄졌습니다. 

초파리와 현대 유전학

 전산학과에서 만든 프로그램을 돌려 이뤄진 팀빌딩에서 만난 운명의 짝꿍은 카이스트에서 발생 유전학을 연구하는 박사 후보생이었습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예술가 15명 중에서 나이 많은 누나와 한 팀이 되어 서운해할까 봐 무조건 초파리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로 했습니다. 캐리어 가득 DJ 할 때 입는 의상을 챙겨가기는 했지만, 피곤하기도 하고 체력도 달리고 '이번에는 숨만 쉬어야지.' 생각했습니다. 원래 게임을 만들고 싶었는데 그렇게 되면 과학자와 분담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결국 야식을 먹고 달밤에 체조도 하면서 최대한 커리큘럼에 충실하면서, 내년에 론칭 예정인 바이오 스타트업을 위한 빅 픽처를 그려보기로 했습니다. 브레인스토밍을 하고 재료를 사러 나갔다가 작품을 구상하기 위해 오후와 저녁 내내 열 일하다가, 짝꿍은 새벽녘 초파리가 가장 좋아하는 바나나 한 다발을 건네주고는 집으로 가버렸습니다. 속이 타는데 아이스크림이나 아메리카노를 건넸다면 더 좋았을 것을... 그래도 성의를 생각해서 먹었습니다. 식초 냄새 가득한 연구실 바닥에서 뒤척이며 혼자 작곡을 하다가 보니, 내가 초파리가 된 것인지 초파리가 내가 된 것인지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연애에 실패한 초파리는 알코올에 탐닉한다는 것, 일생에 걸쳐 노화가 진행되면 수분이 빠지면서 날개는 건조해지고, 운동량이 현저히 줄어들고 지방이 늘어난다는 것도 사람과 닮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초파리 DNA 연구로 인간의 불치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은 매력적입니다. 이산화탄소가 뿜어져 나오는 마취 패드 위에 기절한 초파리를 한 줌 쏟아놓고, 현미경으로 시야를 확보하면서 짝을 맞춰 핀셋으로 집어 바이알에 담습니다. 수놈은 꽁무니에 생식기가 있어서 꼬리 끝이 검게 보여 육안으로도 감별이 가능합니다. 삐약이 이야기에 세뇌가 되다 보니 병아리 감별사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녀석들은 아쉽지만 파리 지옥행입니다. 실험실에는 초파리를 대량 사육하다 보니 옥수수 전분과 꿀을 젤라틴과 배합해 먹이를 만드는데 (과일을 주는 게 아니었어요), 초파리를 위한 전문 영양사도 상주해 계셨습니다. 100여 종이 넘는 초파리 중 주인공으로 간택된 종은, 영롱한 빨간 눈을 가진 대전 전민동 자생종 JM1으로 발견된 동네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초파리와 함께 춤을

초파리의 정면 및 측면 프로필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사람 못지않게 수고가 필요합니다. 마취한 초파리를 핀셋으로 조심스럽게 붙잡고 전자현미경에 컴퓨터를 연결하는데, 좌측의 이미지가 촬영한 JM1의 사진입니다. 격자로 줄을 맞춰서 규칙적으로 배열된 반짝이는 눈은 화려한 수국 꽃 같기도 하고 루비 같기도 하고 황홀했습니다. 초파리는 짝짓기 위해 본능적으로 춤을 추는데, 마치 클럽에 가서 이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춤추는 인간군상에 오버랩됩니다. 그리고 실험실에서 사용하는 바이알에 먹이를 채워놓고 보니 흑백 건반 같기도 합니다. 위아래로 정신없이 움직이는 초파리를 관찰하고 있노라니 뮤직 소프트웨어의 이퀼라이저를 연상케 합니다. 여기에 실험용으로 사용하는 먼지 쌓인 아크릴 박스를 꺼내 보니, 평소 작업에 사용하는 큐빅, LED, 미러볼을 달고 음악을 틀면 블링블링 근사한 클럽으로 변신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상상력은 새벽 넘기도록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피어올랐고,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가 충돌하면서 초파리 JM1 디스코 클럽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마취패드에서 암수 초파리를 골라 담는 모습 © Lisay G.

노화를 거스르는 몸부림

아티언스의 주제는 노화 (Aging)에 대해서 과학기술이 융합된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떠오르는 것들을 적어보니 텔로미어, 상대성이론, 고령화, 안티에이징, 치매예방, 항산화, 영원불멸 등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불혹을 지나면서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최근 실감하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20대에는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는데 일주일이면 충분했는데 이젠 몇 달이 족히 걸립니다. 초등학생과 같이 시작한 코딩 프로그램 스크래치 (Scratch)는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고, 움짤이나 인스타그램을 하는 것 마저 수월하지 않았습니다. 예전에는 무심했던 아이돌 그룹이 다 예뻐 보이는지... 해외에 살면서 놓아버린 트렌드와 잃어버린 감각을 깨우려고 빅뱅 (BIGBANG)부터 역주행을 시작했습니다. 눈을 뗄 수 없는 현란한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과감하고 생기 넘치는 시절이 있었나' 애틋하더군요. 언젠가부터 나의 분신이 나를 대신해 멋진 삶을 살아주어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들었지요. 영원을 살아도 무언가에도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허무해지기까지 했습니다.

JM1 Disco Club_Installation_2017 © Lisay G.

노는 게 제일 좋아

'호모 루덴스 (Homo ludens)'는 유희적 인간을 말합니다. 어쩌다 보니 예술작업이 놀이이자 일이자 즐거움이 되기는 했지만 종교, 전쟁, 사랑, 철학, 예술 등 인간의 위대한 문화는 놀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이성적인 측면을, 호모 루덴스는 감정적인 특징에 주목하였습니다. 두 가지 특성이 통합되어야 비로소 인간으로서 완성될 수 있습니다. 우리 삶 구석구석 문화예술이 침투해 있지 않은 곳이 있을까요. 놀이의 궁극적 목표는 재미 혹은 자유인데 세상을 둘러보면 이것으로부터 벗어난 삶을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위징아의 저서 <호모 루덴스>를 보면 유희를 인간의 본질로 정의하면서 쉼 없이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람들을 다시 보게 합니다. 이번 해커톤에 오기 위해 휴가를 내고 참가한 회사원들도 있었습니다. 저의 참여 동기는 얼마 전부터 살아가는 기쁨이 없어 고민이었지요. 시간과 더불어 나이가 들고, 언제 어디에서 살아가든, 뜨거운 심장을 가졌다면 품어야 할 가치가 무엇일까요. 명예나 찰나에 우쭐하거나 대단해 보이는 사람도, 절대자 앞에서는 미물 초파리의 삶과 별반 차이가 없을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 Lisay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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