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짜에서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주인공 고니가 돈을 다 잃고 눈이 뒤집어져 도박장에서 흉기를 휘두르며 난동을 피우는 장면이다.
고니는 그 일로 평경장(향후 고니의 스승)의 눈에 띄게 된다.
난동을 부렸다는 이유로 고니는 그 사회에서 매장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도박 세계에서 더 잘 나가게 되지.
영화니까.
그러나 우리가 사는 현실은 다르다.
우리가 속한 환경 가운데서 고니처럼 난동 부리면 큰일 난다.
그 장면을 좋아했던 이유도 한번 그렇게 난동을 피워보고 싶어서였을까.
사람마다 다르지만
다 뒤집어엎어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무엇하나 뜻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그게 계속 이어질 때.
예상치 못한 문젯거리들이 연이어 쏟아질 때.
산 하나 정말 간신히 넘어왔는데 더 큰 산이 앞에 보일 때.
인격적으로 모욕을, 모독을 받는데 그것이 지속적일 때.
앞으로 어떻게 해나갈지 실마리도 보이지 않을 때.
응당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을 볼 때. 그런데 그 사람은 남 탓만 하고 있을 때.
거짓이, 기만이 난무하는 것을 볼 때.
지쳤을 때.
이건 과하다고 여겨질 때.
가망이 안 보일 때.
등등.
다 뒤집어엎어 버리고 싶어진다.
그럴 때 사람마다 행동하는 양식이 다른 것을 보게 된다.
혈기가 왕성한 사람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말 그대로 ‘개판’을 만들어 버리고
소극적인 사람은 내팽개치고 도망쳐버리며
냉소적이고 조용한 사람은 타인의 눈에 보이지 않게 개판을 만들거나
아니면 이건 정말 위험한데, 정말 ‘다 죽여버리는’ 방향으로 가거나.
또한, 표현이 외적으로 가게 되는 사람은 환경과 타인을 무너뜨리게 되지만(이미 자신은 뒤집어진 상태)
내적인 욕구가 표출되지 못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로그아웃’하는 방향으로 가게 된다.
어떤 방향이 됐든지 간에 뒤집어엎어 버리는 것은 결과가 슬프다.
너무 슬프고 추악하고 고통스럽고 음울하다.
그런 경험을 여러 번 했던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러면서도 어디서 어떻게든 살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런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영화 ‘시베리아의 이발사’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사관생도였는데, 질투와 혈기로 장군을 폭행한다. 그러고선 그의 ‘사회적 평판’은 완전 끝장이 나게 된다.
뒤집어엎어 버리는 경험이 한 번이건, 여러 번이건
웬만하면, 아니 될 수 있으면, 아니 제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렇다면 다 뒤집어엎어 버리고 싶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럴 수도 있지’하는 것이다.
일단은 그렇게 그 순간을 넘기는 것이다. 이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일단 하는 거다.
안 그러면 터져 버릴 수 있으니까.
터지고 나면 돌이키기가 매우 어렵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하고 생각하는 것과 ‘그럴 수 있지’하는 것은 정말 큰 차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로 시작하는 생각은 무한한 비난으로 뻗쳐 나갈 수 있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가져오며 ‘이렇게 했어도 됐는데 왜 못했어.’ 하며, 대상이 타인이든 자신이든 쏘아붙이는.
필자는 욕심이 많고 혈기가 있는 사람으로 때때로 충동적일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그럴 수도 있지’하고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마치 스팀으로 꽉 찬 압력솥의 바람을 빼주듯이
터지는 것을 일단, 방지하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거다. 정말.
숨 쉬는 그것만으로도 좋다. 호흡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숨 안 쉬면 죽는다.
그러고서는 내 손을 바라본다.
손가락이 10개 있음에 감사한다.(만약 손가락이 적다면 손이 있다는 것에, 손도 없다면 살아 있음을, 숨 쉬고 있음을 감사한다.)
그리고 그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아주 집중해서 하는 거다.
정리하는 것을 추천한다. (조던 피터슨 교수의 말처럼)
책상이든, 침대든, 부엌이든 최선을 다해서 물건들 하나하나 오밀조밀 살펴보며
정리의 순간에 온통 빠져드는 것이다.
‘지금 내 생각은 나에게 도움이 못 된다.’라는 마음을 안고서.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다 보면 음식을 먹을 때가 되고
음식을 먹고 산책하러 나가는 거다.
산책하러 나가서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이 어둡다면 조명 빛을 받는 동네를 구경하고
나의 주변 환경이 어떻게 생겼나 하나하나 들여다보면서
내가 이 모든 일상과 일상의 배경을 유지하고 있는 그것이 아니라 유지 받는 것을 확인해 보는 거다.
이렇게 하는 것은 생각에 피동적으로 끌려다니는 나 자신이 생각에서 놓일 수 있도록
능동적인 행동으로 잠깐의 자유를 찾는 것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 악이 있다.
첫째는 나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상대방이 악하게 느껴지는 ‘상대적인 악’이다.
예로 우리 동네가 집들이 낮은 마을인데, 우리 집 앞에 새집이 용적률을 높게 승인받아 우리 집의 조망과 채광을 가려버리면 우리는 앞집을 나쁘게 느끼게 된다.
둘째는 깊은 기준에 비추어 볼 때의 ‘선을 넘어가는 악함’이다.
정말 악한 것은 항상 좋은 것들을 빙자하여 발생한 것들이다.
돈은 쓸모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가지고 사람 바보 만들고 사람 인생 망치는 거 쉽다.
기술은 유용한 것이지만 그 기술이 편을 가르고 무력을 행사하는 데 쓰일 수 있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보배로운 것이나, 아름다움을 지닌 사람을 무너뜨리거나
혹은 그 아름다움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본떠 기묘한 것을 만들 수 있다.
사랑은 이 모든 것 중에 가장 제일 되는 것인데, 사랑이 변색 되면 사람이 죽을 수 있다.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면 첫째 예시의 악함과 둘째 예시의 악함이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상대방이 의도한 것은 아닌데, 상대방이 악하게 보이는 때가 있고
상대방이 정말 악한 때가 있다(이때도 악한 사람은 본인이 악한지 모른다.
알고도 행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은 정말…. 아주 큰 도움이 필요하다 정말 불행한 사람이다)
우리 내면 깊은 곳에도 깊은 기준이 있기 때문에 세상의 부조리하고 악한 것들이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도덕책에서 온 것이 아니고, 헌법에서 온 것도 아니다.
법이 만들어지기 전, 법을 만들어낸 영역에서 온 것이다.
그 깊은 기준이 우리 안에 있기까지,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 기준이 자리하기까지 그 일을 행한 ‘능력’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안다면,
언어로 만든 법, 눈으로 보이는 물리적인 세상보다 더 깊거나 더 높은 차원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래서 지금 당장 잘못된 것들에 대한 재판과 심의와 판결과 집행이 불과 몇십 년밖에 되지 않는 짧은 인생 가운데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를 하나의 선이라고 볼 때 점 하나밖에 되지 않는 그 찰나의 순간 안의 집행이 아닌, 선을 넘어 면을, 면을 넘어, 도형을, 도형을 넘어 여러 도형을, 그리고 그 이상의 차원까지 점들로 채워가야만 하는 시간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영원’이 도래할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 자신도 조심하게 되고,
악을 행하는 그 사람도 불쌍해지게 된다.
누군가가 정의에 의하여 조정을 받고 값을 치르고 의로워지기를 바랄 때까지
나 자신이 깊은 기준에 의하여 변화되지 않으면
나는 영원토록 무언가를 엎어버리고 싶은 존재로 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