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번리의 초록지붕 집에 사는 빨강머리 앤에게
안녕 앤셜리! 난 리지라고 해. 앤셜리 너를 무척 좋아하는 문학소녀. (하핫, 사실 소녀라고 말하기엔 나이가 많지만) 뒤에 ‘e’를 꼭 발음해서 앤이라고 불러달라는 넌 정말 엉뚱한 소녀구나. 하지만 난 그런 네가 참 좋아. 차갑고 이기적인 배리 할머니조차 너한테 듬뿍 빠지게 만들만큼 매력적이잖니. 그런데 네가 좋은 이유가 또 하나 있어. 그건 바로 너랑 나랑 닮은 점이 많기 때문이야. 우선 내가 MBTI 검사결과가 INFP, 잔다르크형인데 너도 그렇더라고. INFP로 유명한 인물에서 네 이름을 발견하고 무척 반가웠지. 그리고 너를 키워주신 마릴라 아주머니와 매슈 아저씨 말이야. 딱 우리 부모님 같지 뭐니. 우리 어머니도 마릴라 아주머니처럼 사랑을 감추시고 나한테 엄격한 태도로 때론 매몰차게 말씀하실 때도 많아. 그런데 그럴 때 매슈 아저씨처럼 속 깊고 다정다감한 아버지가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어서 힘을 내곤 하지!
앤!! 너는 어쩜 그렇게 상상력이 풍부하니? 나도 한 상상력 하는데 감히 너를 따르진 못할 것 같구나. 나는 내가 조용한 ADHD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수업 시간에 좀처럼 집중을 못하는 학생이었어. 내가 좋아하는 국어나 계산하는 수학은 그래도 좀 괜찮은데, 사회나 윤리처럼 지루한 과목들은 어느새 나를 상상의 나래로 이끌곤 하더구나. 그래서 내 암기과목은 점수가 안좋아. 너도 기하학은 어려워했잖니. 뭔가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에서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어.
너에겐 아름다운 친구가 많다는 점들도 참 부럽더구나. ‘기쁨의 하얀 길’, ‘반짝이는 호수’, ‘보니’, ‘눈의 여왕’. ‘연인의 오솔길’, ‘제비꽃 골짜기, ’유령의 숲‘ 등 네가 재기발랄하게 이름지어준 자연물들을 나도 가까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도 어려서 시골에서 자랐는데 내가 살던 곳은 빠르게 공업화되어서 지금은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남아있지 않아. 몇 년 전에 스위스에 다녀왔는데, 네가 살던 곳과 풍경이 비슷할 것만 같아. 언젠가는 진짜로 네가 살던 에이번리 마을의 배경이 된 곳인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 꼭 가보고 싶어!
참, 유령의 숲 말이야. 네가 벌벌 떨며 유령의 숲을 지나갈 때 내 어린 시절도 떠올랐어.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동네 친구와 놀다가 실수로 내 자전거 바구니에 친구 물건을 담아 가져왔거든. 그 때 어머니가 불호령을 내리면서 그날밤 안으로 꼭 친구한테 돌려줘야 된다고 말했지. 나는 밤길을 혼자 걷는 게 정말 무서웠지만 어머니한테 혼나지 않기 위해 다녀와야만 했어. 앤 셜리, 너도 딱 그 심정이었겠지? 이를 오도독 떨면서 집에 도착한 너를 보니 내가 다 안심이 되더구나.
그리고 너에겐 길버트 브라이드라는 선의의 경쟁자가 있는 점이 무척 부러웠어. 네가 후에 길버트 브라이드와 결혼한다는 것까지 이미 다 알고 있긴 했지만, 어찌되었든 내내 쌀쌀맞은 너를 보니 '홍당무'라고 놀린 게 많이도 상처가 되었구나 싶었어. 하긴, 나라도 내 머리카락 색깔을 비웃고 놀리면 무척 상처가 되고 화가 날거야. 그렇지만 다이애나 말처럼 길버트는 정말 좋은 남자아이 같아. 물 속에 빠질 뻔 한 너를 구해줬음에도 사과를 받아주지 않은 너이지만 끝까지 너에 대한 배려를 잃지 않은 정말 든든한 남자란 생각이 드는구나. 나도 너처럼 길버트 브라이드같은 남자친구를 만났으면 좋겠어. 함께 꿈을 공유하고 서로의 발전을 지지해줄 수 있는 사람. 그렇다면 정말 행복할텐데...
무튼 난 너에게 고마운 게 너무나 많아. 어렸을 적 TV애니메이션을 통해 너를 처음 접하고 거의 십수년만에 책을 통해 너를 다시 만나니 정말 내 가슴이 행복으로 충만해진 기분이야. 너의 상상력, 네가 살던 아름다운 곳에 대한 묘사, 너의 재잘거리는 수다, 생동감 넘치는 생명력 등이 나에게도 전염된 듯한 기분이 들어. 나도 너처럼 꿈을 잃지 않고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해. 길모퉁이에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는 너의 말을 진심으로 믿어. 정말 고마워.
그럼 너의 그곳에서도 마릴라 아주머니와 다이애나와 그 밖에 친구들과 함께 언제나 행복하길 바란다.
2019년 11월 9일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하는 친구, 리지.
ps. 네가 벤허를 재밌게 읽는 모습을 보고 나도 정말 반가웠어. 나도 영화로 벤허를 처음 접하고, 그 야속한 운명에 금치 못할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느꼈거든. 뮤지컬로도 보고 싶었는데 기한을 놓쳤지 뭐야. 너랑 직접 만나게 되면 우리는 벤허로도 수다를 떨 수 있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