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을 거듭할수록 단순해지는 세계, 여전히 치밀하지만 깊지는 않은 이야기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아주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저는 <미키 17>에 대해 사실상 아무런 기대가 없었습니다. 『미키 7』을 그다지 재밌게 읽지 못해서, 솔직히 말하면 봉준호 감독이 소설에서 자신이 마음껏 놀 수 있는 설정 정도만 가져왔기를 바랐죠. 그리고 조금 더 개인적이고도 결정적인 이유는, <설국열차> 이후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을 보면서 짜릿한 재미를 느끼면서도 이상하게 항상 걸리는 느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저에게 <기생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일말의 거짓 없이 굉장한 작품이라고 답하겠지만, <기생충>에조차 저에게는 걸리는 지점들이 여럿 있어서 저는 <기생충>을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보다 한 단계 아래에 늘 놓아두곤 합니다. <설국열차>와 <옥자>까지 봤을 때는 이게 영어권이든 거대 자본이든 바뀐 환경에서 영화를 만들다 보니 생긴 이질감일까, 생각하기도 했었지만 <기생충>을 보고 난 후에는 봉준호 감독 자체가 변화한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미키 17>은 안타깝지만 이 문제에 대해 답을 명확히 내리도록 도와준 작품은 아니었고요.
저는 어떤 감독의 필모그래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종종 '최저점'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 말은 해당 작품이 감독의 다른 영화들에 비하면 떨어지지만 결코 못 만들거나 나쁜 영화가 아닐 때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울프맨>은 리 워넬의 최저점이야'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울프맨>은 리 워넬의 워스트야'라고 말하죠. 하지만 <테넷>이 크리스토퍼 놀란의 최저점이고 <노스페라투>가 로버트 에거스의 최저점이라고 말할 때 그 전제는 비교 대상이 오로지 같은 감독의 영화들이라는 것, 그리고 이 작품들이 기본적으로 좋은 만듦새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저는 <테넷>이 찍은 점은 대중오락영화들의 평균선이 쳐다도 못 볼 정도로 높은 곳에 위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미키 17>이 봉준호 감독의 최저점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은 삐딱한 시선보다 안타까운 마음이 더 큰 일입니다.
봉준호 감독이 원작 소설을 어떻게 각색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 수도 있을 겁니다. 각색의 방향에도 장단이 있기에 여기서만도 긴 이야기가 가능하겠죠. 하지만 저는 각색보다는 '소설의 영화화'라는 관점에서 리뷰를 시작해보고 싶습니다. 영화화 과정에서 이 작품이 탁월함을 더 잘 보여준 부분은 각색이 아니라 연출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봉준호 감독에게 가장 큰 과제 중 하나는 세세한 설명이 필요한 설정들을 어떻게 정확하면서도 효율적으로 다룰지였을 것입니다. 소설에서는 많은 지면을 할애해 설명에만 공을 들일 수 있었지만 영화는 그럴 수 없고, 게다가 어느 지점에 이르면 소설과 다른 자기만의 이야기를 펼쳐내야 했을 테니까요. 이 영화는 체감상 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분량으로 미키의 전사를 설명하고 오프닝으로 되돌아온 뒤 타이틀을 띄웁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봉준호 감독은 자기 몫의 3분의 1을 떼어내 '필수 과제'를 해치운 셈이죠. 그렇지만 이 '프롤로그'가 영화의 단점, 즉 구태의연한 설명 무더기로 남지는 않습니다. <미키 17>의 영화 외적인 가치를 말하라면, 저는 '설명과 스토리텔링 양쪽을 모두 잡는' 각본 또는 연출을 위한 기술적인 가이드라인이라고 답할 듯합니다. 봉준호 감독은 이 부분을 꽤나 근사하게 만들어냈어요.
