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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세대가 쓴 나의 한국현대사
by 장교진 Nov 07. 2016

1991년 강경대,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 강기훈

#2. 1987년 이후의 의미

1987년은 오랜 투쟁 끝에 민주주의를 달성한 도착점인 동시에 출발점이기 하다. 역사적 사건에도 주류와 비주류가 구분된다면 (물론 모든 역사는 중요하다. 단, 여기서 나누는 주류와 비주류의 기준은 사람들에게 많이 언급되는 것으로 한다.) 이를 가르는 기준 역시 1987년일 것이다.  


87년 민주화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평가가 현대사 서술 부분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면서 87년 이후 있었던 일들을 하나의 역사로 인식하기 보다는 그것보다는 가벼운 의미의 '사건'으로 보는 시선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 다수에게 인정받고 평가받기 위해서는 더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인지하며 기억하려고 하는 노력과 작업은 필요해 보인다. 지금과 앞으로의 글들은 이 생각의 실현이라고 보면 된다.




민주주의란 우리가 서로 죽이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체제다. 
-아담 셰보르스키-


헌법에 자유, 인권, 평등, 민주주의를 세기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피땀을 흘렸고, 결국 87년에 이를 이뤄냄으로써 어엿한 민주국가가 됐다. 독재에서 민주화로 이행되기 위해서 아닌 경우도 물론 있지만, 대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각오하며 독재와 맞서 싸웠고, 우리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신념과 의지로 가득찬 사람들이 죽음을 감수하겠다는 각오가 '독재에서 민주화로'라는 사회 발전의 동력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다르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총과 칼을 버리고 말로 싸운다는 확신을 동력으로 발전한다. 87년 이후는 '말로 싸우는' 논쟁의 역사로 시대가 바뀐 것이다.


그러나 독재정권의 연장선에 있던 노태우 후보가 87년 직선제 개헌으로 당선되면서 87년 전과 동일한 성격의 민주화 운동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새로운 시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일들은 한 시대가 다른 시대로 옮겨가는 어간에서 나타난 일쯤으로 바라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대표적인 것이 1991년 ‘강경대 치사사건’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다.     


1991년 4월26일, 명지대 학생들은 대학 측의 일방적인 등록금 인상에 반대해 시위를 벌였다. 500명 남짓한 대학생들이 벌이는 시위에 전투경찰 10개 중대 1200여명과 ‘백골단’으로 불리는 사복검거조가 시위 진압을 위해 투입됐다.   

  

쏟아지는 최루탄 속에서 학생들은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맞서다 경찰에 밀려 학교로 도망쳤다. 경찰들은 진압봉과 쇠파이프를 마구잡이로 휘둘렀고 여기에 학생 한 명이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는데도 경찰들은 이 학생을 군홧발로 짓밟고 걷어찼다. 이 학생은 이 자리에서 숨졌다.


그가 바로 명지대 경제학과 1학년 강경대군이다.     


문제의 시작은 등록금 인상이었다. 그해 2월 명지대는 일방적으로 올린 등록금 내역을 학생들에게 고지했고, 학생회는 곧바로 등록 연기를 결의하고 대화를 요구했지만 학교는 학생들과의 만남을 거부했다. 학생들은 총장실을 점거하고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이들의 요구사항은 재단전입금 확충과 민주적 등록금 책정 등 크게 두 가지였다.    


그해 4월3일 명지대생 500여명은 교내 민주계단에 모여 삭발식을 열고 혈서투쟁에 돌입했다. 하지만 학교가 내놓은 답변은 ‘추가등록기간 공고 및 미등록 학생 제적통보’뿐이었다.    


경찰은 4월24일 상명여대(현 상명대)의 학원자주화 집회에서 지지·연대연설을 마치고 돌아오던 명지대 총학생회장 박광철씨를 연행했다. 분노한 명지대생들은 서울 서부경찰서 형사과장을 납치해 총학생회장과 맞바꿀 것을 요구했다. 경찰은 강경진압으로 나왔고, 강군은 이 대치과정에서 숨진 것이다. 그의 사망 이후 87년 전과 동일한 ‘분신·투신 정국’이 전개됐다.


4월 29일에는 전남대생 박승희씨가 ‘강경대 치사사건 규탄과 공안통치 분쇄를 위한 범국민대회’ 참가 도중 분신했는데, 그가 남긴 유서는 민주화를 이뤘다고 평가하는 87년 이후의 사회가 실제로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음을 보여준다.     

