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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영 Apr 07. 2020

첫 페이지를 열게끔 하는 이름

배우 송강호

제72회 칸영화제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이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봉준호의 페르소나’이자 ‘작가 봉준호의 문체’이기도 한 송강호의 비범한 연기도 수상에 한몫을 했다. 송강호는 ‘기생충’에서 전원백수 가족의 가장 기택 역으로 감정의 낙차를 선연하게 그려낸다. 그는 매양 다른 사람으로, 매양 다른 표정으로 스크린에 등장한다. 작가로 치면 늘 새로운 줄거리, 새로운 문장을 쓰는 셈이다. 한 번쯤은 겹칠 법도 한데 번번이 비껴가는, 경이로운 그의 연기를 만끽하기 위해 관객은 극장에 성큼 들어간다. 책으로 치면 첫 장, 즉 첫 페이지를 열게 하는 배우의 이름이다.


먼저 ‘기생충’의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뜨겁게 축하한다.

(칸영화제) 폐막식 참가가 세 번째다. 영광스럽게도. 물론 내가 상을 받은 적은 없지만, 다 상을 받았다. 그런데 진짜 황금종려상은 끝이 아닌가. 꿈이 현실이 되는구나.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믿기지도 않았고.     


이번 칸영화제 심사위원장인 ‘버드맨’(2014),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의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가 당신의 연기를 극찬했다고 들었다. 거장에게 연기로서 인정 받는 기분이 남달랐을 듯 싶은데.

‘버드맨’은 정말 재미있게 봤다. 물론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도 인상적으로 봤지만. 너무 감사할 따름이다.      


‘봉준호의 페르소나’로 불리는 당신이 바라보는 봉준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그리고 그 속에 있는 우리의 모습까지 20년 전부터 이것을 바라보는 봉준호만의 통찰력이 놀랍다. 개인적으로는 2년 후배지만, 존경할 만한 예술가로서의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기생충’ 제작보고회에서 “봉준호의 진화이자 한국영화의 진화”라고 한 말이 영화를 보고 나니 확 와 닿았다.

‘플란다스의 개’(2000)부터 ‘기생충’까지 긴 여정은 작가 봉준호가 집요한 리얼리즘의 세계를 차곡차곡 쌓아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리얼리즘이란 개념은 광범위하지만. 좀 거창하게, 감히 이야기를 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처음 시나리오 봤을 때부터 그랬다.     


반지하 기택의 집부터 언덕 위의 박사장 집까지 영화의 공간 설계가 놀라웠다. 마치 인체해부도를 처음 봤던 순간처럼 낯선 듯 낯익고, 계속 들여다보게끔 만드는 공간이었다. 칸의 해외 관객들 반응은 어떠했는지?

봉준호 감독이 너무나 한국적이어서 해외 관객들은 공감을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는데, 칸에서 그 예상이 전복되었다. 물론 우리 관객들하고는 다른 정서겠지만, 그 공간이 주는 이미지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칸 관객들의 작품 분석은 생각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깊이도 있었다. 봉준호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을 정확하다 못해 간파했다고나 할까. 이런 평들이 놀라웠고, 반가웠고, 기뻤다.      


영화 ‘기생충’ 스틸컷./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기생충’의 첫 장면은 양말 건조대의 집게에 매달린 양말로 시작한다. 습한 반지하에서 겨우 해를 마주하는, 붙들고 있는 느낌이었다.

유일하게 그 시간대만 햇빛이 들어온다. 해가 싹 넘어가면 어두워진다. 지하인데 지하가 아닌 공간처럼 보이려고 하는 느낌…. 그런 것들이 슬프다.     


‘냄새’로 표현되는 궁기(窮氣)가 기택의 집에 드리워져있던데.

‘냄새’와 ‘선’이란 것은 관념적이다.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상당히 주관적인 관념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우리의 보이지 않는 관념이 이렇게 입체감이 들게끔 한다. 그런 것이 이 영화의 중요한 동기, 어떤 오브제나 소재가 되는 것 같다.     


기택은 뭉근한 캐릭터다.

송강호: 뭉근한…?      


이를테면 감정을 확 지르지도, 쉬이 내비치지도 않는다. 그래서 후반에 몰리는 감정의 크기가 더 크고 깊게 다가왔다. 배우로서 기택은 어떤 캐릭터였는지?

봉준호 감독에게 사석에서도, 현장에서도 말했다. 참 오래간만에 마음 편하게 촬영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어깨에 짐을 다 지고 홀로 가는 외로움이 느껴지지가 않고 당신과 이 좋은 배우들과 같이 간다는 것이 너무 좋다고. 그래서 캐릭터도 더 좋았다. 처음부터 각이 서서 막 끝까지 가는 그런 캐릭터보다는 뭔가 이렇게 뭉근한, 뭉근한 캐릭터가…. (웃음) 그래서 클라이맥스에서 감정의 크기가, 낙차의 폭이 더 크게 와 닿는 것 같았다.      


기택 역을 그리는데 무게중심을 뒀던 것은?

뭉근함이다. (웃음) 이 캐릭터가 이 영화에 어떻게 헌신을 할 것인가, 그 지점이 가장 중요했다. 기택은 약간 연체동물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더 슬픈. 왜냐하면 자신의 의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의지는 있지만 환경에 따라갈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모습이다. 자화상 같은 느낌도, 거울을 본다는 느낌도 들고. 그런 지점이 제일 중요하지 않았나 싶다.      


극 중에 나오는 복숭아가 마치 기택 같았다. 우선 불그스름한 얼굴도, 달달하고 물렁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불그스름한 것은 진짜 비슷하다. 메이크업이 주는, 어떤 이미지가 강렬하다. 개인적으로 불그스름한 그 느낌이 참 좋았다.      