여기에 활용된 테크닉 중 하나는 내레이션이 정보 전달의 역할에만 그치지 않도록 말의 리듬을 살리고, 자조적인 미키의 캐릭터를 드러내며, 깨알같은 유머를 자아내게끔 잘 다듬은 작법입니다. 그렇지만 '프롤로그'에서 더 중요한 점은 세계관을 설명하는 데 있어 반드시 완결된 장면을 이용한다는 사실입니다. 설령 짧은 장면이라고 해도, 그리고 종종 장면 간의 연결은 빈약하다고 해도 어쨌든 봉준호 감독은 미키가 겪는 사건들을 충분히 '보여줍니다'. 바꿔 말하자면 이 영화는 관객에게 낯선 설정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장면들을 쥐어짜서 기워놓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단위로서의 장면들을 쌓아 올림으로써 설정은 자연스럽게 전달하되 서사는 서사 나름대로 추동시킨다는 것입니다. 미키가 익스펜더블에 지원하는 장면이나 나샤와의 섹스가 마샬의 연설과 교차하는 장면을 보면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이 먼저 들지, '지금 설정을 설명하고 새로 나온 캐릭터를 소개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미키 17>은 결코 재미없는 영화는 아닌데, 거기에는 이야기보다 연출의 힘이 더 큰 몫을 했을 거라고 저는 추측합니다.
그리고 책으로 읽을 때보다 영상으로 볼 때 더 압도적인 순간이 이 영화에 최소한 두 개는 있습니다. 하나는 '검은 다이아몬드' 장면입니다. 마샬이 검은 다이아몬드를 자르고 추종자들이 열광하는 상황에서 미키 18은 마샬을 암살하려 하고 돌에서는 크리퍼 두 마리가 나오며 미키 17과 나샤는 18을 막으려고 하면서 공간 전체가 아수라장이 됩니다. 이 장면은 음악이 특히 강렬한데, 아이들의 목소리처럼 들리는 코러스가 삽입돼서 경쾌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몹시 그로테스크합니다. 봉준호 감독은 이 난장판을 정말 요란하게 묘사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너무 잘 전달해서 그 연출력에 혀를 내두르게 만듭니다. 그리고 크리퍼들이 단체로 '뇌와 눈알을 터뜨리는' 소리를 내는 장면의 사운드 스펙터클은 관객조차 진짜 무슨 일이 터질까 봐 숨 죽이게 만들 정도로 시끄럽고 불쾌합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번쩍 들었던 생각은 '왜 봉준호 감독은 영어 영화만 찍으면 단순해지는 걸까?'입니다. <설국열차>와 <옥자>, 그리고 <미키 17>에서 악은 다분히 분명하게 설정되어 있고 개인 바깥에 존재하며, 특히 최근으로 올수록 각 작품들의 귀결은 점점 단순해지고 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선악의 구분이 미묘한 <기생충>은 '감독이 변했다'고 딱 잘라 말하기 힘들게 만드는 단 하나의 예시입니다). 저는 세 작품 중 가장 나은 작품이 여전히 <설국열차>라고 판단할 것 같습니다. <설국열차>는 마지막에 이르러 단순해 보였던 계급 구도를 하나의 순환계로 파악하고 동시에 기차의 '앞뒤'가 아닌 '옆'을 가리키면서 시선을 전환 및 확장시킵니다. <옥자>에서는 미자가 자기의 자매와도 같은 옥자를 구하는 대신 수많은 슈퍼돼지들을 두고 갈 수밖에 없는 딜레마적인 상황으로 페이소스를 자아냅니다. <미키 17>의 결말이 앞의 두 작품과 달리 해피엔딩이어서 제가 덜 높게 평가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기도 했지만 아무리 따져봐도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에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딜레마나 선택 같은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후반부의 투명함 역시 영화가 단순하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요소 중 하나일 것입니다.
