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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토요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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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바이킹 Jul 10. 2017

오후 두 시의 혼밥가즘

토요 서울 X 가정식 백반



회사를 안 간지 2주째 되는 첫날. 밤새 온갖 뒤숭숭한 것들에 시달리다 점심이 다 되어 일어났다. 지난주엔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밤까지 끙끙거리며 원고 작업에 매달리는, 어떻게 보면 회사 다닐 때 보다 더 빡세고 스트레스 터지는 날들을 보냈었는데, 딱히 투입한 에너지 대비 손에 쥔 결과도 없고, 몸도 으슬으슬하니 오히려 더 안 좋아지는 것 같고, 매일매일 꿈자리엔 온갖 회사 사람들이 사납게 등장했다. 아직 회사 독이 덜 빠진 게지. 결국 주말부터 내 몸은 '지 알아서' 시차 적응을 하기 시작해, 나의 기상 시각은 늦은 오전쯤으로 맞춰지고 있다.


창문틀에 고인 물이 주르륵 흐를 정도로 쏟아붓는 비를 핑계로 며칠 째 미룬 빨래와 청소를 다시 내일의 내게 미루고, 겨우 내 몸 하나 씻은 뒤 노트북을 메고 동네 백반집에 왔다. 혼자 먹기 편하다는 이유로 몇 달간 펼친 각종 면 버라이어티에 지쳐, 지난주에 인터넷을 열심히 뒤져 발견한 곳이다.(집 바로 코앞에 있는 가게를, 이사 온 지 2년 만에 인터넷으로 찾는 아이러니) 어느새 오후 두 시가 다 되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손님으로 바글바글하더니, 오늘은 시간이 늦어 그런지 손님은 달랑 나 하나다. "저, 지금 식사 되나요?"


보통 백반집에 오면 평타는 치는 돼지불백을 시키는데, 오늘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정식 백반' 메뉴를 시켜 보았다. "네~ 오늘은 김치찌개 나갈께요~" 하신다. 오우, 굿. 비 오는 날 어쩐지 고기 덩어리는 땡기지 않았는데, 사장님 나이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이 집 아주머니들은 과하지 않을 정도로, 훌륭히 친절하시다. 혼자 왔어도 4인용 불판이 자리한 곳에 맘 편히 앉으라 하시고, '맛있게 드세요' '안녕히 가세요' 등의 당연할 것 같지만 혼밥러에겐 가끔 당연하지 않은 인사말도 꼭 인상 좋게 붙여 주신다. 내겐 정말 순전히 '내게도 인사를 해주셔서' 가는 단골 밥집이 동네에 몇 있다.





"맛있게 드세요~"

김치찌개부터 한 숟갈 펐다. 허허.. 웃음이 나오는 맛이다. 대략 오전 열한 시 반쯤부터 두어 시간 밀어닥친 주변 직장인들과 택시기사님들의 한 끼를 위해 팔팔팔 끓었을 커다란 찌개 냄비, 그 맨 밑바닥의 한 그릇은 온갖 재료와, 양념과, MSG가 우러날 대로 우러나 꽉꽉 눌러 담긴, 흡사 시큼한 사골 같은 맛이었다. 이건 미쳤다. 밖에 비가 저렇게나 퍼질러 오는데, 나는 비도 안 맞고 이런 김치찌개를 먹고 있어. 하, 내가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 걸까?


한동안 멍하니 숟가락질을 하다가, 문득 내가 평소와는 달리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왜지? 그건, 푹 젖은 발 때문에 안쪽 좌식 테이블에 앉지 않고 비 오는 창밖이 바로 내다 보이는 바깥쪽 테이블에 앉은 탓이었다. 타다다다다다다다다. 내가 이리 오던 길엔 좀 잦아들었던 빗줄기가 갑자기 여봐란듯이 거세졌다. 사람들이 우산을 들고도 헉 하고 뛴다. 다시 토도도도도 얌전한 빗방울이 내린다. 초록 비옷의 배달원 아저씨가 처마 밑에 들어와 달라붙은 비옷 자락을 촥 촥 턴다. 김치찌개 한 술에, 고등어 한 점에 얹어 먹기 더없이 지루하지 않은 풍경이다. 더 이상 새로울 기사도 없는 네이버 연예란을 괜히 처량히 구석구석 뒤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


"어어디로~가야아하죠오~~아아즈씨이이이~~"

그렇지, 이별택시는 이런 날 듣기 딱 좋은 노래지. 캬하. 사장님의 선곡에 감탄하고 있는데 이번엔 에일리가 처절하게 첫눈처럼 내가 가겠단다. 사장님들 중 한 분이 이별하셨나 싶을 정도로 계속해서 이별 노래들이 나온다. 뭐, 좋다. 이 가게 전체에 나밖에 없지, 뷰 좋지, 찌개는 미쳤지, 음악 좋지, 1인 레스토랑이 따로 없다.


<지금 내 기분이 '하이'한 이유 3>

1. 회사를 안 갔다

2. 비가 저렇게 오는데 나는 안 맞는다 (심지어 구경 중이다)

3. 몸에 좋은 걸, 게다가 맛있게 해서 먹고 있다


어제부터 몸에 살짝 깃들어 있던 미열이 온몸으로 퍼졌다. 마카로니 사이에서 맛살을 골라 먹고 있는데 시밤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나려고 했다. 심지어 몸이 부르르 떨렸을 정도니 이 정도면 거의 백반가즘, 혼밥가즘이다.






중간쯤 먹어갈 때 어떤 아저씨가 들어왔다.

내가 너무 문가에 앉은 터라 얼굴은 못 보았는데, 안쪽에 계신 사장님들이 역시 얼굴도 안 쳐다보고 반색하며 "어머, 백반 하나 해드릴께요옹~" 하신다. 뭐지? 슈퍼 단골인가? 경쟁심 돋는다.

보통 혼밥을 하러 가면, 나는 '인사성 밝은' 평소와는 달리 최대한 눈에 안 띄려 노력한다. 그 집이 맘에 들어서 또 오고 싶을 경우엔 더더욱. 그래야 자주, 어쩌면 매일 오더라도 서로 민망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계산을 하면서 부러 "너무 맛있었어요~ 자주 올께요*^^*" 했다. 나도 한 달쯤 이리로 출근하면 사장님이 "어머, 오늘은 불백 해 드릴까?" 해 주시려나?


마요네즈에 버무린 마카로니는 끝내 안 먹고, 찌개는 되도록 건더기만, 밥은 반만, 그래도 아가씨 체면을 붙잡고서 야무지게 딱 먹고 일어났다.

이 모든 환상적인 시간의 값은, 육천 원이었다. 자칫 밥보다 비싼 커피를 먹게 될까 봐, 오늘 오후의 작업은 쿠폰에 도장 열 개를 다 모은 카페에서 하기로 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비가 또 귀신처럼 잦아들었다.





글.사진|작은바이킹


(토요일은 아니지만, '토요 서울'에.)





#혼밥 #푸드에세이 #도시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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