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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탐구와여정 Oct 23. 2021

아름다움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요?

[그림이 던지는 질문들-16]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The Grand Odalisque'(1814), 루브르박물관

아름다움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보편적인 미의 기준이 있겠지만 그것 또한 시대에 따라 다르고 엄밀히 말하면 개인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요? 때문에 위의 그림을 보고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상하고 심지어 흉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위의 그림을 그린 도미니크 앵그르는 분명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그린 그림이었을 것입니다. 비록 당시 비평가들은 헐뜯을 꺼리를 찾아 골몰했지만 말입니다. 여인의 얼굴에 대한 의견은 대체로 아름답다는 것으로 별다른 논란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소 앳되고 음울한 것이 사연이 많아 보이지만 논란의 중심은 단연 몸에 집중되었습니다. 

특히나 정중앙에 위치한 육중한 둔부가 눈에 띄네요. 몸의 비례로 보나 해부학적으로 보나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또한 저리도 긴 허리를 본 적이 있나요? 당시 어떤 비평가는 해부학적으로 허리부분의 척추가 보통 사람보다 적어도 3개는 더 많아 보인다고 적었습니다. 팔은 마치 연체동물처럼 길고 가늘게 축 쳐져있고 다리는 최대한 불편하도록 요상하게 꼬고 있습니다. 뒤틀린 몸과는 달리 얼굴 표정은 편안해 보이는 것이 마치 서커스 공연의 배우가 이상한 동작을 취하면서도 얼굴만은 평온해 보이는 것과 같은 느낌이랄까요.


당시는 이슬람 등 이국적인 문화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많은 화가들이 해외를 방문하거나 외국 예술품들을 구입하기도 했죠. 앵그르 또한 이슬람의 하렘 문화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슬람 국가에는 가본 적도 없었고 오로지 글로 배운 것이 다였습니다. 심지어 모델을 직접 그리기 보다는 사진이나 상상을 통해 그렸죠. 그래서 이런 그림이 나온 것일까요? 

사실 앵그르는 고의적으로 인체를 왜곡함으로써 극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르네상스 말의 매너리즘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는 것이죠. 위의 그림처럼 이국적인 배경 속의 누드화는 더욱 노골적으로 왜곡을 극대화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미의 기준에 마음껏 맞춘 것입니다.

앵그르는 역사화나 심지어 초상화에서도 다소 특이한 동작을 활용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특이한 포즈가 신체의 아름다움을 더욱 부각시킨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여성 누드와 초상화에서 다양한 포즈를 취하게 했죠. 이를 통해 대상의 성격이나 분위기를 전달하는 능력이 탁월했습니다.  

특히, 고개와 손, 팔의 포즈가 다양한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가느다랗고 마치 고무처럼 뼈마디가 느껴지지 않는 손가락 위에 얼굴을 살포시 기댄다든가 팔을 상체에 최대한 붙이고 포갠 뒤 손 위에 머리를 기울여 올린다든가 하는 식이었죠. 뭔가 고민이 있어 보이기도 하고 몽상에 잠긴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 속을 알 수가 있나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앵그르의 그림 속 아름다운 여인들은 다소 무심한 표정이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아름다움을 본인들도 잘 알고 있다는 듯 말이죠. 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뭔가 자유로움이나 당당함으로 보이기 보다는 오히려 무덤덤하거나 심지어 버겁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요? 

아름다움이 불러온 뜻하지 않은 불륜의 연애로 비극을 맞거나 적절치 않은 상대로 하여금 상사병을 불러일으켜 처지가 곤란해지거나 하렘에 들어가 술탄을 위한 성적 노리개가 되거나 하는 식입니다. 이렇듯 앵그르가 그린 아름다운 여인들은 난감한 상황에서 수동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한계에 놓여 있습니다. 

