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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리산책 Sep 15. 2020

몰라도 너무 모르는 엄마의 고백

대성통곡하던 그 밤의 약속

우리 집에는 열여섯 살, 열네 살 딸 둘이 있다. 남들 눈에는 자기 일들 알아서 하고 이런저런 도전도 할 줄 아는 별 나무랄 데 없는 아이들이지만 나이가 나이들인지라 집안이 그리 조용하지만은 않다. 세상 둘도 없는 베프처럼 굴다가 한 번씩 사소한 언쟁에서 시작해 최근에 배운 복싱 기술까지 오고 가게 되는 날도 생겼다.
고백하자면, 서로 싸울 에너지가 있다는 사실이 고맙게 느껴지는 날도 있었다. 무기력이 우리 아이들을 잠식하고, 그걸 지켜보면서 나 역시 한없이 어둡고 유약해지던 그런 시기를 겪어본 사람은 안다. '차라리 이렇게라도 발산을 하렴.'



8년 전쯤 된 일이다. 우리 세 모녀는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가 서로 부둥켜안고 대성통곡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난 '엄마의 자격' 내지는 '엄마의 조건'에 대해 고민을 하는 중이었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학부모를 위한 오픈 클래스가 있던 날, 난 너무 속이 상해 집에 돌아오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유치원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활발하고 잘 웃던 아이가 딴 사람이 되어 교실에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수업 시간 내내 손 한번 제대로 들지도 못하고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거리고 있던 딸아이의 모습. 자기표현 강하고 적극적인 중국 아이들 틈 속에서 그 모습은 유난히 더 눈에 띄었다.

둘째 아이의 유치원 생활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아침마다 유치원 가기 싫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더니 어느 순간 잠잠해졌다. 적응을 했나 싶어 안심하던 터에 유치원 선생님의 장문의 편지를 받고 나서야 사태를 파악했다.
둘째 아이는 유치원 생활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하고도 어울리지 않았다. 심지어 점심시간에는 자기 자리를 두고도 아이들과 떨어져 멀찌감치 혼자 앉아 먹는다고 했다.
선생님들도 더 이상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했다.


“왜 그랬니?”하고 물었더니 둘째 아이의 대답은 “나는 한국 사람인데 왜 중국 유치원에 다녀? 왜 중국에 살아? 아이들이 나보고 한국에 가래”였다. 겉으로는 평온한 날들이지만 아이들은 매일매일 전쟁같은 날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일까. 아이들의 상처를 어떻게 보듬어줘야 하나. 무슨 말을 해줘야 하나. 나는 정말로 엄마의 자격이 없나 보다.'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심란한 마음으로 같이 누워있던 그날 밤 나는 나의 이런 심정을 솔직히 이야기했다.


“엄마가 많이 부족해. 잘하고 싶은데 사실 모르는 게 많거든. 너희들이 중국 생활하면서 그렇게까지 힘든 줄도 모르고. 엄마 바보 같다.  많이 도와줘야 하는데 엄마도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니까...정말 미안해. 그래도 앞으로는 속상하고 힘든 일이 있으면 꼭 같이 이야기하기로 하자.”


둘째 아이가 ‘으앙’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 좋은 엄마야~ 좋은 엄마야~ ”하면서 나를 꼭 안는다. 큰 아이는 소리없이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이렇게 여리고 어린아이들에게 중국어를 배워야 한다고, 중국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이유로 가슴에 멍이 들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나의 이기심이 오히려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과 반성, 눈물로 얼룩진 밤이었다.
그날 우리 셋은 가장 친한 친구가 되자고 약속을 했다. 즐거운 일은 물론이고 속상한 일이나 고민이 있으면 꼭 함께 이야기하자고 했다.


시간이 흘러 그날 밤의 눈물도 약속도 희미해졌다. 하지만 그때의 고민은 아직까지도 나의 육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페이지로 남아 있다.
‘어쩌다 엄마’가 되어 매사가 어리둥절한 나는 그냥 아이들과 같이 우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잘 적응해갔다. 큰 아이는 친구들의 인기를 얻어 그 초등학교 한국 학생 중 처음으로 전교 학생회장으로 뽑혔다. 둘째 아이는 쉬는 시간 틈틈이 선생님들께 한국어를 가르쳐서 꼬마 한국어 선생님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며칠 전 둘째 아이에게 유치원 시절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자발적 아싸(아웃사이더)의 기억은 없단다. 자기가 그랬냐며 배시시 웃는다. 오히려 중국 유치원을 다녔던 것을 잘한 것 같다고 해서 의외였다. 그때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 지금 도움이 많이 된다고 했다.

상하이 생활 10년, 우리의 우여곡절 적응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중국에 있을지 모르니, 어쩌면 이제 겨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아이들과 함께 울며 보낸 시간만큼 조금의 여유와 자신감을 얻었다. 40도를 오르내리는 상하이 불볕더위도 이제는 익숙해졌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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