'단순함'의 원인 중 하나로 저는 배우들을 활용하는 방식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봉준호 감독에게는 외국의 스타를 캐스팅할 때 그 배우를 최대한 독특하게, 모두가 전에 본 적 없는 방식으로 활용하려는 강박 같은 게 있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죠. <설국열차>의 틸다 스윈튼, <옥자>의 제이크 질렌할, 그리고 <미키 17>의 마크 러팔로를 떠올리면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상이 금방 그려질 겁니다. 사실 박해일, 원빈, 조여정 등의 배우들을 생각하면 이전까지 그러지 않았던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어 영화와 영어 영화의 차이는 배우를 파격적으로 기용하는 것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가 얼마나 받쳐져 있느냐에 달린 듯 보입니다. 특히 <미키 17>의 악역인 마샬은, 어느 순간에도 테크닉이 가장 먼저 도드라지는 배우의 연기를 제외하면 거의 매력이 없는 캐릭터입니다. 하다못해 마크 러팔로의 새로운 목소리와 억양을 들을 수 있었던 마샬에 비하면, 기시감이 느껴지는 토니 콜렛의 연기까지 더해진 일파는 이야기에 기여하는 바도 미미하고 개성이 도드라지지도 않아 더욱 문제적인 캐릭터로 보입니다. 이러한 캐릭터의 한계가 다른 영화에서는 탁월한 용인술이었던 것을 근작들에서는 강박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네요.
이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 중에서 가장 단순한 대립 구도를 다룹니다. 크리퍼들을 말살하려는 마샬은 악인입니다. 크리퍼는 혐오스러운 외형과 다르게 미키를 살려준 평화로운 생명체이고, 사실 니플하임에 이주해 온 인간이 원주민인 크리퍼를 쓸어버리는 일은 지독하게 제국주의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캐릭터에게는 입체적인 면이 없고, 심지어 영화에 의해 내내 희화화되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나쁜 순간은 나샤가 분노에 찬 채 이 내용들을 마샬에게 일갈하는 장면에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사회적으로 뚜렷한 목소리를 내는 작품은 못 된다고 보는데 그렇다면 이 순간 이런 류의 대사가 노골적으로 들어가는 건 차라리 그 조악함을 보고 웃으라고 만든 유머라고 받아들여야 덜 실망스러울 정도죠. 마샬이 크리퍼들을 죽이러 나간 사이 대원들이 '가혹행위'를 이유 삼아 일파에게 반기를 드는 장면은 이 캐릭터들이 영화에서 제대로 초점에 잡힌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맥없기도 하지만 역시 이 단순한 구도에 단순한 종지부를 찍는다는 점에서 더더욱 관성적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단순한 와중에도 <미키 17>의 이야기에는 꽤나 디테일하게 마감된 지점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영화가 '최저점'에 머물 수 있는 이유는, 봉준호 감독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블록버스터의 틀 안에 남기를 원하지 않는 예술가이기 때문일 겁니다. 다만 한 가지 전제할 것은, 저는 이 영화의 세세한 디자인이 부분의 합보다 큰 그림을 이루며 하나의 총체가 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이 영화가 인간 복제의 윤리나 자본주의적 모순을 다루고는 있으나 높은 완성도로 탐구해낸 작품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혹은 뒤에서도 지적하겠지만 스스로 숙고하는 주제와 배치되는 방식으로 서사를 짜나가는 부주의함도 이 영화에서는 발견됩니다. 앞서 한 말을 반대로 생각해보면 깊이까지 성취한 블록버스터가 아니기에 '최저점'이 되는 것이기도 하겠죠.
미키는 죽음을 피해 니플하임 원정에 합류했습니다. 원작의 다리우스는 신경을 직접 자극해 고통을 가하는 기술로 고문을 가했는데, 영화에서는 연체자의 사지를 절단한 뒤 '죽이는' 것으로 설정이 바뀌었고, 따라서 미키는 '고통'이 아니라 '죽음'으로부터 도피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미키가 들어선 세계는 죽음이 허락되지 않는 세계고, 이 원정의 지도자인 마샬이 바로 휴먼 프린팅 기술을 '익스펜더블'이라는 경제적 수단으로 발전시킨 사람이었음을 생각해보면 마샬을 해치우는 것과 휴먼 프린팅 기술을 금지하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결말은 자연스러운 귀결로 보입니다. 마침내 미키는 죽을 수 있게 됨으로써 역설적으로 승리하는 셈입니다.
