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은 아름답다. 근데 정말 아름답나?
영어 공부의 꽃은 원서 읽기라면서요?
그렇다면서요?
분명 또 어디선가 주워들은 것이었을 테다. 영어에 흥미는 있는데 공부는 하기 싫고, 책을 읽으면서 영어 공부를 할 수 있다니 좀 솔깃하긴 하잖아.
선생님의 눈을 피해 앞자리 친구 뒤에서 만화책과 소설책을 탐독하며 삶의 여유로움을 만끽하는 재미로 살던 중학생 시절, 서점 안을 기웃거리다 걸리버 여행기 영한 대역 문고를 발견했다. 상쾌한 파란색 표지에, 식빵처럼 얇은 두께, 중간중간 끼워져 있던 삽화가 소설책보다는 동화책에 가까운 매력으로 나를 이끌었다.
사춘기 호르몬의 영향으로 방을 일단 걸어 잠그고, 이불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려 책장 안으로 빠져드...는데 음.
아니, 이거 학생용 문고 아니었어?
걸리버 여행기라는 소설 자체는 이미 읽어본 소설이었고 재미는 있었는데, 이 책은 한글 부분만 재미가 있었다.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있긴 했지만 걸리버 여행기의 영어 문장은 내 수준에서는 여전히 아주 길었고, 나의 최대 취약점은 어휘력이었기 때문에 한 단어 한 단어 읽어 나가는데 목이 메는 것처럼 컥컥 막히는 게 있었다.
길에서 친구를 만났을 때 반가움처럼 아는 단어나 구절을 만나면 기분이 좋았지만, 이 동네에는 내가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았고 그로 인한 사무치는 외로움이 있었다.
결국 한글 부분만 읽으며 뒹굴뒹굴하다가 책을 내려놓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한 단락의 통째로 읽으려고 했던 시도가 그 과정을 더 고통스럽게 했던 것 같다. 차라리 한 문장씩 끊어서 읽기를 시도했으면 좀 더 쉬웠을 텐데. 그래도 학교에서 영어는 좀 한다는 소리를 들었고 '학생용 영한 대역 문고니깐 좀 읽기 쉽겠지?'라는 비현실적 기대 또한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기대치가 높으니 그만큼 좌절감도 컸다.
한 문장씩 읽으면서 아는 단어나 구절을 발견하는 기쁨을 목적으로 도전했더라면 좀 더 수월하게, 좀 더 즐겁게 임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든다.
걸리버 여행기 원문 원서를 찾아보니 영어 문장 자체는 '나는 이랬고, 저 사람이 이랬는데, 그래서 우리가 이랬다.'와 같이 대화체 문장이 많아서 소설치고는 그래도 쉬운 편인 듯싶다.
올여름에는 걸리버 여행기 원서나 한번 읽어 볼까나?
[삽질 복기]
- 한 문장씩 조금씩 떼어 내어 한 입씩 야금야금 먹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 문장 전체를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 가볍게 읽으면서 아는 단어를 발견하는 기쁨을 찾으려고 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 눈으로만 읽지 않고 소리 내서 읽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 힘들어도 버티고 끝까지 읽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 초콜릿을 먹으면서 다시 도전했다면 좋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