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Diligitis Oct 14. 2020

너와 나의 바나나

 바야흐로 노벨상의 계절이 왔다. 누군가는 기대하고 좌절하고 또 누군가는 굴러온 행운에 기뻐하겠지. 올해도 코리아 패싱이었지만 아직 실망하기엔 이르다. 노력과 상이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지만 오래 버티다 보면 한 번쯤은 운이 따라주는 것이 인생이다. 한 번으로 그치면 운이 좋은 것이고, 두 번부터는 실력이니까. 올해는 흥미롭게도 초파리와 관련된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카스 9 (CRISPR-Cas9)'을 개발한 여성 과학자 두 명이 수상했다. 획기적인 기술이라 예상은 했었지만 이렇게 빨리 현실 속으로 들어올 줄은 몰랐다. 일찍이 관련 논문을 찾아보고 인터뷰 기사도 유심히 읽었다. 11월 3일 초식남과 두 번째로 만나기로 했으니 질문을 리스트업해 몰아 답변을 듣고 싶었다. 편히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데다가 초식남이 서울로 공수할 물건이 있다기에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했다. 집보다는 공유 오피스가 오픈된 공간이니 서로 편할 것 같았다. 초식남은 액체 질소 탱크와 바나나를 들고 왔다.


“우선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냉동 초파리 중 네 마리가 다음 날 사라졌다가 2주 후 루비로 변해서 나타났다.”

“네, 그렇습니다.”

“연선님 말씀을 바탕으로 몇 가지 가설을 세우려 합니다. 첫째, 제가 드린 초파리가 특별한 것이다. 서울에서 다른 초파리를 잡아 같은 과정을 밟아본다. 둘째, 초파리의 빨간 눈이 루비가 되었다. 루비를 녹여 유전자 분석으로 생물학적 증거를 찾아본다. 셋째, 초파리 dna를 데이터화 시켜서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돌려본다. 세 번째는 연선님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네,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많이 놀라셨겠네요. 나머지 천 마리는 잘 있는 거죠?”

"네. 냉동된 포즈 그대로 누워 있어요. "

“초파리 줄은 왜 세우셨어요? 작아서 쉽지 않았을 텐데.”

"바이알 가득 빽빽이 쌓여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어요. 마침 구급상자를 보니 핀셋도 있고 천 피스 퍼즐 맞추는 셈 치고 정렬해봤어요.

"기분이 좋아지는 바나나가 있는데 드실래요?"

“어... 별로 좋아하지 않는 과일이라서요. 사과. 배, 딸기 같이 평범한 과일에는 손이 안 가요.”

“그럼 초파리 트랩이나 만들어보죠! 서울 초파리도 루비가 나오는지 알아봐야죠!”

“그런데 바나나는 정말 의외였어요.”

“왜요? 초파리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인데.”

“가장 대표적인 인공향이잖아요. 바나나향 우유에도 초파리가 날아오나요?”

”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시는지... 한 번도 안 해봐서 모르겠는데 이 참에 실험해볼까요?”

“제가 궁금했던 것들 질문으로 뽑아 놨어요. 오늘 대답해주셔야 집에 가실 수 있습니다.”


 유전자 가위부터 시작해 GMO, 초파리 염기서열 등 현대 유전학에 대해 폭풍질문을 이어갔다. GMO는 육종 기술의 하나로 자연 상태에서도 계속 발생하는 것으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멀쩡해 보이는 고구마가 천연 GMO라는 사실도 처음 알았고 징그러워 보이는 샤인 머스캣은 육종으로 나온 과일이다. 유전자 가위는 물리적으로 잘라내는 가위가 아닌 분해효소이다. 최근 유전자 연필도 나왔는데 보이지 않는 마이크로 세계라 이해하기 쉽게 명명한 것이다. 그럼 유전자 가위와 GMO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쉽게 말하자면 유전자 가위가 동종 내의 뺄셈이라면 GMO는 이종 간의 덧셈이다. 초식남은 GMO가 인간에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며 중립을 취했지만, 신이 아닌 이상 의도가 지나치면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내 입장이다.