이 이야기의 설정상 죽음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뱀파이어 같은 불멸이 아니라 얼마든지 죽어도 괜찮다는 '간편함'과 맞닿아 있습니다. 죽어도 괜찮기 때문에 '익스펜더블'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소모품이 되는 것이죠. 말하자면 미키의 이름이 비로소 '17'에서 '반즈'로 회복되는 것은 소모품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죽을 수 있기에 가능해집니다. 이 영화의 제목이 '미키 7'에서 '미키 17'으로 바뀐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그만큼 수가 더해진 죽음이 그간 미키가 얼마나 더 많이 소모품으로 취급되었는지를 강조할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이 지점을 뒷받침해주는 장면이 세 개 있습니다. 일단 제니퍼가 죽었을 때 마샬이 격노해서 그를 비난하는 순간을 꼽을 수 있겠죠. 미키의 죽음은 다른 사람들의 죽음과 같은 무게로 취급되지 못합니다. 다른 하나는 티모가 미키를 죽이려고 찾아오는 장면입니다. 티모는 다리우스의 부하에게 협박을 받아 미키를 대신 고문하고 죽이려 하는데, 그는 우는 척하면서 자기는 죽으면 끝이지만 미키는 다시 살아날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저에게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카이가 자기 방에서 '죽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질문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영화 내내 반복되는 이 질문은 첫 장면에서는 티모가, 초반부에는 미키에게 시비를 거는 무리들이 던집니다. 즉, 이 질문이 미키를 괴롭히는 종류임을 영화는 주변 인물들로 설정하고 있고, 그렇기에 카이와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카메라는 두 사람을 향해 천천히 들어가면서 둘 사이의 성적인 기류를 포착하지만 사실 미키는 속으로 다시 한번 생채기를 입기도 하는 것이죠. 아닌 게 아니라 이 쇼트의 끝에서 미키는 프레임을 뛰쳐나감으로써 카이와 단절됩니다. "What's it feel like dying?"이라는 질문은 매우 폭력적입니다. 죽음이 어떤지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기 때문이고, 미키는 죽어도 삶이 끝나지 않아서 소모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카이가 이 질문을 꺼낸 것 자체가 제니퍼에 대한 상실감 때문이었습니다("미키 너는 여기 있지만 제니퍼는 우주 어디에도 없잖아."). 게다가 직후 나샤와 설전을 벌일 때 카이는 17과 18을 한 명씩 나눠갖자고 주장함으로써 미키가 멀티플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이 기술을 긍정합니다.
마샬과 다리우스는 '촬영'이라는 모티브로 겹쳐 있습니다. 다리우스는 연체자가 고문당하는 순간을 영상으로 남기고, 마샬은 자신이 군림하는 모습들을 언제나 영상으로 남기죠. 이로써 우선 마샬은 끔찍한 살인자와 서로 포개지게 됩니다. 그렇게 본다면 원작에서 행성 하나를 날려버린 전쟁범죄자로 설정되었던 앨런 매니코바가 연쇄살인자로 각색된 것 또한 예사롭지 않아 보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식민 사업의 사령관인 그가 사채업자와 연결됨으로써 착취하는 자본주의에 대해 이 영화가 코멘트한다는 점이겠죠. 다시 한번, 마샬은 휴먼 프린팅 기술이 윤리 나부랭이 때문에 사장되지 않도록 경제적 이익이라는 금박을 두른 사람이었습니다.
