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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리산책 Apr 09. 2021

우리도 한 번 짠내투어

여행의 추억


 

 햇살이 속절없이 좋기만 하다. 자기 방이 가장 좋을 사춘기 아이들 입에서조차 여행 가고 싶다는 말이 나올 정도니 말이다. 여행이 자유롭지 않은   년이 지났다. 아이러니하게도 여행을   없으니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여행에 관한 정보를 뒤적인다. 평소 좋아하는 시인이  여행 에세이 시리즈를 읽고, 설렘과 들뜬 공기를 담고 있는 이국적인 사진들을 한참 들여다보며  여행을 생각한다.  

 


중국에서 우리 가족의 주 여행 수단은 기차였다. 가오티에(高铁)나 동처(动车)를 타고 수십 곳의 도시를 방문했다. 중국에서 운전면허와 차가 없던 시절에 오히려 더 부지런하게 중국 곳곳을 다녔다. 무엇보다 가오티에의 실내가 기대 이상으로 쾌적하고 이동속도도 빠르기 때문에 가능했다.  상하이에서 베이징까지 불과 4시간 30분밖에 걸리지 않으니 말이다.  

 


남편의 베이징 출장길에 온 가족이 따라나선 적이 있었다. 남편은 회의로 바쁠 것이고 어차피 나와 아이들과의 여행이 될 터였다. 책임감과 부담감에 선뜻 나서길 주저하자, 딸들이 내게 내민 카드는 자신들이 설계하는 ‘짠내 투어’였다. 공평하게 하루씩 맡기로 했다. 아이들은 틈날 때마다 바이두와 네이버 검색을 통해서 여행 정보를 알아내고, 지도를 보고 동선을 짜고, 가성비를 따지며 신중하게 맛집을 골랐다. 나는 만리장성으로 공략하기로 했다. 내게는 친절한 씨트립 앱이 있었고, 몇 분만에 저렴한 비용으로 씨트립에 하루를 맡기기로 결정했다.  

 

첫날 투어는 설계자인 나조차 후회했던 리얼 고생 짠내투어였다. 출발은 산뜻했다. 전날 저녁 호텔에 신청해 놓은 조식 도시락을 야무지게 챙겨 들고 씨트립이 호텔까지 보낸 준 차를 타고 집결지에 도착했다. 가이드의 지치지 않는 훈화 말씀을 들으며 관광버스로 한 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만리장성 팔달령에는 생각지도 못하게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35도를 오르내리는 한여름 날씨였다.

사람에 지치고 날씨에 지쳤다. 팔달령에서 명 13 릉, 올림픽 주 경기장이었던 니아오차오(鸟巢)까지 가는 동안 우리는 버스만 타면 내내 자고, 내려서는 비몽사몽 속 짜증과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며칠 뒤 투어 평가에서 아이들은 엄마 투어에 가혹하게도 최저 점수를 주었다.

 

둘째 날 투어는 둘째 아이가 설계한 본인 취향 확실한 투어였다. 시간과 공을 제일 많이 들여 설계한 투어이기도 했다. 798 예술지구를 돌아보고, 점심 식사를 위해 골목 안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는 가성비 甲인 식당을 용케 찾아갔다. 식사로 궈바로우 1개, 계란볶음밥 1개, 음료수 2병만 주문, 합계 63위안. 양이 적다며 투덜거리는 엄마와 언니에게 맛있는 디저트를 사 주겠다며 달랬다. 우리가 먹은 디저트는 대만의 유명한 디저트 카페 체인점의 망고 빙수였다. 1개에 무려 72위안이었다. 둘째 아이는 평소에도 밥 보다 디저트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디저트 마니아였다는 것을 깜빡했었다. 여행 중간중간 나도 모르게 간섭을 했는지 아이가 뾰로통하게 한마디 했다. “어리다고 무시하지 마세요. 오늘은 내가 설계자라고요.”

 

둘째 아이가 적은 여행 정보


셋째 날 투어는 첫째 아이가 설계한 ‘추억은 방울방울’ 감성여행이었다.  문제는 베이징대, 칭화대 내 관광객 출입은 사전 신청자에 한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몰랐다. 여행 첫 코스인 칭화대 정문 앞에서부터 출입을 제지당했다. 매사 심드렁했던 사춘기 아이도 이때만큼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다행히 베이징대에서는 아빠 찬스로 입장할 수 있었다. 근방에 있는 10년 전에 잠시 살았던 아파트도 들렀다. ‘니하오’ 한마디도 할 줄 모른 채, 매일매일 생존 전투를 벌였던 추억 많은 곳이었다. 어리바리 우리 가족을 초인적인 인내와 따스함으로 도와주던 유치원 선생님들도 떠올랐다. 중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지금의 아이들을 보신다면 얼마나 기특해하실까.  

 



짠내 투어에서 우리가 얻은 건 추억과 관광만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자신이 맡은 하루에 대한 책임감으로 부쩍 의젓해졌고, 나는 아이들에게 더 큰 신뢰감을 갖게 되었다. 여행도 내 예상 이상으로 알찼다. 그리고 평가는 공정했다. 관광, 재미, 가성비, 음식, 친절도 평가에서 1등을 한 둘째 아이에게는 상금이 주어졌다.  

 


무슨 연유인지 우리 아이들은 프랑스 파리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공기조차 낭만적일  같다나.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짠내투어, 파리  준비 하라고 운을 띄어 놓았다. 이미 마음의 준비는  되어있다. 떠날 자유가 다시 돌아오는  날만 고대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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