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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리산책 Oct 15. 2020

핑크는 취향입니다

어쩌다 부모 in 상하이


초록색/ 파란색과 주황색/ 연보라색과 연하늘색

위에 나열한 색깔들은 우리 집 세 명의 여자들이 좋아하는 색깔이다. 여자라고 무조건 분홍색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조금은 뜬금없이 두 딸들과 좋아하는 색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둘째 아이는 3학년 때부터 3년 동안 학교 운동팀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아이들 성별에 따른 신체나 운동능력 차이가 없어서 남녀 혼성 한 팀으로 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5학년이 되니 키 차이도 나고, 무엇보다 달리기와 몸싸움에서 남학생들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중요한 시합에서는 남학생들로만 팀을 꾸리는 일이 종종 생겨났다. 결국 여학생들은 코치에게 제안을 해서 그 종목 초등부 최초로 여학생팀을 만들게 되었다.

여학생팀으로 경기에 첫 출전하던 날, 코치는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해왔다. 바로 여학생팀을 위한 유니폼이었다. 코치가 기대에 찬 표정으로 진분홍 유니폼을 ‘짜잔’ 하고 꺼냈을 때, 나는 아이들의 실망스러운 표정을 보고 말았다. 나 역시 한 3초쯤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이어서 들리는 아이들의 거센 항의.



"색깔 촌스러워요”,  “분홍색 싫어요”, “왜 우리한테 안 물어봤어요? 여기서 분홍색 좋아하는 애 아무도 없어요”.



아이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거침이 없었고 솔직했고, 코치는 많이 당황한 듯보였다.

코치의 서프라이즈 선물에 대한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고정관념 때문에 망했다고나 할까. 진분홍 유니폼을 입고 떨떠름하게 앉아있는 여학생들을 보고 한 남자아이가 그냥 지나가지 못하고 한마디를 했다.
"너네 왜 촌스럽게 바비 같은 분홍색 옷을 입고 있냐.”


바로 그것이었다. 그동안 성별에 차이를 두지 않고 한 팀으로 함께 운동하던 동료들에서 갑자기 바비의 핑크빛 판타지에서 못 벗어난 ‘여자 아이’로 인식되어 버린 것이다. 달리기도 빠르고 오히려 몸싸움에서는 오빠들에게도 밀리지 않는 맷집을 가지고 있는 우리 집 둘째 아이가 자존심이 상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게다가 이미 초등 저학년 때 바비 사교계를 은퇴한 사람으로서 말이다.)



나와 달리 내 동생은 아들만 둘이 있다. 평소에 패션에 관심 많은 동생이 아들만 둘을 낳고 나서 했던 한탄이 생각난다. 남자아이들 옷 코너에 가면 남색, 파란색, 회색 밖에 없다고. 무슨 옷을 사도 다 그게 그거 같아 보인다고.

그러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동생은 과감해지기 시작했다. 아들들에게 진분홍, 연분홍, 빨간색, 노란색, 주황색, 무지개색 등 다양한 색깔의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피부가 유난히 하얀 그 집 아들들은 화려한 색깔의 옷이 잘 어울렸다 굳이 문제라면 두 조카들이 머리까지 단발로 길기 때문이랄까. 조카가 분홍색 티셔츠에 빨간색 운동화를 신고 밖에 나갈 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당연히 여자 아이로 안다는 점, 그리고 남자아이인 걸 알았을 때 보이는 심란한 시선을 감수해야 한다는 정도?

여학생팀으로 두 번째 시합에 출전하게 되던 날, 한편에서 여학생들이 분홍 유니폼에 대해 투덜거리고 있던 그 순간, 내 눈에 거대한 진분홍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코트에서 시합 중인 어느 중학교 남학생의 발이었다.

나에게 '핑크'는 커피 광고 속 김태원 아저씨가 긴 머리 찰랑거리며 입고 있었던 그 핑크색 스키복이었는데… 앞으로는 이름 모를 중딩 남학생의 운동화로 기억될 것 같다. 핑크는 취향.  


핑크는 취향입니다


여학생들 팀의 첫 유니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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