 


 나는 직감이 뛰어났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만 훤히 보인다. 객관식 시험에서는 정답을 숨기기 위해 출제자가 애쓴 흔적이 보인다. 덕분에 학력고사는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보통사람 기준으로 운전면허 필기시험을 보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정답이 없는 사회생활에서는 능력이 한정되기 마련이다. 금지된 사랑을 하고 있거나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사람은 아이컨택만으로 알 수 있다. 마스크로 눈은 가리지 않아 참 다행이다. 눈에는 감정이 드러나고 많은 정보가 흘러간다. 유전학적으로도 뇌가 발생과정에서 밀려 나와 생긴 것이 눈이 아니던가. 이럴 줄 알았으면 FBI의 비밀요원이나 엑스맨이 되어 지구를 지키는 일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듯싶다. 긴장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을 신청했다. 공유 오피스에서 신청곡을 틀어주는 요일이 바로 오늘이다. 그리고 지난 2주 동안 초식남에게 영감을 받아서 만든 게임 몇 가지를 보여줬다. 앱스토어에서 Fly Room, Fly Chess, Allergy Fly, DNA Fly를 검색하면 무료로 즐길 수 있다. 그리고 웹 포켓볼 게임 Fruit Fly Pool까지. 소소하게 만든 나의 작품을 플렉스 했다.


"이걸 다 혼자서 만드셨다고요? 굉장한데요!"

"MIT 라이선스 오픈소스를 활용했고 초파리를 향한 열정을 조금 더했습니다. 이 그림 알아요?”

“어! 바나나네요. 직접 그리셨어요?”

“아니요. 그냥 바나나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위대한 바나나예요.”

“제가 초파리 말고는 아는 게 별로 없어서 죄송합니다.”

“모르는 게 잘못인가요. 그러고 보니 인류를 바꾼 바나나가 또 있었네요. 이 그림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앤디 워홀의 바나나예요. 이제 위대한 초파리가 좋아하는 바나나를 추가해야겠군요.”

“아! 앤디 워홀은 들어봤어요.”

“지금 듣고 있는 음악은 1967년 앤디 워홀이 프로듀서로 제작했는데 비틀스와 붙는 바람에 당시에는 묻혔어요. 그룹이 해체되고 후대에 역주행으로 유명해졌어요. 앤디가 앨범 재킷에 바나나까지 그려줬는데 말이죠. 요즘으로 치면 쇼미더머니 2에 우승한 넋업샨이 스윙스보다 대중적으로 덜 알려진 것처럼 말이죠.”

“우와, 어떻게 그런 것까지 다 알고 계세요?”

“혹시 제 나이 때문인 가요?”

“나이가 아니라 60년대부터 최근까지 대중음악사를 훤히 꿰고 계시잖아요.”

“장르 가리지 않고 음악을 워낙 좋아해요. 좋아하는 것에는 기억력이 무한대가 되니까요. 제민님이 초파리 연구하는 것과 비슷하죠.”


 초식남의 눈을 읽어도 숨기는 것이 없다. 남편도 그랬다. 미국 켄터키주 출신으로 농장에 퍽 어울리는 순박한 사람이 90년대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왔다가 나를 위해 박사를 따고 외교관이 되어 15년 간 중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 전 세계를 떠돌았다. 덕분에 나는 각국 요리와 외국어를 할 수 있었다. 남편은 정치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사교계에도 입문해 화려하게 비상했다. 타고난 DNA로 뭇 여성들 아니 남성들도 탐을 낼만큼 외모가 멋지다. 그런 유전자를 후세에 남겼어야 하는데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다. 초식남도 어쩌면 천상 과학자가 될 운명으로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지극히 작은 것으로 위대한 꿈들이 상처 받지 않기를 바라면서 뒤에서 챙겨주고 싶었다. © Lisay G.













이전 02화 세렌디피티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노랑초파리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