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조우진
충무로의 가장 독보적인 ‘다작(多作) 요정’은 바로 조우진이다. 그는 장르가, 작품이, 역할이 바뀔 때마다 완전히 다른 얼굴로 관객들과 마주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작품에서 익숙한 그가 아닌, 낯선 그를 만난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감독 최국희)에서 조우진은 나라의 경제 위기를 정치적 기회로 접근하는 재정국 차관 역을 맡았다.
2017년에는 무려 9편의 영화에 크레딧으로 올라갔다.
(웃음) 들을 때마다 새롭다.
당장 다음 달만 해도 ‘마약왕’(감독 우민호)이 대기하고 있을 정도로 다작이다. 회사로 치면 계속되는 부서 이동과도 같은데 힘들지 않나?
그냥 숙명인 것 같다. 또 어떻게든 해내야 하고. 뭐든지 주어진 대로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해보자는 초심을 지키려고 한다. 작품과 배역에 목말랐던 시절도 있었기 때문에, 그때의 조우진을 생각해서라도 힘들어하면 안 된다.
지금의 자신을 키운 소년기의 영화들이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질풍노도의 시기가 중·고등학교가 아니라 IMF를 겪으면서 왔다. 20살이 넘어가면서 경제활동을 하고 많은 사람, 많은 직업군을 만나면서 사춘기 비슷하게 왔다. 정말 많이 웃다가 막 울기도 하고, 영화랑 책을 닥치는 대로 보고. 그 당시에 본 영화들이 ‘대부2’(1974), ‘8월의 크리스마스’(1998), ‘박하사탕’(1999)이다. 감정의 파장이 크고 세고 넓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국가부도의 날’은 어떻게 보았는지?
소재 자체가 일단 무겁고, 책(대본)을 봤을 때도 이 영화의 결과물이 무겁게 나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무겁고 긴 호흡이 담긴 영화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관객들이 부쩍 늘어서 걱정 반, 기대 반이었다. 완성된 영화는 무겁지만은 않고, 영화적 재미도 있고, 템포감도 있고, 각 파트별로 자기 몫을 했구나 싶었다.
새 경제수석 역의 김홍파 배우와는 여러 작품에서 호흡을 맞춰서인지 두 사람이 화면에 잡힐 때는 마치 가족처럼 친근해 보인다.
평소에도 현장에서 선배님을 부르는 호칭이 “아부지”다. 그 정도로 내가 많이 따르고, 조언도 많이 구한다. 술도 자주 사주신다. ‘내부자들’(2014)에서 처음 뵀는데, 촬영장 가서 선배님하고 독대하면서 술 마신 것이 처음이었다. 격려도 정말 많이 해주셨고 응원도 많이 해주셨다.
재정국 차관인데 극 중에서 이름으로 불린 적이 없다. 이름은 없고 직책만 있는 역할이었는지?
막판에 차관의 이름이 나온다. 20년 후, 회사 대표 인사말이 나올 때 ‘박대영’ 하고 나온다. (웃음) 생각보다 못 본 분들이 많다. 워낙 빨리 스쳐 지나가서.
사실 정부 관료 역할에게는 상징적으로 이름이 아니라 직책만 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런 부분도 없잖아 있다고 생각한다. 권력의 표상으로서 빚어진 인물이니까.
조곤조곤 한마디에도 관료의 느낌이 묻어났다.
감독님도 초반에 우리 대본은 ‘가이드’라고 말했다. 상황에 따라서, 상대 배우의 호흡에 따라서, 본인 역할에 따라서 허용하겠다고. 대본에 비해서 한두 마디씩 더 넣은 것은 있다. “거기 서있지 말고 커피나 좀 타 올래?” “한시현 팀장님” 할 때 한 번 꺾어서 부르는 것. 막판에 IMF 협상 회의 장면에서도 적잖이 넣었다. 한 번 정도는 크게 이 사람(한시현)의 의지가 꺾이면서 장면이 넘어가야 작품 전체적으로도, 이 장면에도, 한시현에게도 관객으로 하여금 더 처연함을 느끼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차관 캐릭터에 참고한 인물이 있다고 들었는데.
세 분 정도 복합되어 있다. 차관하고 들어맞겠다 싶은 부분을 가져왔다. 한 분은 머리스타일하고 외형, 한 분은 말투, 한 분은 버릇 같은 것. 3~4년 전에 지인 분들 건너 건너서 만났다. 그때의 데이터를 이번에 써먹은 것이다. 그 직업군의 삶을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그 직업군을 연기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차관은 한시현(김혜수 분)을 향해서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도 서슴지 않는다. 그런데 더 거슬리는 표현은 그녀를 이름도 직책도 아닌 ‘은행원’으로 부르는 순간이었다.