그 시초부터 살인의 주체였던 멀티플은 마샬에 의해 살인의 대상으로 탈바꿈됩니다. 미키 18은 설정의 중요성에 비해 하나의 캐릭터로서 무게가 몹시 부족한데, 어찌 됐든 저한테는 이 캐릭터가 살인과 계속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17이 설명하기로 지금까지 나온 미키들 중 가장 '또라이'인 18의 핵심에는 인물의 폭력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18은 망설임 없이 17을 폐기하려 사이클러로 끌고 가고, 거기서 자기를 죽게 버려두었던 티모까지 죽이려 합니다. 그리고 17이 마샬에게 생체 테스트를 당하고도 유약하게만 굴자 분개하면서 그를 죽이겠다고 나섭니다. 마침내 자기자신까지 죽이면서 마샬을 살해하는 것도 18입니다. 저에게 이 설정은 두 가지 측면에서 흥미롭습니다. 하나는 무제한적으로 활용 가능할 줄 알았던 익스펜더블이 어느 순간에 이르러 폭력적인, 그래서 자신을 활용하는 주체를 역공할 수 있는 존재로 변이를 일으켰다는 점입니다. 또한 만약 유사성을 밀고 나가 이 폭력적인 미키를 마샬 및 다리우스와 사실상 같은 존재로 볼 수 있다면, 18과 마샬이 함께 폭사하는 결말은 (자본주의든 제국주의든 그 무엇이든 간에) 착취적인 시스템이 자폭하는 구도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미키 17>은 <설국열차>를 강하게 연상시킵니다. 두 작품 모두 SF의 세계관 속에서 마침내 그 세계를 파괴하는 결말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죠. 어린아이인 미자가 거대 기업 앞에서 어떤 '혁명적인' 행동도 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허락된 정도의 희망만을 가지고 떠나는 <옥자>와 달리 <설국열차>와 <미키 17>은 기어코 그 억압적인 세계를 전복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 판타지스러운 종결법은 우리가 봉준호 감독의 대표작들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기에 더더욱 이질적으로 다가오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부분적으로는 인물들을 죽임으로써 서사를 매듭짓는 이 영화의 종결법에 의문이 듭니다. 마샬이나 일파의 최후에 대해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면, 티모가 해피엔딩에 포함되는 것이 온당한지 물어볼 수도 있겠죠. 티모는 결국 다리우스의 부하를 죽임으로써 곤경에서 벗어나고 이게 정당방위로 인정받으면서 이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습니다. 죽음을 중요하게 다룬 작품이라면, 죽음을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 삼는 것에 대해 이보다는 세심하게 접근할 수 있지 않았을지요. 역시나 이 영화에서 악은 너무 절대적이어서 사람을 소모품 취급하거나 돈 좀 못 갚았다고 죽이려고 하면 죽어도 괜찮아, 인 걸까요.
미키에게 부여된 또 하나의 감정은 죄책감입니다. 어렸을 때 자동차에서 빨간 버튼을 눌러 교통사고가 났고 그때 엄마가 죽었다는 것 때문에 미키는 내내 죄책감을 안고 살아왔죠. 그리고 영화는 "죄책감은 이제 그만. 이제 행복해져도 괜찮아."라는 대사로 마무리됩니다(내용으로든 영화의 구두점으로든 좋은 대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미키가 죄책감을 극복하는 과정은 크리퍼들과의 서사와 엮여 있습니다. 그의 죄책감은 (나샤를 제외한 니플하임의 모든 사람들과 달리)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는 데서 왔고, 후반부에서 그가 분투하는 일의 핵심은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여기에는 호혜성이 있는데, 티모조차 그를 죽게 내버려둔 상황에서 마마 크리퍼는 그를 살려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구조가 저로서는 그다지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도식적으로 풀어헤쳐서 그렇지 크리퍼를 구하는 것과 엄마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다지 밀착되어 있지 않은 듯 느껴집니다. 일단 엄마를 잃는 것은 그 죄책감과 별개로 오롯한 슬픈 일이지 않을까요? 달리 말하면 현재 미키가 벗어나야 할 감정은 죄책감과 슬픔 두 가지이고, 캐릭터의 핵심이 죄책감에 있었다면 가족이 아니라 무관한 사람의 죽음이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그게 죄책감이든 슬픔이든 대사 몇 줄 외에 미키의 감정을 깊게 다루지 못했기에 미키가 이로부터 해방되는 순간도 큰 카타르시스를 주지 못합니다. 여기에는 제가 놓친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죠. 다만 거대한 사건이 위주가 되는 블록버스터의 특성상, 제가 보기엔 결과적으로 깊게 다루지 못할 감정을 채택했다면 곁가지를 덜어내고 심플하게 접근했어도 좋았을 것 같긴 합니다.
