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6: 치약

치약 한 개 만큼의 시간

by 작은바이킹



열흘이 넘게 징글징글한 기침 감기를 앓았다. 낮에는 좀 괜찮은 것 같다가도 해만 떨어졌다 싶으면 귀신같이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어려운 폭풍 기침이 시작되었다. 밤새 각혈하듯 공중에 마른 기침을 토해내고 나면 침대에 오래 밟힌 껌처럼 눌러붙어 꼼짝을 못했다. 한국에서 들고 온 약들 중 '목'이 써진 것들은 몽땅 꺼내 먹고, 이곳에서 유명하다는 약들을 이것저것 사서 몇 시간 간격으로 입에 까 넣었지만 도무지 이게 나아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쉰 목소리로 전화를 건 병원에선 가장 빠른 예약이 일주일 후라 한다. 징글징글한 이 나라의 융통성 없음을 저주하며 거지꼴로 앉아 있다가 그래도 이는 닦아야지 싶어 칫솔을 집었는데, 한국에서 가져온 통통했던 치약이 홀쭉해져 요만큼도 나오질 않았다. 어느새 치약 한 개를 다 썼구나. 매일매일 조금씩 이 치약을 눌러 쓰는 동안, 하루하루를 일 년처럼 쥐어짜 쓰는 동안, 내겐 어떤 시간들이 지나갔을까.



한국에서와 똑같이 여러 개의 공을 두 손 가득 쥐고 저글링하는 삶을 살고 있다. 출발 전까지 너무나 많은 일들을 한꺼번에 처리해야 했던 탓에 가서는 꼭 공부 '한 가지'에만 신경 쓰고 싶었던 바람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한 달에 한 번씩 마감이 있는 글을 쓰고 있고, 토요일마다 나 스스로 만든 마감의 압박에 시달리(기만 하)고 있으며, 잠시 미뤄두었던 출판 일도 이제 곧 다시 시작할 때가 되었다. 간간이 한국에서 나의 쓸모를 찾는 일들이 있을 때면, 이곳에서의 아무것도 아닌 나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내가 힘들게 다듬어 온 나라는 가치를 괜히 스스로 깎아먹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해지기도 했다. 이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가도 저것을 놓치면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왜 남들 하는 이야기에 영향을 받고 있나 싶다가도 돌아서면 그것이 내 유학 목적의 전부인 양 보이기도 한다. 언어의 한계, 은근한 무시, 쳐지는 건강 상태, 불어나는 옆구리와 줄어드는 시간을 느낄 때마다 생활의 중심은 자꾸만 이리저리 널을 뛴다.


엄청난 힘이 필요한 새로운 것을 시작했는데, 가지고 있던 무엇도 내려놓지 못했다. 당연히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앉지도 서지도 달리지도 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섰다. 나 잘하고 있는 건가.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은 성공 여부를 떠나 그 자체로 언제나 가치 있는 일이라 믿어 왔는데, 언제까지나 시도만 하다가 그칠 인생이라도 정말 괜찮을까 싶은 생각이 문득 나를 찌른다. '스스로를 다그치지 마세요!', '잘하지 못하면 어때요!'와 같은 천사의 목소리는,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할까 봐 종종거리는 초보 주식꾼과 같은 지금의 내겐 잘 들리지 않는다.



"니가 늙어서 그런가 보다."

가까스로 되찾은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오만 가지 걱정을 쏟아내자, 엄마는 이 한 마디로 모든 것을 정리했다. 아닌 것 같아도, 10년 전과 지금이 어디 같겠느냐고. 예전 대학생 때는 더 낯선 나라에서 더 고생한 때가 있었어도 이렇게까지 혼란스럽지 않았는데 이제 와 왜 이럴까 싶었던 의문의 답이었다. 삼십 대의 나는, 많은 것이 처음이었던 스물셋의 나처럼 '하하, 참 거지 같았지만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어!' 하며 맘에 들지 않는 상황을 그저 넘겨 버리기가 힘들다. 아무리 시간을 되감아 다시 학생 신분으로 돌아왔다고 해도, 이미 아는 건 이미 아는 거다. 무엇이 더 좋은 것이고 무엇은 납득할 수 없는 것인지, 내가 20대의 과정을 사는 동안 나름의 답을 찾아가며 만들어온 기준이 자꾸만 여기저기서 덜컥 덜컥 긁히고 부딪힌다. 가진 것이 늘어난 10년의 시간 동안, 10년어치의 마음이 닫혔다. 지금의 어려움이 나중에 반드시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 믿기엔, 생각보다 '나중'이란 것이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지금, 조금 더 괜찮고 싶다. 머릿속에 있는 것과 현실의 갭을, 어서어서 메우고 싶다. 어렸을 때는 빨리 무엇이라도 이루고 싶어 조급했다면, 지금은 내가 이미 정해 놓은 무언가를 이루지 못할까 봐 조바심이 난다. 그러고 보니 좀 더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꼭 더 어른스레 살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네. 나는 이번의 내가 지난번의 나보단 썩 괜찮을 줄 알았는데. 지난 시간 썼던 글에서 실컷 어른인 체 했던 것이 민망해진다. 막상 또 다른 새로운 상황에 놓이고 보니, 여전히 잘잘한 것들에 신경이 쓰이고 여전히 나는 초년생이다.



남의 나라에서 사는 게 당연히 힘들지. 안 하던 공부 하려니 당연히 힘들지.

안다. 안다고 다 괜찮은 건 아니라서 그렇지. 인생에서 지나간 단계는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제 다시는 예전처럼 말랑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지나간 것을 내려놓지도, 새로운 것을 열린 자세로 품지도 못하는 스스로가 아직은 답답하기만 하다. 정말 늙어서 그런가. 뭐래 정말, 이제 삼십을 요맨치 넘어 놓고. 진정하자. 겨우 치약 하나 눌러쓸 시간이 지났을 뿐이잖아.


아주 낯선 감기가 지나갔다.





글.사진 | 작은바이킹

직장인을 일시 정지하고 날아온 1년짜리 유학생. 이따금의 토요일에 쓰는 빡세고 다정한 런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