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에서 배워 온 손 맛
아이의 학교 입학 오리엔테이션 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뻘쭘했다. 중국인들의 친화력은 놀라울 정도이다. 그러나 그것도 중국인들 사이에서만이다. 다들 처음 보는 사이 들일 텐데도 스스럼없이 대화를 하면서 두 명 세 명 모이더니 어느 순간 한 그룹을 만들었다. 아마도 나는 온몸으로 긴장감과 어색함을 드러내며 외국인 티를 내고 있었을 것이다. 대부분이 중국인에 몇 명의 미국인들과 몇 명의 일본인들 속에서 한국인은 나 밖에 없었다. 나름 친화력 좋은 나도 그 순간에는 낯 가리고 의기소침한 사람이 되었다. 심지어 담임 선생님의 속사포 같은 중국어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밑도 끝도 없는 지루한 멍 때림의 시간이었다.
그때 누군가 나에게 중국어로 말을 걸어왔다.
“혹시 한국인이세요?”
그녀는 자기 이름을 판시라고 소개를 하고, 자기 아이들은 남녀 쌍둥이인데 같은 반이라고 했다. 모스크바에서 유학할 때 한국인 친구들이 있었다고, 친구들에게 배워 한국어도 몇 마디 할 줄 안다고 했다. 그러면서 “맛있어요”, “예뻐요”를 꽤 정확한 발음으로 했다. 그날 나에게 먼저 말을 걸고 다가와준 판시가 어찌나 고맙던지.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중국과 미국, 프랑스에서 활동을 하는 꽤 유명한 화가였다. (그녀의 작품들은 꼭 그녀의 이미지처럼 단아하고 우아했다)
그 후 두 번째로 학교에 갈 일이 생겼다. 핼러윈 파티를 한다고 했다. 학부모들도 음식 한 두 가지씩을 들고 참석을 해야 했다. 가기 싫지만 가야 했다. 나는 파스타와 김치전을 준비했다. 한국 음식도 한 가지 하고 싶었고, 김치전이 무난하지 않을까 싶었다. 마침 김치전 색깔이 호박 색깔과 비슷해서 김으로 데코도 해봤다. 차갑게 식은 나의 파스타는 피자와 치킨에 밀려 그리 인기 있지 않았다. 대신 덤으로 해 간 김치전이 꽤 선방했다. 한국 음식이라고 하니 다들 한 번씩 맛보고 싶어 했고, 우리 반에 들른 교장 선생님과 다른 선생님들도 한 조각씩 맛을 보았다.
그날도 판시는 여전히 뻘쭘하게 혼자 겉돌고 있는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 김치 담글 줄 알아. 모스크바에서 유학할때
룸메이트가 한국 친구였거든. 그 친구가 김치를
담가 먹어서 같이 만들면서 배웠어.
나도 집에서 종종 만들어 먹어.”
나도 담글 줄 모르는 김치를, 한 번도 시도해 본 적도 없는 김치를 담가 먹는 중국인이라니. 심지어 판시 남편은 미국인인데도 김치를 좋아하고 아이들도 잘 먹어서 주기적으로 담가 먹는다고 한다. 마침 며칠 전에도 김치를 담갔다고 원하면 맛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다음 날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쇼핑백 하나를 내밀었다. 판시가 아이들 편에 보낸 김치 두 통이 들어있었다. 정말 김치였다. 조미료 맛 하나 없고 양념 맛도 가벼운 집에서 만든 김치였다. 우리나라 김치처럼 젓갈 잔뜩 넣은 진한 맛은 아니었지만 깔끔하게 맛있었다. 아마도 원래 요리에 소질이 있었던 것 같았다.
판시가 보낸 김치를 먹을 때마다 여러 생각이 들었다. 제일 먼저 이렇게 세심하게 챙겨준 판시의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이후 판시의 작업실에도 몇 번 방문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말 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늘 온화했다. 예술가는 까칠하고 예민한 줄만 알았던 나의 편협한 생각도 바뀌었다.
판시가 모스크바에서 만났던 한국 친구들, 특히 룸메이트였던 그분께도 정말 고마웠다. 비록 얼굴은 모르지만 아주 좋은 분일 것 같다. 그분이 판시에게 심어준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 덕분에 나 역시 판시에게 따듯한 호의를 받을 수 있었을 테니. 그래서 판시의 김치가 더욱 특별했다. 한 조각씩 먹을 때마다 한 번도 안 가본 모스크바까지 떠올리게 했으니 말이다.
판시의 인터뷰를 계획만 하고 아직 실행에 옮기지를 못했다. 인터뷰를 핑계 삼아 모스크바 룸메이트와의 추억도 좀 더 물어봐야겠다. 판시의 김치 레시피는 물론이고.
#판시의모스크바룸메이트를찾습니다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