정권타도에 함께 힘썼으면 하는 마음에 과감히 떠납니다. 불감증 시대라고 하는 지금 명지대 학우의 슬픔과 연민을 가지다 다시 제자리로 안주해 커피나 콜라를 마시는 학우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후 분신은 계속되었다. 5월1일에는 안동대생 김영균씨가 ‘살인정권 노태우는 물러가라’며 목숨을 끊었고, 이틀 뒤인 5월3일 ‘노태우 정권 타도 결의대회’ 도중 경원대생 천세용씨가 몸에 불을 붙인 채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투쟁의 구호가 ‘강경대 치사사건 규탄’에서 ‘살인독재정권 퇴진’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5월8일엔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씨가 서강대 옥상에서 유서를 남긴 뒤 분신하는데, 이 때 남겨진 유서는 이후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으로 비화한다.    


김기설씨가 분신한 날 박홍 서강대 총장이 “배후가 있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나서자 검찰이 즉각 배후세력·자살방조 의혹 수사에 착수했다. 이 때 검찰은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의 총무부장이었던 강기훈씨를 배후로 지목하고 유서대필 등에 따른 자살방조 혐의로 수사에 열을 올렸다.


강기훈씨가 검찰에 출두하고 취조를 받을 때의 일이다. 당시 신상규 주임검사는 맥주를 창틀에 깔아놓고 취조를 했는데 취기가 오르면 주먹으로 때렸다고 한다. 남기춘 검사는 “이 빨갱이 새끼야, 내가 거꾸로 매달아 취조하면 3시간이면 끝난다”고 협박했고, 신참 수사검사였던 곽상도는 잠을 못 자게 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는 검사가 책상에 불탄 주검 사진을 쫙 깔았다. “네가 죽인 김기설 사진이야. 똑바로 봐”라고 다그쳤다. 그러고선 20여 일 동안 내내 내장탕을 시켜줬다고 한다. 이때부터 강기훈씨는  내장탕을 입에 대지 않은 것이다.


그 당시 법무부 장관은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였고, 당시 수사를 지휘했던 강신욱 서울지검 강력부장은 퇴임까지 승승장구하다 2007년 박근혜 캠프에서 법률지원특보단장까지 역임했다. 신상규 당시 주임검사는 2009년 광주고검장으로 퇴임했고, 남기춘 검사는 2011년 서울서부지검장으로 퇴임후, 2012년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회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곽상도 검사는 2013년 박근혜 정부에서 민정수석을 역임했고 현재는 새누리당 국회의원이다.


수사의 핵심은 '필적 감정'이었다. 유서에 쓰인 글씨체가 강기훈씨의 것인가가 전체 수사를 좌우하기에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에 온 국민의 이목이 집중됐다. 이 감정 결과로 국가가 옳았음을 증명해야 했던 정부도 여기에 온 신경을 기울이는 듯했다. 


첫 문제제기는 문화방송에서 나왔다. 한 사설 감정원의 원장이 소송 관계자의 부탁으로 국과수에 돈을 건내고 중간에서 소개비를 챙기는 역할을 해온 것을 포착한 것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문화방송은 자신들이 또 다른 소송 관계자인 것처럼 꾸며서 이 사설 감정원에게 허위 감정을 부탁했다. 그러자 이 원장은 호기롭게 자신만 믿으라며 그 자리에서 전화까지 걸어 확인시켜 줬다. 


다른 여러 사설 감정원들도 역시 국가수에 줄을 대서 국과수의 감정 결과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됐다. 그리고 이 원장을 비롯한 일부 사설 감정인들이 부탁을 받고 소송 의뢰인들에게 유리한 감정을 해준 대표적 인물로 김기설씨의 유서가 본인의 필적이 아닌 강기훈씨의 것이라는 감정서를 재판부에 제출해 유죄 판결에 영향을 미친 국과수 간부였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국가수 감정의 신뢰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은 92년 살인방조 혐의로 기소된 강기훈씨에 대해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6월의 유죄를 확정했다. ‘노태우 정권과 검찰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강씨 측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15년의 세월이 흐른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김기설씨가 직접 유서를 작성했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재감정 결과를 토대로 재심을 권고했고, 강기훈씨는 2008년 1월 재심을 청구했다.


그리고 2009년 9월 서울고법은 강기훈씨의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지만 대법원은 2012년 10월 무려 3년 만에 강씨에 대한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그리고 2015년 5월 대법원은 재심 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강기훈씨는 대변인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사법적 판단은 끝났습니다. 이제 역사적 판단과 책임이 필요한 때가 되었습니다. 당시 수사했던 검사들과 검찰 조직, 법원은 지금이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여야 합니다. 스스로 책임지지 않는다면 그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변호인단을 통해 강기훈씨가 전한 말-

*수사 과정 중에 있었던 일화는 한겨레 21의 <강기훈, 그의 치유는 이제 시작이다.>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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