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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델리 Nov 08. 2015

안개 속의 풍경​

너도 떠나 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 #17


안개 속의 풍경

Burwood, New South Wales

Australia


      


늦은 밤, 혹은 이른 아침.

여하튼 모두가 잠든 그 시간에,

다시 한번 여행을 준비하려 짐을 꾸린다.


4달을 지낸 시드니 외곽

버우드의 작은 다락방에서.

야간 스케줄 때문에 엉망이 된

내 생채 리듬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새벽 3시면 어김없이 날 떠나가는

잠을 그리워할 새도 없이.


새벽 5시에 짐을 꾸린다.


그동안 아끼며 모아 온 것들과,

그동안 집으로 보내지 못한 것들과,

그동안 버리려 생각해보지 않은 많은 것들.

가진 모든 것을 꺼내어 놓고

빈 가방과 쓰레기통에 번갈아 던져 넣는다.


이번 여행과 앞으로 해나갈 여행.

지금까지 만나온 사람들과

앞으로 만날 사람들.


그 모든 것이

안개 속의 풍경처럼 멀게 느껴진다.

축축하고 아득하게 멀어진다.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주위 풍경과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되는 아름다운 것들,

함께하면 기쁘고 행복한 사람과의 관계를

나는 전부 소화하지 못하고 산다.


할 수만 있다면 매 순간

모든 것에 감동하고

모든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고 싶지만,

나에겐 명백한 한계가 있다.


여행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 중에는

알게 된 것이 작은 기적 같은 이들이 있다.

몇 시간만에도 오랜 친구처럼

가까이 느껴지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헤어지고 시간이 차츰 흐르고 나면,

안개 자욱한 아침의 풍경처럼

서서히 옅어지다,

마침내는 아주 연한 형태로만 남는다.


그게 가끔은 견딜 수가 없다.

그렇게 흩어지고 헤어져 버린다는 게 싫다.


사람들과 억지로 웃으며 안녕할 때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쓸데없고

의미 없는 일처럼 느껴진다.

내가 무척 외로운 사람임을

깨달을 때 쯤이면 상황은 더 악화된다.


이 의미 없는 행동에 상처받지 않으려

나를 더욱 고립시킨다.  


물이 묻은 손이 마를 때면

온기도 함께 빼앗기듯이,

사람들의 온기로 따뜻한 호수 속에서

신나게 놀다 나오면 그 전보다

훨씬 더 지독한 추위가 찾아온다.

하지만 나는 인어가 아니니까,

물속에선 살 수 없다.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 앉은 호숫가에

웅크려 앉아, 다시 들어갈 용기를

내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니, 아예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지도 말자 다짐한다.


하지만 모두가 행복하게 웃고 있는 호수는

아름다워 보는 순간 마음을 뺏긴다.

숲 속은 축축하고 방향을 알 수도 없고,

무엇보다 춥다.


푸르게 빛나는 숲은 어디서 나올지 모르는

포식자들의 성역이다.

     


우리는 모두 어딘가에

자신의 장소를 정한다.

호수 안이든, 호수 밖이든, 숲이든.


어느 장소에 서서 어디를 바라보든

그건 자기 자유다.

고정된 장소에 메이길 거부하는

나 같은 이들도 또한.


호수와 적절한 거리와 관계를 갖고,

필요할 땐 안개 속으로 사라질 수 있는

새로운 내가 되길 바란다.


설령 그게 목에 아가미가 달리고

온몸은 육중한 털로 뒤덮인

괴물의 모습이라고 해도.

그런 꿈을 꾼다.


그게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든 아니든,

그런 건 상관없다.

세상에 어느 무엇도 확실한 건 없으니까.


모든 것은 모호하게 사라진다.

안개 속으로 그렇게 사라진다.



아침이 왔다.

잠은 여전히 오지 않고,

싸야 할 것들은 여전히 여기저기 널려있다.


안개로 쌓인 나의 호수도 여전히 그대로다.

호숫가에 서서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는 나도,

여전히 그대로다.


안개 속의 풍경처럼

모든 것이 모호하고 흐릿하게

사라지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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