'Roger Freeing Angelica'(1819), 루브르박물관

또는 남자 신이나 영웅에게 간곡히 청을 하거나 그들의 구조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하죠. 그 때 여인들의 모습은 상당히 애처럽고 무력하게만 보입니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적극 활용하여 도움을 청해야 하는 그 상황에서 아름다움은 꽤나 유용한 수단이겠지만 아름다움 그 자체가 결코 주체적인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일까요? 앵그르의 그림에서 아름다움은 다소 처연하고 때로는 희망없는 몸부림을 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눈을 감고 황홀경에 빠진 듯 몸을 비틀고 있을 때조차도 그 자유와 편안이 영원히 유지될 것처럼 보인다기 보다는 꽉 막힌 어딘가에 놓여진 상태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자 기지개를 켜고 있는 것처럼 보인달까요. 


아름다움이 힘을 갖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앵그르의 누드화 속 여인들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아름답다고 할 수 있죠. 아름다움을 극한으로까지 밀고가다 보니 생긴 과잉과 더불어 이국적인 배경이나 고대/중세/르네상스 시대의 고전미술에 대한 앵그르의 취향에서 비롯된 낯섦의 효과 때문에 기이해 보이기는 하지만요. 

당시 위의 그림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이유는 오로지 아카데미가 정한 아름다움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정교한 선을 사용하여 조각같은 몸을 매끈하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이를 너무 극한까지 끌고간 탓에 그럴듯해보이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시대에 역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권위에 대한 도전이자 조롱이라고까지 생각해 불쾌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앵그르가 극단적인 아름다움만을 표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앵그르의 1856년 작품 'The Source'는 지극히 정상적인 아름다움의 결정체였습니다. 순수미과 관능미가 공존하는 아름다움은 모자라지도 않고 과하지도 않은, 그럴듯하면서도 이상적인 완벽한 조화가 느껴집니다. 

이 그림을 본 지인들이 서로 사겠다고 나서서 경매를 붙여야 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반응에 정작 앵그르 본인은 얼떨떨했다고 합니다. 기분은 좋았지만 이해하기는 힘들었나 봅니다. 즉, 앵그르는 그림을 보는 사람들을 만족시키겠다는 의도로 여성의 누드를 그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처음부터 사람들이 원하는 미의 기준에만 맞춰 그림을 그렸을테니까요. 




혹자는 앵그르의 누드화는 여성의 신체를 과장되게 뒤틀고 왜곡시켜 성적으로 대상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앵그르가 사회정치적인 의미를 제외한 채 오로지 아름다움만을 표현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한다면, 앵그르가 표현한 아름다움에 대해 아름다움 그 자체가 아닌 다른 이유로 비난을 하는 것도 온전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즉, 앵그르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보면 어떨까요. 그 아름다움이 앵그르 자신의 미의 기준에만 부합하는 것이라도 말이죠. 아름다움에는 여러 종류가 있고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꼭 모두를 만족시켜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오히려 앵그르의 그림 속 여인은 이렇게 묻는 것 같습니다. 아름다움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요? 그것이 꼭 다른 누군가를 만족시켜야 하는 것인가요? 있는 그대로 봐주면 안되나요? 아름다움이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쓰임을 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피곤하기만 할 뿐이거든요. 

앵그르 그림 속 상상의 여인조차도 쓸데없이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이 흐뭇하기 보다는 번거롭게 여겨지는 듯합니다. 아름다운데도 불구하고, 아니면 오히려 아름다워서, 놓여진 상황 자체가 그다지 달갑지만은 않은데 아름다움 그 자체까지 부정을 당하는 건 너무 하잖아요. 

요추가 세 개 더 많으면 좀 어떤가요? 엉덩이가 너무 커서 보기 불편한가요? 감상은 자유지만 아름다움에 대해 이러저러한 이유로 비난을 하기 보다는 다채로운 아름다움 그 자체로 바라보고 포용하면 어떨까요. 아름다움이 반드시 모두를 만족시켜야 하는 것은 아니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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