어렸을 적 사고에 대한 반대 시각을 제시하는 18의 대사는 그래서 필요했을 겁니다. 17이 '우리 인생 전체가 5살 때 그 버튼을 누른 죄에 대한 벌' 같다고 한탄하자 18은 그 사고가 차량 결함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건 미키가 버튼을 눌러서도, 엄마가 운전을 잘못해서도 아니었다고요. 이 깨달음은 미키의 해방에서 매우 중요한 지점이지만 영화의 다른 부분과 연계되어 자연스럽게 돋아난 것이 아니라 영화 바깥에서 필요에 의해 뚝 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생명을 구하는 일과 관련해 훨씬 중요한 캐릭터는 나샤입니다. 결말 이전까지 그의 연인인 나샤조차 옆에서 고통을 보듬어줄 수는 있었어도 실제로 그를 죽지 않게끔 하지는 못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그녀는 일련의 사건들을 겪은 뒤 끝에 가서야 위원회에 참여해 이를 개혁하고 휴먼 프린팅을 폐지함으로써 미키의 '삶'을 구하게 되죠.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를 비하하는데 익숙한 미키는 크리퍼가 자기를 굴 밖으로 내놓은 이유를 자신의 '육질'에서 찾고 악당인 마샬도 여기에 동의하지만 나샤는 크리퍼의 행동이 그를 '구한 것'이었음을 먼저 깨닫고 알려줍니다(원작에서는 미키가 스스로 추리해냅니다). 그리고 위기에 처한 조코를 치아까지 바쳐가며 구한 것도 나샤였죠. 카이와 다툴 때 17과 18이 모두 한 사람이므로 카이와 나눠가질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삼각(사각?) 관계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것이지만 사실 미키에 대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그녀의 시각을 담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일차적인 해결책은 미키 18로부터, 악을 악으로 처단하는 방식을 통해서 옵니다. 하지만 더 근원적인 해결책은 나샤가 휴먼 프린팅 문제를 해결한 뒤에야 찾아올 수 있습니다. 이 영화의 엔딩은 관습적이고 앞에서 종결법에 의문스러운 구석이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그래도 여기에 의의가 있다면 그건 악의 근원을 처단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체계를 개혁하는 데까지 나아가기 때문일 겁니다. 사실 악인 하나를 없애는 것보다 훨씬 지난할 개혁이 후일담으로 간단히 묘사되는 것은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룬 것이라기보다 봉준호 감독이 부주의한 결말로 새지 않도록 급하게 물 샐 틈을 틀어막은 것으로 보이게끔 만들지만요.
리뷰를 다 쓰고 보니 문단마다 의미가 있는 부분들과 그에 대한 아쉬움이 계속 반복하는 구조를 띄고 있는 것 같네요. 영화의 만듦새만 다루는 글은 올리지 않으려고 하는데 <미키 17>의 경우 중요한 밑그림들과 그 밑그림이 '영화'로 통합되는 과정 사이에서 미스매치가 있기에 뒷부분을 생략한다면 이 영화에 대한 제 진짜 감상과 다르게 좋은 느낌만 전달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지반이 복합적이고 튼튼하게 설계되어 있다고 해도 결국 영화란 캐릭터와 이야기를 통해 보는 사람이 감정적으로 임팩트를 받아야 그때부터 밑그림을 활성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꼭 직관적인 필요는 없으나 감정적인 부분이 건드려지지 않는다면 설령 완벽하게 벼려진 주제라도 관객에게 가닿을 수 없을 거예요. 지금의 저에게 <미키 17>은, 봉준호 감독의 2000년대 작품들이 그랬던 것과는 달리 기초적인 이야기에서 사람을 낚는 데 성공하지 못한 작품으로 느껴집니다. 봉준호라는 이름값을 떼고 생각하더라도, 지금으로서는 제 평가가 달라질 것 같지 않고요.
그렇지만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 영화를 무척 높게 평가하는 관객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제대로 감상하지 못한 부분들까지 캐치하거나 음미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겠죠. 그러니 <미키 17>을 재미있게, 그리고 감명 깊게 보셨다면 이 리뷰를 적극적으로 공박해주셔도 좋겠습니다. 사실 저 역시 어떤 영화든 실망하려고 보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영화를 다시 보면서 작품을 전보다 더 좋아하게 될 수 있다면 그게 더 기쁜 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