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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출판, 그리고 함께 위기를 극복하기

인문사회과학의 '위기'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들

by 가이아

교육학과 언어학 사이 그 어딘가를 헤메는 비정규직 강사로 살면서 계속 고민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한국의 인문사회과학은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측면을 포괄적으로 논의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는 저보다 훨씬 더 깊이있는 이야기를 펼쳐 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독립연구자들의 모임(캣츠랩)에 속해 있고 넓은 의미의 인문사회과학으로 분류될만한 교양서를 쓰는 입장에서 여물지 않은 생각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최근 과학 커뮤니케이션의 가치와 한계에 대한 여러 논의를 접했습니다. 과학계의 이야기인지라 해당 분야의 논의에 대해 명확히 정리된 입장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세부사항에 대해 코멘트할 역량은 더더욱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문사회과학과 교육학 분야에서 비슷한 문제의식을 오랜 시간 품어 왔습니다. 이를 세 가지로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제 입장의 협소함과 주제의 무거움을 모두 고려하면서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첫째, 학문적 업적과 대중과 시민을 위한 커뮤니케이션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려는 습속이 은근히 내비치는 엘리트주의의 문제입니다. 연구자는 시민보다 위에 있지 않고 시민 중 하나일 뿐입니다. 전문가이기 이전에 시민이라는 뜻입니다. 대중은 인문사회과학의 성과를 자신의 삶에 녹여낼 수 있는 토대 위에서만 민주주의 사회의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학문장의 적잖은 돌파구는 학술서/대중서로 나눠지지 않는 저작을 통해 나왔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인지언어학의 역사에서 기념비적 저작으로 꼽히는 <삶으로서의 은유>는 대중서입니까, 학술서입니까? 인지과학에서 확장된 인지/마음 이론을 정초한 학자 중 하나인 앤디 클락의 일련의 저작들은 대중서입니까, 학술서입니까? 주디스 버틀러의 최근 저작들을 대중서/학술서 중 하나로 분류할 수 있습니까? 벨 훅스의 저작은 페미니즘 학술서입니까? 교육학 지침서입니까? 자전적 에세이입니까? 브루노 라투르나 도널드 노먼, 하워드 진과 스티븐 제이 굴드의 저작은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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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적 정합성, 개념의 엄밀함과 논리적 체계, 반증가능성, 방법론적 투명성 등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리려는 학술적 작업이 의미가 없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노력이 가치있는만큼 자신이 가진 개념과 이론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놓는 작업 또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학술 출판/대중서 출판'이라는 이분법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논문이 특정 분야의 지식을 '최첨단'에서 논의하는 유일한 장르는 아닙니다. 때로 가장 아방가르드적인 논의가 가장 대중적인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각개 전투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학술 생태계의 확장입니다. 그렇다면 학술 출판과 대중서 출판이라는 구분을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이 둘은 대립의 관계가 아니라 상보적인 관계, 시너지를 내는 관계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인문사회과학의 입지가 좁아진 이유 중 하나는 '생태계 확장의 실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술지 인덱스, 임팩트 팩터 등이 학문적 발전의 지표라는 말도 안되는 이데올로기가 득세하는 동안 제대로 된 공론장은 싹도 틔우지 못하고 사라졌습니다.


둘째, 위와 연결되는 논의로서, 한국의 논픽션 생태계의 협소함입니다. 잠깐 옆길로 새 보자면, 저는 응용/사회언어학 및 리터러시 연구 분야에서는 해당 학술장의 논의를 따라가려고 합니다. 쉽게 말해 꾸준히 논문을 찾아 읽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지과학, 신경과학, 머신러닝, 인류학, 심리학 등의 세부 분야까지 그렇게 할 수 있는 여유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들 분야를 이해하기 위해서 (1) 저명한 저자들의 대중학술서를 읽거나 (2) '저자직강' 유튜브 영상을 봅니다. 이렇게 보다가 뭔가 '꽂히는' 주제나 학자가 있으면 학술지 논문이나 학술서를 찾아 봅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응용언어학/사회언어학/리터러시 분야와 연결되는 다양한 지점이 생겨나고, 거기에서 새로운 논의를 전개할 수 있습니다. 제 분야는 깊게, 인접 분야는 넓게 보는 방식입니다.


