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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델리 Nov 12. 2024

눈 떠 보니 이 바다에 또 혼자네

심리상담 1회 차


다시 돌아왔다. 5년 만에 다시 상담실로 돌아왔다. 같은 선생님과 같은 공간에서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아, 지긋지긋해.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또 여기로 돌아왔네.



이달 초에 감정 조절이 잘 안 되는 거 같아서 병원에 갔다. 병원에서 진료 보러 오기 전에 미리 하고 오라고 보내준 질문지를 몇 개 하고 나서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그래, 요즘 같은 세상에 제정신으로 사는 게 더 이상한 일이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친절한 눈매를 가진 의사 선생님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약물 치료를 하면 도움이 되실 거 같아요, 라고 말했다.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한참을 빙글빙글 돌려 말하는 의사 선생님에게 정말로 약이 필요한 게 맞냐고 몇 차례나 확인하고 병원을 나섰다. 처방은 다음 주로 미뤘다.


다음 주는 금방 찾아왔고, 나는 다시 친절한 눈으로 웃고 있는 의사 선생님과 마주 앉았다. 약을 먹더라도 무슨 약인지는 알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자세하게 물었다. 처음에는 항우울제와 항불안제를 같이 쓰는 게 효과가 좋아서 보통 같이 쓰는데, 의존도 때문에 걱정이라면 의존도가 없는 항우울제만 사용할 수도 있다. 잠은 비교적 잘 자는 거 같으니 수면제는 처방할 필요가 없겠다. 어떤 약을 쓸 거라고 약 이름을 말해줄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항우울제를 쓸 것이고 의존도는 없을 것이며 처음에는 적은 용량으로만 사용할 것이다. 부작용은 메스꺼움이나 두통 등이 있을 수 있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듣고선 처방은 또 다음 주로 미루고 병원을 나왔다.


그리고 다음 날, 5년 전에 갔던 상담실로 다시 찾아갔다. 요즘 들어 어떻다는 이야기를 한 시간 넘게 주절주절 읊었다. 상담 선생님은 우울증이 오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했다. 나는 약물치료를 할지 비약물치료를 할지 고민이라고 했고, 비약물치료라면 심리상담 말고는 달리 생각나는 게 없어서 여기에 왔다고 했다. 선생님은 수면과 일상적인 일과 수행 능력을 물어보셨고,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다면 약물 치료는 잠시 미뤄도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그리고 돌려 말하지 않고, 명료하게 심리치료를 받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솔직히 나는 약을 먹을까 지난 일주일 동안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게 조금 더 쉬운 선택인 것 같았다. 한 번쯤은, 나를 위해서 쉬운 길을 택하면 안 될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다시 여기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다시 여기 앉아서 나를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지긋지긋하니까.




코로나 시기를 지나며 캐럴라인 냅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고, 『명랑한 은둔자』 부터 시작해서 그녀의 책을 한 권씩 차곡차곡 사서 읽었다. 어떻게 이렇게 개인적인 일들을 글로 쓸 수가 있지. 무척 용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 기준에서 그녀는 죽을 걸 알면서도 적진을 향해 망설임 없이 돌진하는 병사보다 더 용감한 사람이었다. 4년 만에 그녀의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별로 대단한 일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많은 면에서 실제로 이것이 회복이다. 점진적인 약간의 변화. 이 보 전진했다가 일 보 후퇴하는 것. 한 번에 1그램씩 작디작은 변화. 그것들이 충분히 쌓인 후에야 상당한 변화로 보이고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중략)
나는 이것이 회복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영역에서는 앞으로 나아가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뒤로 미끄러지는 것, 이 문제에서는 개선되고 저 문제에서는 제자리걸음인 것.

자기 자신을 너그럽게 대하는 법
 『명랑한 은둔자』 중에서


그녀의 말처럼 치유의 과정이 원래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치유는 외부적 지표가 있어야 비로소 가늠이 된다. 왜냐하면 내부적 지표는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전혀 가늠이 되지 않으니까. 나 스스로 치유가 되고 있다고 느끼거나 판단할 수가 없다. 나는 늘 제자리에 있는 것 같고, 늘 같은 문제로 괴로워하는 것 같고, 매번 그 자리에 돌아와 늪에 빠지는 것 같으니까. 외부에서 신뢰할 수 있는 누군가가 원래 그런 거라고, 하지만 당신은 그 늪에서 2mm 정도는 벗어났네요. 이전과 완전히 같은 상황은 아니네요. 이렇게 말해주면 비로소 그걸 받아들이고 나의 회복을 인정한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믿지 못해서, 스스로 판단을 내리지 못해서, 결국은 외부의 영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매우 자신감과 자존감에 상처를 입히는 일이다. 당장에 회복을 판단하는 문제는 해결되지만, 한 편으로는 또 다른 늪에 발을 디디는 일이기도 하다.