극 속의 서사와 별개로, 기우(최우식 분)가 아버지 기택에게 연기 코칭을 하는 장면도 재미있었다.  

사실은 더 재미있었다. 찍어 놓은 장면 중에 더 재미있는 것이 많았다. 영화에 다 담을 수는 없으니까. 카메라 뒤에 서있는 스탭들도 너무 재미있어 하고, 신기해하고. 왜 우리 일상에서도, 집에서 가끔씩 가족 구성원 간에도 이런 풍경들이 있지 않나. 그런 것들이 연상돼서 더 좋아하시는 것 같다.     


가족으로 묶이는 하나의 호흡이 필요한 영화였다. 배우들 간의 호흡은 어땠나?

대부분의 배우가 처음이었다. 물론 장혜진 씨는 ‘밀양’(2007)에서 동네 아줌마 역으로, 박소담 씨는 ‘사도’(2015)에서 후궁 역으로 만났지만 같이 연기하는 장면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조합이 가진 신선함이 진짜 어떨까 궁금했다. 아마 다른 배우들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일부러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들이 가진 인성이나 태도도 너무 좋고, 연기도 어느 한 사람 빠지지 않게 너무 잘했다. 앙상블이 좋았다. 촬영할 때부터 배우들의 카톡방도 있다. 물론 나는 그 방에 없다. 전화로 나는 딱 세 가지만 하니까. 문자와 전화 걸고, 전화 받기. (웃음)     


촬영 이후에도 최우식과 박소담은 “아버지”란 호칭으로 부른다고?

평소에도 “아버지, 아버지” 한다. 그래서 ‘아, 내가 쟤들한테 아버지 소리를 들을 나이인가?’ 그런 생각이 살짝 들기도 했지만, 어떤 친밀감의 표현이니까 기분이 좋다. (웃음)      


배우 송강호./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기우, 기정(박소담 분) 남매가 박사장네 과외 교사를 하고 고정수입이 생기면서 식탁의 발포주가 맥주로 바뀌더라. 엄마 충숙(장혜진 분)만 제외하고. 봉준호 감독의 일상을 포착하는 눈썰미에 또 감탄했다.

나도 몰랐다. 역시 봉준호 감독의…. (웃음) 기우가 면접 보러 갈 때, 충숙이 산수경석을 막 씻는 모습도 참 슬픈 장면이다. 그런 이미지들이 차곡차곡, 켜켜이 쌓여가지고 엔딩 쪽의 감정이…. 언론 시사 끝나고 저녁에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시사가 있었는데, 많이 우시는 분도 계시더라. 봉준호 감독이 “이 영화는 악인이 없으면서도 비극이고, 광대가 없는데도 희극이다”라는 기막힌 표현을 한 적이 있다. 딱 맞지 않나. 우리 삶의 모습을 반추하는 것 같다.      


‘기생충’은 ‘선’과 ‘냄새’가 밑줄 쫙 그은 문장처럼 따라붙는다. 그래서 박사장(이선균 분)의 거실에서 두 가족이 대치하고 있을 때, 거실 탁자가 인덕션처럼 느껴졌다. 객석까지도 그 후끈한 열기가 전해지던데.

결정타였다. 경제적으로는 굉장히 힘들게 사는 사람이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무너질 때 그것도 자식들 앞에서…. 그것은 타인에 대한 분노라는 협소한 감정이 아니라 자괴감, 자존감의 붕괴가 이뤄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봉준호 감독이, 이 영화가 결국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당신은 늘 다른 사람으로, 늘 다른 표정으로 스크린에 등장한다. 작가로 본다면 늘 새로운 줄거리, 새로운 문장을 쓰는 것이다. 한 번쯤은 겹칠 법도 한데 번번이 비껴가는, 배우로서는 놀라운 재능이 아닌가?

내가 연기를 어떻게 했다기보다 우선 작품이 가지고 있는 변별력이라고 말하고 싶다. 작품의 성격, 시대적 느낌 같은 풍경이 다 다르기 때문에. 배우는 당연히 거기에 잘 흡수되는 것이 가장 좋은 연기다.      


작년에 김지운 감독을 인터뷰 했을 때 “연기는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하는 연기가 재미있게 전달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송강호란 이름을 내놓았다.

과찬을 하셨다. 진짜 겸손의 말이 아니라, 뛰어난 감독들의 공통점은 배우가 최고의 연기를 하게끔 만드는 능력인 것 같다. 박찬욱 감독님, 김지운 감독님, 봉준호 감독님의 공통점이 있다면 나뿐만 아니라 출연 배우에게 최고의 연기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디렉션을 줄 수 있는 능력이다. 그래서 만약 내가 그렇게 보였다면 그것은 김지운 당신의 능력이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다.     


어느 시대의 호흡도 기막히게 살리겠지만, 개인적으로 아주 색다른 시대에서 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배우로서 어떠한지?

구석기 시대?      


구석기 시대도 좋고, 조금 뒤로 가서 삼국시대의 고구려도 좋다. 수렵 생활을 하는 모습이 눈앞에 벌써 그려진다. 다양한 시대에서 송강호란 배우를 마주하고 싶다.

한번 적극적으로 고려해보겠다. 구석기 내지는 신석기부터 훑어보겠다. (웃음)


[박미영 작가 miyoung1223@naver.com

영화 시나리오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고, 텐아시아에 영화 칼럼을 기고했다.]   





https://entertain.naver.com/read?oid=312&aid=0000390793

*텐아시아에 실린 인터뷰를 다듬어서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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