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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델리 Nov 13. 2015

깊은 밤을 닮은 남자

너도 떠나 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 #19


깊은 밤을 닮은 남자

Brisbane, Queensland

Australia  



방향성의 부재는 여행 중에 참기 힘든 것 중 하나였다. 늦은 밤이면 찾아오는 외로움이나 오페라 하우스 앞 가게들의 비싼 물가는 문제도 아니었다.


갈 수 있는 길이 수만 갈래로 뻗어 있었기에 어느 길을 택해도 상관없었지만, 적어도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만큼은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간절한 바람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 안의 나침반은 늘 이리저리 갈피를 잡지 못했다. 큰 물음표를 지고 다니는 피로감과, 길을 잃은 듯한 두려움에 졸도할 것 같은 날들도 여럿 있었다.



단둘이 남은 브리즈번의 아파트.

거실 한쪽 빨간 소파에 나란히 앉아 영화를 한 편 보고 난 늦은 저녁. 드문드문 빛나는 건너편 건물을 바라보다 다시금 졸도할 것 같은 기분에 왈칵 눈물이 났다.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린 날, 그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조용히 안아 주었다.


"난 지금 완전히 혼자인 것 같아. 사막 같은 곳에 아무도, 아무것도 없이 혼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너무 외롭고 무서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조금씩 잦아드는 나의 흐느낌과 비례하게 점점 크게 울리는 그의 심장 소리가 뭔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확고한 어떤 것처럼 느껴졌다. 소리에 불과하지만 만질 수도 있을 것 같은 확고부동한 울림의 형태.


"넌 혼자가 아니잖아. 미리암도 널 만나러 아주 멀리서 달려왔고. 넌 좋은 친구들이 많잖아. 넌 혼자가 아니야."


나는 그의 오랜 친구 미리암을 무척 좋아했다. 그녀는 따뜻한 오렌지빛 햇살을 닮아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이었다. 그날 오후, 미리암은 보잘것없는 내 얼굴을 두어 시간 보기 위해 왕복 6시간을 차로 달려왔다. 하지만 지금은 태양 같던 그녀가 떠난 캄캄한 밤이었다.


"너무 무서워...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난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무서워하지 마. 미래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지 마. 미래에 일어날 일들은 네가 준비가 되면 받아들이면 되는 거야. 두려워할 필요 없어."


"하지만 지금 모든 문들이 닫힌 것 같아. 좋은 친구들이 있고, 날 도와주려고 하는데도, 난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외로워. 손이 차가워질 만큼."


잠시 그가 말없이 내 긴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그의 낮고 든든한 목소리가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스며들었다.


"넌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고쳐질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망가진 게 아니야. 죽음에 가까울 만큼 가까이 간 것도 아니고. 고문을 당한 것도, 모든 문들이 닫힌 것도 아니야. 설령 모든 문들이 닫힌 것 같다고 해도,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고들 하잖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걱정할 필요는 없어."


눈물에 젖어 엉망이 된 내 머리카락을 넘기며, 그가 물었다.


"너는 신념이 있어? 무언가를 믿고 있어?"


"응. 믿어. 난 신을 믿어. 믿음이 있어."


"그럼 신을 믿어. 신께서 필요한 걸 모두 주실 거야. 걱정하지 마. 세상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어. 그런 사람들은 때로 절망에 빠지지. 하지만 넌 믿고 있으니까, 네가 믿는 것이 무엇이든 굳게 믿으면, 너에게 좋은 삶이 펼쳐질 거야. 과거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미래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지도 말고. 오늘을 살아. 오늘 너의 삶을 즐기고 나아가다 보면 길이 보이게 될 거야."


내 등을 차분히 쓰다듬는 그의 큰 손이 참 따뜻했다.



여행을 시작하고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도,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고, 또 자주 길을 잃었다. 이 끝없는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어디로 가도 괜찮다고 믿는 것이다. 어차피 길은 여러 갈래로 뻗어있고, 때로 복잡하게 얽혀있기도 하니까.


방향이야 어떻든 간에,

조금씩 나아가기만 한다면 다 괜찮다고.


살면서 인생의 방향을 잃거나 영혼의 공허함을 느끼는 것이 분명 나만은 아닐 것이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 내 곁에 있다면, 좋은 직업이 있다면, 돈이 많다면, 하는 생각이 드는 것 또한.


하지만 누가 내 곁을 지켜준다고 해도, 돈을 많이 버는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런 것들이 인생의 방향성을 일깨워주거나 영혼의 공허함까지 달래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영혼의 공허함을 채우는 가장 쉽고도 어려운 방법은 신념을 갖는 것이다. 스스로를 굳건히 믿거나, 아니면 신을 믿거나. 둘 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영혼의 공허함을 안고 방향도 모른 채 인생이라는 긴 길을 걸어가는 건 더욱 고통스러운 일이다.


끝까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던 오늘.

깊은 밤을 닮은 남자가 찾아와 넘어진 날 일으켜주고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의 따뜻한 품 안에서 오랜 방황으로 갈라진 마음이 평화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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