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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 작가 Jul 25. 2019

황산 - 아멜리 노통브

독서중독자의 책 이야기

★ 지금 가장 나쁜 사람은 누구인가?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이야기가 되는 이유 내가 가장 나쁜 사람 중 한 명일 수 있기 때문이다.



1.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문제  - 가장 나쁜 사람을 고르시오.


 시험 문제를 하나 내보자. 문제는 객관식이며 사분의 일의 확률을 가진다. 어느 날 이유도 없이 끌려간 사람들이 있다. 시청률을 위한 잔혹하고 어이없고 황당한 프로그램이 있다. 그리고 그들을 보는 시청자가 있다. 자 그러면 문제를 풀어보자. 여기서 가장 나쁜 사람들은 누구일까? 끌려간 사람들. 프로그램 제작자 또는 방송관계자, 시청자, 그리고 그들을 방관하는 정치인 또는 국가. 

 이 문제는 너무나 쉬워보일지 모른다. 일단 대부분의 사람들은 1번을 우선적으로 뺄 것이다. 이유도 없이 끌려간 사람들 그들에겐 죄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시청자를 뺄 것이다. 시청자들은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사람도 아니며 방송 제작에 관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 90%가 제작자 또는 국가를 지목할 것이고 10%가 시청자를 지목할 지도 모른다.  아주 쉬운 문제같아 보이지만 작가는 이 쉬운 문제를 던져놓고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그녀는 왜 이렇게 무리수를 둔 것일까? 

 아멜리노통브는 독특한 이야기를 가지고 인간의 내면적인 본능과 욕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기존의 작품들을 보면 생각지 못한 반전과 함께 그 안에 드러나는 인간의 모습 또는 개인의 욕망을 아주 처절하게 이ㅑ기한다. 이 작품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문제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작품 중간에 여주인공이 외치는 장면에서 그녀는  시청자들보고 당신들이 아주 나쁘다고 외친다. 시청률 때문에 만들어진 프로그램이 시청률 때문에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면 과연 시청자들은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더욱 중요한 것은 끌려간 사람들 사이에서도 추하고 이해되지 않는 모습들을 통해 작가는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을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아름답고 순수하고 용기있는 한 여성이 카메라에 집중이 되면서 사람들은 알게모르게 그녀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당연하게 생각한다. 고전 문학 중 [비계덩어리]란 작품이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데 하나의 목적을 위해 창녀를 희생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자신들은 그녀와 다르게 도덕적이라고 생각하는 위선은 수용소에서 그녀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그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억울하고 힘든 상황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무조건적인 피해자라고 여길것 같지만 결국 그들 역시 나쁜 쪽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악의 역할을 하는 카포에 대한 것인데, 이들은 절대적으로 악이다. 시청자들의 비난을 받아 마땅한 이 카포라는 인물들은 방송관계자 또는 정부 또는 시청자들이 자신들은 이 사건과 무관하며 이 상황을 몰고 가는 모든 책임을 카포라는 인물들에게 떠 넘긴다. 여기서 외모나 능력적인 면에서 부족하고 무시당하며 살던 한 카포가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함으로써 과연 우리는 누구에게 돌을 던질 것인지 애매해진다. 

 최근에 아육대가 문제가 되고 있다. 신인 아이돌은 통편집이 되고 유명 아이돌만 카메라를 받으며 이 대회 때문에 아이돌이 다치기도 하는 등 문제가 많지만 여전히 시청률은 높다. 폐지를 주장하는 팬들, 아육대를 만든 방송사 그리고 시청자 이 모두를 두고 과연 누가 가장 나쁜 것일까? 시청률이 높지 못하면 폐지는 당연하다. 폐지를 주장하면서 여전히 단체로 구경하는 팬들과 과감하게 출연을 거절하지 못하는 소속사 그리고 신인이 아육대에서 다치면서 열심히 하지 않으면 이름을 알릴 수 없는 구조 이 모든 것을 본다면 여기 역시 문제의 정답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2. 즈데나 카포란 인물이 보여주는 의미 - 말도 안되는 프로그램을 왜 그동안 막지 못했나.