(1)의 작업을 하기 위해 가장 자주 사용하는 매체는 놀랍게도(?) 오디오북입니다. 20년 가까이 오더블(Audible)이라는 오디오북 서비스를 사용해 왔고, 500권 가까이 되는 책을 구입했습니다. 대부분이 인문교양서/대중학술서로 분류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논픽션 시장의 규모가 크다 보니 그중 적지 않은 책들이 오디오로도 제작되는 것입니다.


저의 과문함 때문이겠지만 한국의 경우 아직까지 이런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논픽션 생태계'가 협소하다고 느낍니다. 돌려 말하면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연구자들은 시민을 위한 논픽션 쓰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중은 물론 인접분야의 연구자들이 탐독할만한 책이 부족합니다.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 요인이 작동합니다. 첫 번째는 제도적 문제입니다. '인문교양서' 혹은 '대중학술서' 계열의 논픽션을 써도 그것이 실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적어도 제가 속한 분야의 경우 집필한 책은 대학 지원 시 '실적 0'으로 산정됩니다. 아니 산정 자격조차 갖추지 못한다고 해야겠습니다. 동료심사가 없는 출판물이라는 이유를 댈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저술을 질적으로 평가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할텐데 사실상 전무한 상황입니다.


두 번째는 사회문화적 전통의 문제입니다. 유럽과 북미의의 경우 (이미 상당히 약해졌지만) '공공 지식인(public intellectual)'의 전통이 어느 정도 남아 있습니다. 공공 지식인을 대충 정의하면 "자기 분야를 넘어, 사회문화적·정치경제적 쟁점에 대해 전문성과 식견을 가지고 개입하는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의 경우 이러한 공공 지식인의 전통이 약합니다. '논객'이나 '지식 소매상'은 있(다고들 하)지만 '공공 지식인'으로 글을 쓰는 이들은 적습니다.


top public intellectuals캡처.PNG The Prospect/FP Top 100 Public Intellectuals 중에서


세 번째는 출판 구조의 측면입니다. 현재 많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은 학술지와 연관을 맺고 저작활동을 전개합니다. 학술지는 학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연구자들이 모인 단체가 연구자들의 저작을 냅니다. (여기에서 학술출판장의 구조를 논의하려는 것은 아니니 다양한 학술전문 출판기업/데이터베이스 회사의 문제를 거론하지는 않으려 합니다.) 이 구조는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거의 항상 재정적 문제를 수반합니다. 인문사회계열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아울러, 해당 학술장의 아비투스로 인해 '감당하기 힘든' 내용과 방법론은 지속적으로 배제됩니다.


여기서 고민하게 되는 것은 연구자들과 출판계가 맺는 관계입니다. 몇 차례 인문교양서 작업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좋은 편집자를 만났을 때 할 수 있는 일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운이 무척 좋은 편입니다. 그간 협업한 편집자가 다들 훌륭하셨고 성심성의껏 원고를 검토하고 발전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편집자들과의 협업은 동료 심사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는 다른 결의 가치를 생산합니다. 후자가 '학문적 엄밀성 제고'라는 기준에서 가치를 지닌다면 전자는 '엄밀성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가독성과 흥미를 갖춘 글쓰기'라는 관점에서 가치를 지닙니다. 몇몇 편집자들은 특정 주제나 학자에 대해 학계에 있는 이들만큼, 아니 그 이상의 지식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인문사회 분야의 저자들이 출판계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강점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어야 하고, 출판계 또한 인문사회계 저자들의 연구 업적과 경험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앞서 논의한 구조적, 제도적 문제는 이러한 '상생' 관계가 형성되기 힘든 조건을 형성합니다. 그러다 보니 (여러 사람들의 말을 가감없이 전하자면) '인문사회계 연구자인데도 글이 별로인' 경우가 심심찮게 보입니다. 뭐 그렇다고 제 글이 대단히 좋은가 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 (게다가 이건 시차 적응하면서 쓰는 글이라 더욱 두서가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출판계가 힘들다고 합니다. 인문사회과학 전반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독립연구자들은 아무런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논문 심사 및 개제료를 내야 할 경우를 만납니다. 생계를 위협받은 지는 너무나 오래 되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저의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은 이렇습니다.


