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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교진 Nov 16. 2016

1992년 인공기가 대학 중심에 꽂혔다.

#2. 1987년 이후의 의미

91년 5월 격동의 시기를 보낸 후 정권 퇴진을 외치는 학생 운동은 사그라드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다 1992년 5월, 인공기가 대학가에 등장하는 일이 발생했다. 인공기는 북한의 국기로, 부산경남총학생회연합과 광주전남총학생회연합의 출범전야제에서 처음 등장했고 삽시간에 서울까지 올라와 건국대에도 걸렸다. 당시 학생들은 인공기만 내건 것이 아니라 인공기와 함께 전대협기, 태극기 그리고 남북한 단일기를 함께 내걸었다.


1991년에 남북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고 남북합의서가 발효되면서 남북화해분위기가 고조됐었다. 학생들은 이런 분위기에서 인공기 게양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봤고, 한 발 더 나아가 국가보안법이 남북화해분위기를 저해하고 있다는 주장까지 함께 펼쳤다.


이 일에 대해 언론과 정치권은 인공기 게양의 취지보다 인공기가  사실 그 자체에 더 집중했다. 언론의 편향적 보도에 정부가 편승하면서 이 일은 오히려 국가보안법을 강화하는 계기로 활용됐다.


이에 대한 사회의 반응은 세대에 따라  갈렸다. 당시의 여론 조사를 보면, 대체적으로 젊은 세대들은 이게 그렇게까지 문제가 될 게 아니라고 봤고, 기성세대는 인공기게양은 도를 지나쳤다고 바라본 것. 무엇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이 일에 대한 반응이 갈렸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부정적으로 흘러갔다. 인공기 게양 사건에서 학생운동의 성격에 대한 의구심과 과격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인공기 계양과 관련해서 수배 중이던 학생회장이 검거되자 목포대 학생들은 즉각적인 행동에 나섰는데 이 행동이 좀 과격했다. 학생들은 화염병과 돌멩이를 던지고 쇠 파이프를 휘두르면서 경찰관 6명을 교내로 납치했다가 풀어줬다. 그리고 경찰관이 공포탄과 실탄을 쏘며 저지하자 이에 대항하는 차원에서 소총과 권총 일부를 탈취했다 반환하기도 했다. 이날 학생들의 기습으로 전남 무안 청계지서 소속 경찰관 7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파출소 내부가 크게 부서졌다.


결국 전대협은 인공기 게양은 정당하지만, 국민의 관심이 인공기 게양으로 인한 국가보안법 폐지라는 자신들의 취지보다는 인공기 게양 그 자체에만 관심이 쏠리고 있어 인공기 게양을 잠정 보류하기로 했다. 그리고 인공기를 게양한 목포대 총학생회장과 건국대 생은 국가안보법위반죄를 적용받아 실형을 선고받았고 그 외에도 숭실대, 경기대, 성균관대 등 인공기 게양과 관련한 대학과 학생들 역시 조사를 받고 실형을 선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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