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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영 Oct 13. 2024

계몽사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

1983년판 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

무한 애정이 샘솟는 시리즈 중에서 책 커버가 적갈색 30권, 파랑색 30권으로 구성된 1983년판 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이 있다. 이 전집의 파랑색 30권을 사준 이는 외숙이었다. 나에게는 외삼촌이 세 분이 계신데 세 분 가운데 무게감이 조금 더해지는 외숙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유일한 이가 바로 둘째 외삼촌이다. 외숙은 진짜 어른이었다. 말이 많지 않으나 그 안에 은근한 힘이 있었고 표정 또한 많지 않으나 너그러운 미소가 기본값인 분이었다. 외숙은 총각 시절 여동생이었던 엄마의 적금 통장을 빚진 것이 내내 마음에 쓰였는지 조카의 책선물로 그 빚을 덜고 싶으셨던 듯싶다. 그리고 그 빚은 나에게 빛이 되었다. 어린 시절 이 책들을 보고 또 보고, 울고 또 울고, 웃고 또 웃고 그러했다. 나에게는 성경이나 불경, 코란에 준하는 존재 가치가 있었다. 그 책들로 세상을 거듭거듭 그렸기 때문이다.


우선 8권 '작은 아씨들'과 15권 '사랑의 집'의 마치 가족과 페플링 가족은 나를 왈칵 끌어당겼다. 루이자 메이 올컷이 쓴 ‘작은 아씨들'의 마치가 네 자매와 아그네스 자퍼가 쓴 ‘사랑의 가족’의 페플링가 칠 남매는 형제자매들 간의 케미가 유독 좋았다. 또 이들에게는 가난할지언정 생각이 풍요로운 부모가 있었고, 집안에는 예술적인 흥취가 넘실거렸다. 나는 이 가족들 특유의 온기가 참 좋았다. 그래서 마지막 책장에 이르면 내내 따스하게 피어오르던 불씨가 훅 스러지는 것만 같았다. 그때마다 나는 이내 책의 첫 장으로 조르르 돌아가곤 했다.


19권 러시아 동화집에 실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러시아에 처음으로 눈을 뜨게 만들었다. 주인공 세묜과 그가 마시던 술 워트카(보드카), 그리고 이 작품의 작가 톨스토이는 강렬했다. 특히 벌이가 옹색한 구두장이 세묜이 밀린 외상값을 받으러 마을에 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오면서 마신 워트카가 자못 궁금했다. 털외투가 없어도 훈훈한, 털외투 같은 건 평생 없어도 되는, 셰묜을 천하태평으로 만드는 워트카…. 어린 나의 생각 속으로 톨스토이의 문장은 뼛속까지 시린 북국(北國)과 핏속까지 나른한 워트카를 빚어내며 파고들었다.     


21권 남유럽 동화집 첫머리에 실린 ‘촌도리노의 모험’은 재미가 진진했다. 공부에 진저리를 내던 소년이 툭 내뱉은, 개미가 되고 싶다는 말로 인해 진짜 개미가 되어 버리는 이야기다. 개미를 의인화하여 표현하지 않고 곤충 본연의, 즉 개미의 삶에 밀착해서 그려낸 작품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을 읽고 있으면 한 마리의 개미가 되어서 어디론가 기어가고 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전집 안에서도 가장 아끼는 책을 꼽자면, 5권 엘리너 파전의 동화집 ‘보리와 임금님’이었다. 동화집 안에서도 애지중지했던 ‘작은 책방’은 다섯 페이지 분량의 머리말이었다. 책으로 넘쳐나는 집에서 ‘작은 책방’은 책꽂이에서 쫓겨난 갖가지 책이 뜰의 멋대로 자란 꽃이나 잡초처럼 전혀 정리되지 않은 방이었다. 어린 소녀였던 엘리너 파전은 해묵은 먼지 때문에 아픈 눈을 끔벅이며 그 방에서 살며시 나올 때, 머릿속에는 아직 얼룩덜룩한 금빛 먼지가 춤을 추고, 마음 한구석에는 은빛 거미줄이 남아 있었다고 했다. 어린 독자였던 나를 상상만으로도 마구 심장이 뛰게 하는 공간이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면서 나이 터울이 꽤 지는 이종사촌 동생에게 전집의 일부를 건네고 나서 현재 나에게 남겨친 책들은 열 권 남짓하다. 나의 책꽂이에서 숱한 책들이 입장과 퇴장을 반복했다. 그래도 이 전집 만큼은 바듯이 한 칸을 채우고 있을지언정 긴긴 시간 머무르고 있다. 책은 누렇게 갈피끈은 바삭하게 부셔져서도 말이다.  

2005년도판 길벗어린이 엘리너 파전의 동화집 ‘작은 책방’ 표지

엄마가 된 나는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길벗어린이에서 나온 엘리너 파전의 동화집 '작은 책방'을 사주었다. 에드워드 아디존의 삽화가 곁들어져서 더한 감동을 주는 책이었다. 물론 이 책은 우리 아이들에게도 사랑하는 책이 되었다.


동화는 언제 어디서든 누군가를 소년으로 혹은 소녀의 심장으로 뛰게 만든다. 먼 훗날이 되었으면 하는 어느 날, 내가 기억을 모조리 내려놓는 순간이 찾아와도 동화책만큼은 그러쥐고 싶다. 만약 읽기 어렵다면 누군가의 목소리를 빌려서 듣고라도 싶다. 그렇게 빛 속에 머무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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