말 그대로 권력으로 깔아뭉개는 것이다. 이걸 어떻게 힘주지 않고 툭 내뱉어서 상대 배우와 관객들이 분노할 수 있게끔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잘 표현된 것 같다.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굉장히 분노했다. (웃음)
(웃음) 극 중에서 부하직원 강윤주(박진주 분)가 분노해서 쩌렁쩌렁하게 “차관님!” 할 때 그걸 듣고 이 캐릭터가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덧붙인 것이 “거기 서 있지 말고 커피나 좀 타올래?”였다. 기왕 하는 김에 더 하자, 분노 유발하게 할 거면 제대로 하자, 였다.
이번 영화에서 대립각을 세웠던 김혜수 배우와의 연기 호흡은 어떠했나?
지독한 대립각을 세운 두 배우가 촬영장에서 벗어나서 서로 연기자로서의 호감을 가감 없이 표현할 수 있는, 이런 협업이 또 언제 올까 싶다. 정말 신나게 작업했다. 김혜수 선배님이 과찬을 너무 많이 해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 너무 감사하다. 같이 또 작업을 해보고 싶다.
당신이 느낀 김혜수 배우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배우로서뿐 아니라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서 대중을 만나온 분이다. 사회활동도 열심히 하는 대한민국에서 나름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어른과도 같은…. 그 아우라를 처음 영접했을 때, 뭐랄까 소름이 돋았다. 그분이 감싸고 있는 화려한 유리막 같은 것이 있었는데 과연 다가갈 수 있을까 걱정을 잠깐 했다. 큐가 들어가는 순간 딱 사라졌다. 조금 찬란한 표현이기는 한데 모 잡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격랑기를 다루는 이 영화의 모든 장면에서 파도가 넘실대는데 김혜수 선배님이 뚝방을 설치하고 나에게 마음껏 헤엄치라고 해준 느낌이었다.
tvN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2018)의 김병철 배우와 닮은꼴로 화제였다.
병철이형은 이목구비도 또렷하고, 훨씬 잘생겼다. 나는 눈도 작고 밍숭밍숭하다. (웃음)
‘국가부도의 날’ 보도자료를 놓고 인터뷰를 준비하는데, 가족 중의 한 사람이 당신의 사진을 슬쩍 보더니 박해일이냐고 물었다. 배우들 중에 닮은 얼굴들이 좀 있는 듯하다.
해일이 형이 화내지 않으려나? (웃음) 지금보다 어렸을 때 듣기는 들었다. 해일이 형이 ‘국화꽃 향기’(2003), ‘살인의 추억’(2003) 할 때 나는 연극을 하고 있었는데 적잖이 들었다.
자신을 사로잡는 연기가 있는지?
연기를 절대 허투루 하지 않는 배우들에게 영감도 얻고, 존경도 한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호아킨 피닉스, 하비에르 바르뎀. 그들의 연기를 보면 직업정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연기력은 말할 것도 없고. 어쩌면 저런 연구의 결과물을 낼까라는 생각이 든다.
요즈음 배우의 목소리로 듣는 오디오북이 나오고 있다. 당신도 귀에 착 감기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해보고 싶다.
만약 마음껏 한 권을 읽을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유정 작가님의 ‘종의 기원’. 거기에 그려진 인간 내면에 잠재된 감정들의 깊이와 파고가 엄청났다. 소설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감정이 침몰하는 것을 느꼈다.
IMF를 겪은 세대로서 기억하는 1997년은?
영화를 보면서도 느꼈지만, ‘깊은 처연함’이다. 온 나라의 모두가 다 슬퍼하고 힘들어했다. 알콜이 넘실대고, 자욱한 담배연기가 넘쳐나는 시대였다. 그러면서 느끼는 점은, 그런 시대를 겪으며 버텨내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참 대단하다는 것이다.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통해 그 시대의 공기를 한번 맡아 보고 밝은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
[박미영 작가 miyoung1223@naver.com
영화 시나리오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고, 텐아시아에 영화 칼럼을 기고했다.]
https://entertain.v.daum.net/v/20181123073126524
*텐아시아에 실린 인터뷰를 다듬어서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