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이거 할머니가 만드신 거예요?
며칠 전, 오랜만에 시장 거리에서 밥을 먹었다. 볼 일이 있어 나갔다가 작은 시장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날씨가 제법 쌀쌀하여 뜨끈한 칼국수가 당겼다. 전에 한 번 들렀던 가게에 가서 얼른 주문했다. 들깨가 잔뜩 들어간 고소한 칼국수였다. 한 그릇 시켜놓고는 파랗고 동그란 테이블에 앉아 호호 불어가며 든든히 배를 채웠다.
기분 좋은 느낌을 가지고 이제 막 시장 어귀를 빠져나오다가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나의 걸음을 멈춰 세운 것은 다름 아닌 식혜였다. 커다란 박스에 얼음이 잔뜩 담겨 있었고, 그 속에 빈 PT에 담긴 식혜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뜨끈한 것을 먹어서였을까? 후식으로 그 시원한 식혜를 한 잔 들이켜면 금상첨화 일 것 같았다.
난 어쩌다 한 번 시장에 들를 일이 있으면 종종 식혜를 사 먹는다. 이것이 버릇이 되어서인가? 상대적으로 물가가 비싼 대형 마트에서는 식혜를 사진 않는다. 비싼 이유도 있고 왠지 이런 전통 음식은 시장에서 사는 게 맛에 있어서 더 신뢰가 간달까?
모름지기 이런 핸드 메이드는 신뢰할만하다. 아무 라벨이 붙지 않은 병에 담긴 식혜가 그날따라 더 맛있어 보였다. 난 그 가게 앞에서 5초 정도 고민한 후 식혜를 사기로 마음먹었다. 사장님을 부르자 가게 안쪽에서 찬찬히 걸어 나오셨다. 세월의 무게를 견뎌, 굽은 등을 지닌 할머니였다. 난 속으로 외쳤다. '이 식혜 맛있겠다'
"할머니, 이거 할머니가 만드신 거예요?"
(너무 신이 난 나머지 할머니께 아주 발랄하게 물었다.
이렇게 싹싹한 면이 내게 있었나 싶을 정도의 말투였다.)
(곧이어 내 질문에 할머니는 아주 자신 있게 대답하셨다.)
"응 그럼! 내가 직접 다 만들었지"
(할머니도 내심 기분이 좋아 보였다.)
"큰 거 줄까? 작은 거 줄까?"
(이 분위기라면 난 무조건 큰 PT병을 사야 한다.)
"큰 거 주세요"
"응 4천 원"
(난 생각보다 싼 가격에 놀랐다. 아, 그렇다고 맛을 의심하진 않았다.)
할머니는 주위를 슬쩍 보시고는 검은 비닐봉지에 작은 PT병 2개를 더 넣어 주셨다. 나와 함께 간 일행이랑 둘이 같이 먹으라고 2개를 넣어 주신 거다. 서비스인 걸 눈치챈 나는 너무 감사해서 고조된 어조로 "아고~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할머니는 날 제지하며 제스처와 함께 "쉿"이라고 하셨다. 그 뜻은 '너한테만 특별히 주는 거야'라는 것이다.
시장은 이런 맛이 있다. 단순히 가격이 저렴한 것이 고유의 매력만은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오고 가는 따뜻함. 이걸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情)이라고 한다. 그 정감이 하루를 채워주기도 한다. 마치 그날 내가 하루종일 충만한 기분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내가 가득 채워진 느낌을 받았던 이유는 뭐였을까?
아주 잠깐이지만, 그 몇 마디의 대화 속에서 할머니와 나는 서로의 인생에 잠깐 머물렀던 것 같다. 난 그 식혜를 보며 할머니의 일상을 잠깐 상상해 보았다. 아마 할머니는 그 식혜들을 대용량으로 만들기 위해 밤낮없이 정성스레 들여다보고 계셨을 거다. 그 고단한 과정이 엿보여 유독 시장의 식혜가 더 맛있게 느껴지는 듯하다.
어쩌면 그 작은 두 병은 나에게만 주신 게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난 진심이 보였다. 자신의 손에서 탄생한 이 귀한 식혜를 가치 있게 알아봐 주는 이에 대한 고마움을 말이다. 그런 보이지 않는 진심이 통할 수 있는 여유가 시장에는 있다.
물론 대형 마트에서도 식혜를 살 수 있다. 깔끔한 라벨이 붙어 있고, 정확한 유통기한이 적혀 있으며, 대량 생산된 제품이라 언제든 쉽게 구할 수 있다. 어쩌면 맛의 균형이 더 완벽하게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거기엔 이 작은 시장 가게에서 느꼈던 온기는 없다.
마트에서는 바코드를 찍고 계산대에서 물건을 건네받지만, 시장에서는 사람의 손에서 손으로 전해진다.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거래가 아니라, 짧지만 따뜻한 대화와 눈 맞춤이 오간다. 그리고 서로의 마음을 만진다. 그 차이가, 그날 내 하루를 더 특별하게 만든 건 아닐까?
집으로 돌아와 식혜 병을 열었을 때, 나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할머니의 정성과 따뜻함을 함께 마시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맛은, 대형 마트의 제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고도 달콤했다.
앞으로도 난 이런 사람이 되길 힘써야겠다. 결과 이면에 있는 과정과 수고를 보는 사람. 그 애씀을 헤아려 주는 사람. 겉모습의 화려함에 현혹되지 않는 사람 말이다. 작은 관심이 내게 더 큰 정으로 돌아온 오늘을 기억하며 그렇게 살아가야겠다.
오늘도 제 글을 읽는 데에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삭막한 하루로 고단한 하루를 보내신 분들이 계시다면,
이 글이 따스히 그대의 마음을 녹여주길 기도해 봅니다.
매주 금요일, 기억이 추억으로 덧입혀지는 시간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