 작품을 읽으면서 우리는 한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왜 프로그램을 막지 못하나. 물론 소설이다. 허구의 이야기이며 이야기가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영화 속 주인공이 마지막까지 죽지 않고 사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마지막까지 프로그램을 막지 않고 이야기를 진행한다. 이쯤되면 너무나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왜 프로그램을 막지 못했을까? 국가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 프로그램이 말도 안되며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부는 무능할 뿐이다. 방송 제작사는 이미 양심을 걸렀다. 시청자들 역시 매일 비난을 하면서 티비를 본다. 100%라는 시청률이 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저녁시간 밥을 먹으면서 또는 식구들과 이야기하면서 방송사를 욕하면서 여전히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다음 날 사형장에 보내질 인물을 투표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프로그램을 막은 사람은 모두의 비난을 받는 카포이다. 못생기고 지혜롭지 못해 프로그램 시작부터 사람들에게 무시와 비난과 경멸을 받으며 방송사조차도 그녀를 무시한다. 사실 작품 속 카포들은 공통적으로 사회에서 인정을 받은 사람이 아니다. 가슴이 보이는 옷을 입고 수요소에 감금된 이들을 유혹하는 모습이나 아무런 죄채감없이 재미있는 게임을 하는 것처럼 사람들을 괴롭히는 모습은 인간 내면에 포함된 악한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가끔 우리는 아주 사악해지고 못된 사람이 되고 싶어지기도 하는데 이 카포를 통해 시청자들은 비난을 하면서도 공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카포들 중 즈데나 카포는 여주인공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인물로 시청자들 사이에서도 욕을 먹는 인물이다.

 이 즈데나 카포는 재미있다. 카포를 신청한 이유도 유일하게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준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이었으며 무식하고 단순한 인물이 한 여성을 통해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고 소설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은 영웅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뛰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기품있고 소신있으며 지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또한 가녀린 몸과 다르게 대범하기까지 한 그녀는 시청자들과 수용소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는다. 이 여성은 힘들고 말도 안되는 상황을 마무리 할 수 있는 영웅적인 조건을 모두 가진 셈이지만 왠일인지 소설 속에서는 자신 스스로도 실수를 한다. 

 작품 속 배경은 독일에서 행해진 유대인 수용소와 다를 바가 없다. 이런 경우 영웅이 필요하며 대부분 수용소 안에서 나오는 법이다. 이 역할을 여주인공이 하고 있지만 이 여성 역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성일 뿐이다. 못생기고 포악하며 무시한 즈데나와 기품있고 단아하고 대범한 성스러운 파노니크를 비교하면서 즈데나의 부정적인 모습에 의해 파노니크는 더욱 성스럽게 그려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프로그램을 무산시키고 수용소 사람들을 탈출시키며 정부에게 약속을 받아내는 사람은 무식하고 못난 즈데나이다. 이 즈데나가 왜 그렇게 행동했을 까 그것은 파노니크를 사랑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 사랑이란 동성애적인 것은 아니다. 즈데나는 자신에게 없는 그리고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성스러움을 파노니크에게서 보았고 중반부에서 파노니크에게서 일반 사람들과 다를바 없는 무지한 모습을 발견하면서도 즈데나는 파노니크에게 애정을 느낀다. 그 애정은 이름을 알고 싶다는 것에서 그녀만큼은 사형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어진다. 이름이란 한 사람을 결정지으며 누군가를 알고 관계를 시작하고 이어지게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파노니크라는 이름은 즈데나에게 중요한 일이며 그녀에게 카포가 아닌 즈데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하는 것은 그녀가 파노니크와 관계를 가지고 싶어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하나를 위해 카포라는 직위를 과감하게 던져버리고 아무도 하지 못했던 일 국가조차도 하지 못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문제를 다시 보자. 여기에 카포라는 보기를 하나 더 넣어보자. 그러면 정답은 누구일까? 즈데나 카포라는 보기를 하나 더 넣는다면? 

 최근에 참으로 답답한 일들이 많다. 동물, 인권, 여성인권, 동성애 인권 등 그런데 이 일들은 언젠가는 터져야 할 일이며 누군가는 이야기해야 할 일들인데 우리는 시청자로서만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국가는 구경만 하고 있다가 늦은 시점에서 왜 국가가 나서지 못했는가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그런 국가를 욕하는 우리는 여전히 시청자로서 구경을 하는데 정작 우리가 비난하고 생각지도 못한 즈데나같은 인물이 이 문제를 마무리 지어버린다면 우리는 과연 아무런 잘못이 없는가.

 이야기는 아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어렵다.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일은 견딜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하고 할 수 있는 일부터 한다는 것은 어렵지만 시작하면 생각보다 무섭지만은 않으며 즈데나 같은 친구들은 무척 많다.  한 번더 문제에 대해 생각하자. 누가 나쁜 것이며 누가 절대적인 피해자며 우리는 시청자인가 피해자인가 무능한 국가인가, 문제의 정답을 내려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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