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떠나 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 #44
Melbourne, Victoria
Australia
여행을 하면서 몇 번인가 벼룩시장을 만났다.
처음 만난 벼룩시장은 아마도 뉴질랜드에 도착해서 막 일을 시작했을 때, 머물고 있던 카티카티라는 작은 마을에서였을 거다. 그 마을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해맑게 웃으며 뭔지도 모를 것들을 잔뜩 가지고 나와서 팔았다. 산책 삼아 나갔다가 마주쳤는데, 갖고 싶은 게 전혀 없어서 조금 실망했다. 반대의 경우가 더 마음이 아프고 곤란하다는 사실을 결국 알게 되었지만.
뉴질랜드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간간히 벼룩시장이나 파머스 마켓을 마주쳤다. 벼룩시장에서는 여전히 사고 싶은 게 없었고, 파머스 마켓에서는 사고 싶은 게 많았는데 가격만 빼면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파머스 마켓에서 파는 것들은 어차피 대부분 먹는 것들이었으니까, 꼭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사면 그만이었다. 뱃속에 안전히 넣고 여행을 계속하면 되니까.
그렇게 뉴질랜드를 떠나서 호주로 갔다. 시드니에서도 패딩턴 마켓 Paddington Market 이나 록스 마켓 Rocks Market 과 같은 주말 시장을 몇 번이고 찾아갔지만, 중고품보다는 수공예로 만든 물건들이 많아서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그 물건으로 인해 무거워질 내 가방보다도 그 물건으로 인해 심하게 가벼워질 내 지갑이 더 두려웠던 때라, 뭘 사고 싶다는 욕구가 거의 없었다. 한 바퀴 휙 돌면서 건성으로 구경을 하고 한쪽 구석에 앉아 레모네이드나 빨면서 공연을 구경하거나, 사람들의 바다에서 이리저리 휩쓸리며 걸어 다니는 게 고작이었다.
이글이글한 태양이 지구를 살균할 듯 내리쬐는 1월에, 멜버른에 도착했다. 멜버른은 그동안 호주에서 지나쳤던 그 어떤 도시와는 다른, 특유의 분위기가 있는 곳이었다. 뭔가 꼬질꼬질하면서도 멋있었고, 어쩐지 좁고 불편한데 그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멜버른에서 머물러 보려고 보금자리를 구하고 일을 열심히 구하러 다녔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한 달만 보내고 다시 시드니로 돌아가기로 했는데, 그 1월의 마지막 날이었던 일요일에 친구가 캠버웰 선데이 마켓 Camberwell Sunday Market 으로 나를 데려갔다.
처음에는 그냥 평범한 벼룩시장이려니 했다. 무언가를 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마음속으로 이미 정해놨던 것 같다. 내일이면 이미 늘어날 대로 늘어난 짐을 끌고 비행기를 타러 가야 한다는 사실이 굳건하게 마음의 닻을 내리게 해 주었다. 그런데 그 땡볕 아래서 기웃거릴수록, 구석구석 돌아볼수록, 점점 더 인내심의 끈이 얇아졌다. 태양이 돋보기를 들고 까만 종이에 구멍을 내듯 인내심을 조금씩 태우고 있는 것 같았다.
온갖 것들이 다 나와있었다. “이런 걸 누가 사?”하는 것(무척 싸지만 쓰레기장으로 가야 하는 게 아닐까 의심되는 것들)부터 “이런 걸 누가 사!”하는 것(무척 비싼데 내 눈에는 가치를 전혀 알 수 없는 것들)까지. 드 넓은 공간에 펼쳐진 많은 것들이 내가 살 수 있는 가격 범위 안에 있었다. 벼룩시장에서 눈이 돌아가는 순간이 나에게도 찾아온 것이다.
살면서 때로 그러면 안 되는데 그러고 싶은 순간들을 만난다. 이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되는데 함께 떠나버리고 싶고, 이걸 사면 안 되는데 사고 싶고, 여기서 더 머물면 안 되는데 머물고 싶고, 반대로 떠나면 안 되는데 떠나고 싶다. 내 가방 안에 물건들을 다 버리고 여기서 산 물건들로 채우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옷부터 책까지. 모든 걸 다 바꾸고 싶어졌다. 여기에 영원히 있고 싶어졌다. 책을 꼼꼼히 살펴보고 한 트럭 사고, 옷도 이리저리 펼쳐보면서 한 무더기 사고 싶었다. 돌아가기는 할까 의심이 되는 축음기도 사고 싶고, 그 위에 얹을 오래된 바이닐도 여러 개 골라서 돌아가고 싶었다.
오래된 사진, 오래된 액자, 오래된 가방…… 낡고 빛바랜 물건들에 취해 흔들렸다. 그게 무엇이든 사고 싶었고, 그리고 정말 살 수도 있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발걸음이 느려졌고, 심장이 귓가에서 쿵쿵 울렸다. 땡볕이 내리쬐는 벼룩시장에 서서 어쩔 줄 모르는 소녀가 되었다.
그날 밤, 오래된 사진 몇 장과 낡은 책 한 권, 새것 같이 말끔한 옷 한 벌을 들고 내일이면 떠날 집으로 돌아와, 한 편으로는 일을 구하지 못해 멜버른에 정착하지 못한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서글픈 생각을 했다. 멜버른에 머물 수 있었다면 분명 일요일마다 캠버웰을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배회했겠지. 오래지 않아 배도 묶을 수 있을 정도로 두꺼운 밧줄 같았던 나의 인내심이 작은 단추 하나도 꿰매어 달지 못할 정도로 얇디얇은 실이 되었을 것이고, 어느 날 툭, 끊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멜버른 한구석에서 커다란 살림을 살게 되어, 어디로도 떠나지 못하고 영원히 머물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 그건 또 그것대로 좋은 삶이었을까.
그러나 어느 날 반드시 떠나야만 하는 날이 왔을 때, 나는 무얼 할 수 있었을까. 소중하게 지켜온 물건들을 내 손으로 다시 벼룩시장에 내놓았을까. 아니면 또다시 어쩔 줄 모르는 소녀가 되어 물건을 내놓고도 팔지 못하고 벼룩시장을 서성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