결국 매주 화요일마다 그 작은 방으로 찾아가기로 약속했고, 오늘은 그 약속을 이행한 첫날이었다. 오늘 상담을 하면서 내가 그동안 많이 외로웠고, 그 외로움의 근원이 어디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내가 왜 다른 사람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해 왔는지도 알게 되었다. 나는 늘 혼자였다. 나만의 바다에서. 나만의 바다에서 살아남으려고 고군분투할 때 나는 늘 혼자였다. 두려웠다. 죽지 않으려고 살아남으려고 미친 듯이 발버둥 칠 때, 나는 혼자였다. 나는 왜 늘 삶이 버거울까. 왜 내 삶은 — 특별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는 것 같은데 — 왜 이렇게 버겁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래도 나를 놓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노력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 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늘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든,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왜 늘 그렇게 노력을 하세요, 선생님이 물었다. 안 그러면 가라앉으니까요. 바다는 무서운 곳이고, 빠져 죽지 않기 위해서 계속해서 노력이라는 발버둥을 친다. 성난 파도에서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던데, 왜 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할까.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나는 내가 싫었다. 내가 싫어서 가끔은 나한테서도 도망치려고 멀리 떠나곤 했는데, 지긋지긋한 나는 늘 나를 따라와서 나를 다시 바다에 던져 넣었다. 아니, 애초에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어디를 가도, 누구를 만나도 나는 나를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늘 나만의 바다에 있었다. 눈 떠 보니 이 바다에 또 나 혼자네. 아, 이래서 여기 오기 싫었어. 나한테 그런 바다가 존재한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그 바다에 더 깊이 빠지니까. 일시적이라고 해도. 물을 먹는다고. 많이.


나는 내가 싫다고 했는데 나를 사랑하고 싶긴 한가요, 선생님이 물었다. 나를 사랑하는 건 부차적인 문제고 일단은 살아야겠고, 내가 살아야 사랑을 하든 미워를 하든 하겠어요. 그래서 계속 허우적대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나는 이런 바다에 빠진 내가 싫긴 하다. 나에 대한 스스로의 감정은 대부분 싫다는 거다. 이렇게 좋은 곳에 와서도 우울한 내가 싫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나를 싫어하는 내가 싫고, 어떻게든 나를 좋아해 보려고 노력해도 그게 잘 안 되는 내가 싫다. 바닷속 깊이 가라앉아서 모든 걸 끝낼 용기도 없고, 그렇다고 씩씩하게 헤엄쳐 건널 용기도 없는 내가 왜 바다에 빠져서는 몇 십 년째 계속 허우적 대기만 할까. 더 이상 노력도 의미가 없는 것 같고, 그러니까 그만하고 싶다. 다 그만하고 싶어 — 그게 요즘 내 기분이다.


나는 지독히도 외로운 사람이고, 아무도 나의 바다에 들이지 않는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조차도 — 사랑하는 사람은 특히나 더. 왜냐하면 여기는 위험하고, 힘들고 괴로운 건 나 하나면 족하니까? 아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내가 허우적거리는 그 망망대해가 자꾸만 욕조인 것처럼 대하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어려움을 말하면 자꾸만 해답을 주려고 한다. 명상을 해봐, 마음을 고쳐먹어 봐, 화를 내지 말아 봐, 책을 읽어봐, 우울증에 도움이 된다는 영양제를 먹어봐, 이걸 해봐, 저걸 해봐, 해봐, 해봐, 해봐. 내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해도, 설령 내가 실제로 욕조에서 허우적 대고 있는 거라고 해도 — 나한테는 여기가 망망대해라서 그렇게 벗어나 버릴 수가 없다고 아무리 말해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해. 아무도. 내가 빠져 죽고 있는 건 정말 망망대해일까. 욕조일까. 그게 중요한가? 아니면 내가 가라앉고 있다는 게 중요한가?


선생님이 차분하게 자기를 그 바다에 초대해 주면 좋겠다고, 그래서 같이 상담을 이어가면 좋겠다고 한다. 정말이지 이번 상담은 길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내가 이 지긋지긋한 치유의 길을 제대로 밟아나갈 수 있을까. 이 우울의 바다를 헤쳐서 언젠가는 작은 섬에라도 도착할 수 있을까. 아니면 성난 파도에 서핑을 즐기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 아니야, 나는 그런 사람은 될 수 없을 것 같아. 난 아마 안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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