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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번역하다
by 황석희 Jun 24. 2017

게으름뱅이의 버킷리스트

히스 레저처럼은 아니더라도

"한 주에 정말 하고 싶은 일 한 가지를 완료할 것."


아무 생각 없이 일만 하며 지내다 보니 "일-무한도전-일-무한도전"의 무한반복이다. 한 주가 나도 모르게 가 버린다. 정신 차리면 벌써 다음 주 무한도전 방영일. 왜 하필 무한도전이냐면 한 주 동안 꼭 시간 맞춰 하는 행동이 무한도전 시청밖에 없기 때문이다. 출퇴근이 없으니 정해진 시간에 하는 뭔가가 없다. 24시간이 작업이고 휴식이다. 넋 놓고 일만 하며 지내다가 또 무한도전 방영일이 돌아오면 난 대체 이번 주엔 뭘 했나 싶은 자괴감이 들 때가 있다.


물론 좋은 작품들을 만나 사전 조사를 하고 여러 사람들과 소통하며 번역의 방향을 찾고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며 즐겁게 작업을 했지만 정작 나만을 위해서 한 행동은 뭐가 있나 싶은 자괴감. 그래서 난데없이 선언하듯 작심한 게 "한 주에 정말 하고 싶은 일 한 가지를 완료할 것"이다.


고등학생 시절 내 학습 목표엔 "하루에 영어 단어 2개를 외울 것"이 있었다. 10개도 20개도 아니고 2개. 암기력이 엉망인 덕분에 지금도 수준급 길치인 나는 어려서부터 내 약점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래서 하루에 영어 단어 10개는 애초에 불가능한 목표였고 2개만 확실히 외우자는 거였다. 1년에 730개, 3년에 무려 2,190개라는 계산이 나온다. 실제로 얼마나 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영어 성적에 상당한 도움을 준 것은 확실하다. 전체적으로 엉망진창인 성적에서 영어 과목은 멀쩡한 수준을 유지했으니까. 나 같은 부류의 인간에겐 단기적이고 집중적인 목표가 효율적이다.




최근에 작업했던 히스 레저의 다큐멘터리 <아이 엠 히스 레저>를 보면 히스 레저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던 사람이었고 머릿속에 스파크가 튀면 새벽 2시든 4시든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디어를 쏟아냈다고 한다. 내일 아침에 이야기하자고 하면 아침 먹을 시간도 되기 전에 집으로 처들어오던 행동파. 그렇게 활동적이었으니 연기도 하고, 음악도 하고, 연출도 하고, 촬영도 했겠지.


온갖 예술 분야에 두루두루 관심이 많고 욕심도 많고 아이디어도 많고. 여기까지는 나도 히스 레저와 비슷한 점이 많다. 히스 레저와 달리 게을러 터진 몽상가라는 것만 빼면. 히스 레저는 그 많은 열정을 세상에 한꺼번에 쏟아내고 떠난 사람이지만 나는 아주 천천히 하나하나 조심스레 꺼내놓으면서 오래오래 살 생각이다.


당장 다음 주 목표는 집에서 좋은 대우도 못 받고 몇 년째 쭈그러져 있는 내 기타 세 대를 짊어지고 서울 기타샵에 나가 셋업을 받는 거다. 이렇게 소소하지만 말만 하고 못 하던 것들을 해보려는 거다. 한 주에 하나씩만 해도 한 달에 4개, 1년에 대략 50개. 범위를 넓히자면 1년 단위로 이것보다 조금 더 굵직한 일을 하나씩 지정하는 것도 좋겠다. 그러면 죽을 때까지 20개 이상은 완료하지 않을까. 나 같은 게으름뱅이는 버킷리스트 20개를 적어 봐야 하나도 완료하지 못하고 죽을 가능성이 크다. 하나씩 하나씩 그때그때 설정하고 각개격파해야지.


정말 하고 싶지만 못 하고 있던 게 기타 셋업이라니 처량하긴 하지만 완료할 생각에 들뜬다. RPG 게임의 퀘스트 하나를 완료하는 것처럼.

magazine 세상을 번역하다
영화번역가, 버스커,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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