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우리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
‘빤스 성교육’ 사건 이후 나는 선생님과 자연스레 멀어졌다. 선생님에게서 해방된 후 난 아이들 무리에 끼기 위해 무진장 노력했다. 나의 그 끔찍한 활약으로 아이들은 나를 경계했고 잘 놀아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난 어떻게든 아이들과 놀아야 했다. 집에 가봐야 모두 밥벌이 나가 아무도 없었고, 있다 한들 나와 놀아줄 시간은 더 없었다. 학교 친구가 전부였다.
학교에 가지 않은 일요일이 더 힘들고 지겨웠다. 그래서 난 일요일에도 1시간 정도를 걸어서 학교에 가곤 했다. TV, 게임, SNS 등 지금이야 혼자 시간을 보낼 꺼리가 많지만, 그 당시에는 아이들 서로가 놀이의 대상이고 목적이었다. 그런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은 살기 힘든 것이었다. 나의 그 끔찍한 활약에도 아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날 받아주었고 같이 놀았다. 아이들이 왜 받아주었는지 물어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아이들이 착하기도 하고 또 “너도 어쩔 수 없었잖아.”라고 생각해 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날도 다른 일요일처럼 학교로 가 아이들과 테니스공으로 야구를 하며 놀고 있었다. 배트나 글러브, 진짜 야구공은 없었지만 한참을 재미있게 놀았다. 그런데 갑자기 사이렌이 울렸다. 우린 또 민방공훈련을 하는 줄 알고 신경 쓰지 않고 야구를 계속했다. 학교 밖이었으면 배운 대로 밖에서 보이지 않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우리는 학교 안에 있으므로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고 욕할 사람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이렌이 다시 울리더니 “국민 여러분 실제 상황입니다. 북괴의 도발이 일어났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연습이 아니라 실제 상황…. 실제 상황이니 준비를….”은 방송과 집으로 빨리 가라는 지나가는 어른들의 다급한 재촉에 떠밀려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뛰어갔다.
한참을 달리다 숨이 차 멈춰서 헐떡거리다 난 문득 “왜 달리지? 가봐야 아무도 없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으며 재밌는 야구를 계속하지 못한 것만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오니 역시 아무도 없었다. 주체할 수 없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틀었던 TV에는 북한군이 비행기를 몰고 자유를 찾아 귀순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우리 공군이 출동했으며, 우리 군은 철통같은 방어 태세로 국민을 보호했다고 방송하고 있었다. 난 뭔 말인지는 몰라도 “전쟁이 나지는 않겠구나. 아무도 죽지 않겠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저 반복되는 뉴스가 빨리 끝나기만 바랐다.
깜깜한 밤이 돼서야 하나, 둘 돌아온 우리 가족이 밥을 먹으며 오늘 사이렌을 들으며 있었던 일을 이야기 듣고서야 사이렌이 사람들에게 준 당황, 아니 두려움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어린 시절 전쟁을 겪은 부모님은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절대 어디로 가지 말고 무조건 집으로 오고, 일단 가족들 다 모일 때까지 죽더라도 집에 있으라는 말을 열 번도 넘게 하신 것으로 기억한다.
부모님의 말씀을 통해 난 사랑하는 것이 걱정하는 것임을 알았다. 사이렌이 가져다준 혼란, 아니 짜증은 곧 잊혔지만 가족을 걱정하는 부모님의 마음은 지금도 나를 지켜주고 있다. 나는 때때로 학생들을 걱정하는 마음이 점점 약해지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그들에게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