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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ligitis May 06. 2019

관찰하고 준비하시다

지금 이 순간 꿈이었으면

다음 달 입원날짜를 잡아놓고 응급 수술을 하게 됐습니다 © Lisay G.

인간의 계획은 부질없었다

월요일 아침, 오늘의 TGIM 메뉴에 흥분하며 점심 샐러드 주문을 넣고 사무실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복통에 식은땀이 나서, 잠시 기대어 숨 고르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통증이 지금까지 경험했던 양상과는 달랐죠. 특별히 먹은 것도 없는데 칼이 찌르는 듯 아랫배가 아프고 열이 나고 통증은 심해졌습니다.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보호자의 도움으로 119 구급차가 도착했고, 들것에 실려나가는데 햇살이 머리 위로 쏟아졌습니다. 잠시 후 눈을 떠보니 응급실에서 팔에 진통제와 항생제 링거를 주렁주렁 달려 있었지요. 피검사, 심전도, 소변검사, 초음파, X-ray, CT까지 기본 검사가 끝나고 처분을 기다리는 도살장의 짐승처럼 떨고 있었습니다. 통증이 나아지길래 저녁 퇴원을 예상했는데 입원 수속을 하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듣습니다. 다음 달 수술 날짜가 잡혔는데 굳이 지금 입원이 필요한지 물었습니다. 뱃속에서는 종양이 터져서 염증 수치가 점점 오르고 있는데 응급상황인지도 몰랐던 저는 줄줄이 잡힌 미팅 스케줄을 보며 암담할 수밖에 없었지요. 아나필락시스가 있어 항생제 과민으로 밤새 설사가 이어졌고, 월요일 하루 종일 먹은 것이라고는 혈관주사를 통한 수액뿐인지라 자연스럽게 공복에 장까지 비워졌습니다. 그렇게 입원을 해 주치의 선생 수술이 비는 시간에 대기하였습니다.

사흘만의 금식을 마치고 만난 첫끼는 풀로 써도 될 것 같은 쌀미음과 소금 한 봉지 © Lisay G.

까탈스러운 자, 진상이 되다

 이번 수술을 통해 의학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음을 새삼 느꼈습니다. 15년 전 이 곳에서 동일 병명으로 개복수술을 할 때에는 봉합사로 꿰매는 방식이라 가로 절개임에도 영광의 상처가 남았습니다. 하지만 스킨 스테이플러가 일반화되고 더마 본드, 히스토아크릴 등 의료용 접착제의 개발로 응급 세로 절개임에도 상처가 가늘고 길게 남았습니다. 전에는 8시간 마취로 쪼그라든 폐를 펴느라 수술 후 가래를 뱉고 풍선을 불어대며 고생을 했습니다. 이제는 마취법도 단순해지고 그때와 비교해서 큰 수술이었음에도 2시간 마취로 수술이 끝났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응급환자라 주치의가 점심을 거르고 수술을 해주셨더군요. 대형 종양들을 제거하느라 혈액 손실이 클 것을 예상해 몇 달 전 페린젝트로 철분을 채웠음에도 피가 부족해서 난생처음 수혈을 4팩 받았습니다. 마취 중 목에 꽂은 정맥주사로 순식간에 수혈은 마쳤습니다. 마취에서 깬 제가 수혈을 거부하면서 한바탕 말싸움이 벌어졌지만 생명을 다루는 의료현장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었습니다. 수혈을 받자마자 혈색소 수치가 6g/dl에서 12g/dl로 반등하였고, 짐승 같은 회복력을 보이면서 일주일 만에 퇴원을 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퇴원 후가 더 문제이죠. 리모컨으로 등받이가 움직이는 전동침대가 가정집에 있을 리 만무하고, 영양을 맞춰 회복식을 챙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지요. 그리고 장이 유착되지 않으려면 운동을 해야 하는데 미세먼지 가득한 요즘 밖을 돌아다니기도 쉽지 않습니다. 결국 회사와 집을 오가며 2시간 내외의 가벼운 일을 하고 있습니다.

퇴원하고 휴대전화를 열어 보니 '꿈이 아니었구나' 알려주는 문자가 있습니다 © Lisay G.

희생양을 바치고 얻다

 워커홀릭이라 수술을 미루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몇 년 전 주치의의 경고에 따랐더라면 장기를 절제하고 복강 내에서 종양이 터지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기회로 소중하게 얻은 것도 있습니다. 오래전 무언가에 의가 상했는지 연락을 끊고 얼굴도 볼 수 없던 언니와 응급실에서 재회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배우 앤젤리나 졸리의 과감한 선택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한 순간이지만 입원한 병동에서 오가며 만난 암환자들과 그들을 살리고 보살피는 의료인을 보며 깨달은 바가 큽니다. 수술동의서를 읽어 보면 환자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항목이 많습니다. 저는 응급이라는 처지를 망각하고 몇 개 항목에는 동의하지 못하겠으니 그것을 제외하면 서명을 하겠다고 수술 직전까지도 떼를 쓰다가 실려 올라갔습니다. 몸은 성하지 않았지만 정신은 은화처럼 맑았으니까요. 수술이 끝나고 온 동갑내기 교수가 묻더군요, 억울하냐고. 저는 답했습니다. 지나갔으니 이제 상관없다고. 아니 스타트업을 혼자 이끌어가기에 부족해서 동역자들을 보내주셨다고. 그렇지 않다면 바쁜 때에 저를 쉬게 하지도 않으셨겠지요, 항상 모든 것을 예비해주시는 주님이시니까요.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주님을 원망하면서 상황을 부정하고 외면한 적도 있지만 모든 상황이 쓰나미처럼 지나고 나서야 큰 그림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회복은 더디고 힘들겠지만, 고난주간을 보내고 다시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지요. 엔딩을 늦춘다면 삶의 종착지인 죽음을 미룰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 Lisay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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