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 일지(2)
누군가를 판단할 때, 사람들은 빠르게 의미를 부여하려 든다. 낯선 이를 몇 초 만에 평가하고, 그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입혀야 안심이 되는 심리. 심리학에서는 이를 ‘휴리스틱(heuristic)’이라 부른다. 정보가 부족할수록 우리는 익숙한 틀로 사람을 해석하려 하고, 그 틀에 맞지 않는 요소는 무시하거나 지워버린다. ‘장애인’이라는 단어는 그런 점에서 참으로 강력한 프레임이다. 삶의 복잡성과 다층적인 맥락은 쉽게 무시된 채, 우리는 몇 가지 이미지로 사람을 납작하게 읽는다.
가령, 길을 걷다 마주치는 휠체어를 탄 누군가에게 사람들은 자동으로 다음의 감정을 투사한다. “불쌍하다”, “저렇게도 사는구나”, “대단하다”. 그 감정들은 처음엔 무해해 보이지만, 곧 타인의 삶을 해석하고 소비하려는 욕망으로 변한다. “힘내세요”라는 말 뒤에는 ‘나는 당신보다 낫다’는 안도감이 숨어 있기도 하다. 그렇게 사회는 사람을 ‘이해된 존재’로 만들고 안심한다. 나는 바로 그 ‘이해’라는 이름의 얕은 동의에서 벗어나고 싶다. 나를 그저, 있는 그대로 두는 시선으로부터 시작되는 해방을 꿈꾼다.
내가 겪어온 어떤 순간들은 오히려 내 존재를 흐리게 만들었다. 지하철에서 어르신이 내 손에 억지로 쥐여준 만 원짜리 지폐. “불쌍해서 그래”라는 말과 함께. 교회 앞에서 낯선 이가 다가와 “하나님 믿으면 병 나을 수 있다”라고 속삭일 때. “괜찮아, 너는 안 해도 돼”라는 말로 내가 충분히 할 수 있었던 자리에서 조용히 밀려난 일들. 그런 순간마다 나는 이 세상이 미리 짜둔 서사의 무대에 나도 모르게 서 있는 기분이었다. 단 한 번도 요청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이해받는 역할’을 맡게 되는 무대 위에서.
이제 나는 그 무대에서 내려오고 싶다. 말로만 고귀한 역할이 아니라, 내 삶의 주인으로 서고 싶다. 사람들은 종종 “좋은 뜻이었다”라고 말한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이었을 뿐”이라고. 하지만 진심이 모든 상처를 덮을 수는 없다. 어떤 말은 그 의도와 상관없이 누군가를 밀어낸다. 때때로 ‘착함’은 배제의 다른 이름이 된다. 그 자리를 채운 건 나를 향한 애정이 아니라, 타인의 도덕적 안도감이었다. 나는 그런 말들에서, 선의로 포장된 무심한 친절들에서 천천히 멀어지고 싶다.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한 것은, 그런 시선들에 반복적으로 노출될수록 내가 나를 바라보는 눈조차 흐려졌다는 점이다. 나도 모르게 내가 ‘불쌍해 보여야 의미가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내 감정을 표현할 때조차, ‘지금 이 말을 해도 괜찮을까’ 스스로를 검열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예민하게 굴지 말라”라고 말하지만, 진짜 예민한 건 나보다 세상인지도 모른다. 내가 느낀 불편을 견디지 못해, 그것을 없던 일처럼 만들려 드는 그 태도가.
그래서 나는 이제, 타인의 선의에 무작정 기대지 않기로 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느끼는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는 내가 말할 때 시작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내 삶은 요약되거나 정리되지 않아도 좋다. 엉켜 있어도, 설명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를 향해 쉽게 말을 던지기보다는, 그 사람이 들려줄 말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안의 해방은, 타인을 해방시키는 시선으로 이어져야 하니까.
나는 ‘이해’라는 이름으로 나를 단순화하려는 시선에서 해방되고 싶다. 아니, 되어야 한다. 동정이든, 찬사든, 배려든, 그 무엇이든 나를 하나의 이야기로 줄이려는 모든 방식에서. 나는 감동이 되고 싶지 않다. 교훈이 되고 싶지도 않다. 그저, 나로 살아가고 싶다. 이 해방이 어렵고도 먼 길이지만, 그 길의 시작은 늘 같다. 누군가를 규정하기 전에 기다리는 것. 내가 말하기 전에는 나를 해석하지 않는 것.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서로를 놓아주며, 입체적인 사람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제 글을 찾아와 주시고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모두가 누군가가 규정해 주는 어떤 사람이 아닌
내가 나이어도 충분히 존중받는 세상을 꿈꿔 봅니다.
매주 화요일, 마음속 위로가 필요한 분들에게 글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