학술 논문과 학술서 출판을 거대 학술출판기업이나 임팩트 팩터에 묶어두지 않을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합니다. 저자와 출판사가 더욱 긴밀하게 협업하고 그 결과가 사회문화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작업이 많아져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뜻을 같이하는) 일부 독립연구단체들과 인문사회과학 전문 출판사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노력이 인문사회과학 출판 생태계를 변화시키고 학술서/대중서, 학술논문/단행본이라는 이분법을 서서히 해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결론은 소박합니다. 다들 어려운데 서로 돕자는 이야기입니다. 담론장을 키우고,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고, 세계와 유리되지 않는 연구자를 키워내기 위해서 필요한 일입니다.


덧 1. 위에서 논의한 고민 속에서 캣츠랩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려고 합니다. 바로 유유출판사와의 협업입니다. 저를 비롯하여 캣츠랩 연구위원 두 분 (박승일, 설동준), 유유출판사에서 책을 낸 주간경향 김지원 기자님, 유유출판사의 편집장으로 일하고 계신 사공영 편집자님이 유유의 좋은 책을 깊이 읽는 시간을 마련한 것입니다. 5주 간 10권의 책을 음미하면서 해당 책의 주제에 대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입니다. 수강료도 큰 부담이 없고, 학생의 경우에는 무료로 들을 수 있습니다. (댓글 링크 참조)


덧 2. 소위 '대중적인 글쓰기'에 대해서는 이전에 아래와 같은 쪽글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쉽게 쓰라"는 말의 진짜 뜻>


"쉽게 쓰라"는 말은 독자의 눈높이에 맞추어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만을 사용하라는 뜻이 아니다. 개념과 엄밀성을 희생하라는 뜻이 아니다. 쉽게 쓰라는 말이 함의하는 것은 "독자들을 '자신(필자)의 눈높이'까지 데려올 수 있는 글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쓰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쓰라는 것이다. 전자와 후자는 분명 다른 종류의 글쓰기이다.


나의 말로 풀어 쓰자면, 쉽게 쓰라는 것은 독자의 삶과 지식의 세계에서 시작하여 필자의 삶과 지식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라는 뜻이다. 필자의 언어에서 시작하여 필자의 언어로 끝나는 글이 아니라 독자의 언어에서 시작하여 필자의 언어로 끝나는 글의 가능성을 탐색하라는 것이다. 독자의 세계와 필자의 세계가 어떻게 손맞잡을 수 있는지, 그것이 독자의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지 끊임없이 질문하며 쓰라는 뜻이다. 결국 '쉽게 쓰라'는 말은 위에서 내려다보듯 쓰지 말고, 따라올테면 따라와 보라는 식으로 달아나지 말고, 독자와 발맞추어 걸으며 자신이 원하는 지점까지 동행하라는 뜻이다.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버리라는 뜻이 전혀 아니다.


아래는 지비원 선생님의 <왜 읽을 수 없는가: 인문학자들의 문장을 돌아보다 (메멘토)>를 읽으며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대목이다. 내가 추구하는 대중학술서의 방향과 일치하는 서술이라 반가운 마음에 쪽글을 남겨 본다.


"어떤 필자들은 '쉽게 쓰는 것'이 독자의 눈높이에 맞추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생각에서 시도하는 많은 책이 예문 1이나 예문 2와 같은 '어려운 글' '계몽하려는 글' 로 끝난다. 독자들을 '자신(필자)의 눈높이 '까지 데려올 수 있는 글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은 상상 밖의 일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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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글이 쉽게 쓰여질 필요는 없다. 연구자 그룹을 독자로 상정하는 학술논문이 무조건 쉽게 쓰여져야 할 이유가 없듯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시민독자들을 대상으로하는 인문교양서, 대중학술서 등의 책에서 위의 원칙을 곱씹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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