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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 작가 Jun 25. 2019

시프트 - 조예은

독서중독자의 책 이야기

 누군가를 대신할 죽음이란 존재할 수 없다. 추악하고 지저분한 인간의 본 모습을 그려낸 소설.



1. 기적을 바라는 남자와 기적을 줄 수 있는 남자 그리고 그들을 이용하는 사람들


 인간은  영원히 살고 싶어한다. 불로장생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이야기이며 지금도 더 오래 살고 더 멋지게 살고자 지나가는 개들을 잡아 먹는 것이 인간이다.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것이 죽음이라 했다. 돈과 권력도 막을 수 없는 것이 죽음이라고 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한 없이 나약하며 추악해진다. 그러나 이 죽음마저도 돈으로 사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죽음을 돈으로 바꾸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시프트의 내용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영어로 shift는 옮기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원래 있던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긴다. 원래 있던 병을 다른 사람에게 옮긴다. 액막이라는 말이 있다. 다가올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것.  그래서 역사적으로도 종종 다른 이들에게 대신 옮기는 행동이 있으며 액운을 다른 사람이 대신 가져가는 일은 예술작품에서도 다양하게 등장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죽음 앞에서 인간이란 생명이 얼마나 많은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지 그리고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추악하고 악하며 끊임없이 추락할 수 있는 존재인지를 알려준다.

 특별한 반전이 있지 않다. 앞부분만 읽으면 이미 어떤 내용인지 알 수가 있다. 그러나 그 속에 등장하는 인간의 추악함은 소름돋고 무서우며 슬프기까지 하다. 인간의 생명과 인간의 죽음을 돈으로 사려고 하는 인간의 추악한 면과 나 자신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생각은 아름답고 순수한 아이의 생명을 가볍게 여긴다. 작품 속에서 희생당한 아이들은 부모가 없거나 돌아갈 집이 없다. 행여나 부모가 있더라도 평범한 사람들이다. 거대한 음모속에서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사람들이다. 

 작품속에서 창은 아픔을 옮길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그리고 이 특별한 능력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죽어간다. 도망치면 되지만 사랑하는 동생을 살리기 위해 정신적으로 피폐해져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저주스러운 능력을 동생에게 전달해주고 죽는다.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제목을 살펴보자. 무언가를 옮긴다는 의미의 시프트. 고통을 옮길 수도 있지만 희망을 옮길 수도 있다. 병을 옮길 수 있지만 병을 사라지게 할 수 없다는 것은 왜 그런 것일까? 그리고 수없이 죽어간 아이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2. 생명에 대한 경시, 능력을 사용하는 방법, 진짜 중요한 가치


 이 책에서 우리는 생명에 대해 다시 한 번 살펴볼 수 있다. 죽임을 당하는 대상은 아이들이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갈 곳이 없는 고아들이다. 그러면 고아들은 죽어도 상관이 없는 것일까? 이 아이들을 죽은 사람들은 어른들이다. 오래 살고자 하는 욕망 또는 내 딸 내 아버지 내 동생이 살면 괜찮다는 이기심. 

 그저 기적을 바라고 오는 이들은 어떤 식으로 사람들이 완치가 되는지 알지 못한다. 완치가 되면 더 이상 교회를 찾지 않는 이창의 아버지처럼 결국 인간의 이기심이 다른 사람들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분명 조금이라도 주변을 살폈으면 찬이의 상처를 보았을 것이고 축하의식이 끝나면 왜 찬이가 쓰러지는지, 볼 때마다 찬이가 말라가는지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들을 욕할 수 없다. 간절한 욕망 또는 희망에 대한 간절함을 이용한 인간 이 가장 큰 죄인이지만 그렇다고 이들 역시 면죄부를 줄 수 있을까? 고아이기 때문에 죽어도 된다는 생각, 책 속에서 분노하는 우리들도 이 부분에서 과연 떳떳할 수 있을 것인가

 찬이가 왜 란이에게 능력을 주고 죽었을까? 그 능력 때문에 누군가를 어쩔 수 없이 죽여야만 했는데도 찬이는 동생에게 능력을 주었다. 란은 이 능력을 딱 한 번 사용했다. 형을 죽인 남자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사실 이 남자 역시 피해자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끊임없이 환상으로 등장하는 형에게 복수를 이야기하는 란에게 형은 아무말이 없다. 조카를 위해 기꺼히 희생을 하겠다는 이창의 모습에 란이 변화를 하는 것처럼 어쩌면 찬은 란이가 이 능력을 저주나 복수가 아닌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어디선가 또다시 납치되어 희생당하는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준 것은 아닐까? 이창이 병원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란은 한 아이를 살렸으니까.

 진짜 중요한 가치란 무엇일까? 죽음 앞에서 뻔뻔해지고 생명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정치인의 모습을 보고 분노하는가? 죽을 때까지 죄책감 하나 느끼지 못하는 한승목에 대해 화가 나는가? 사실 아이들이 납치 당하고 중국으로 끌려가서 당하는 일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으며 길거리의 아이들은 어디서나 구할 수 있다는 정치인의 이중적인 모습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돈은 중요하다, 권력도 중요하다. 우리 가족도 중요하다. 그런데 이 중요한 것들 때문에 오늘도 그릇이 되어야 하는 아이들이 존재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끊임없이 외쳐되는 인권이란 말과 생명존중이란 말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사용된 능력이 누군가를 살리는 능력이 될 수 있는 것처럼 그 거창하고 아름다운 정의와 가치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도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시프트/조예은/마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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