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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탐구와여정 Oct 23. 2021

민낯을 숨길 필요가 있나요?

[그림이 던지는 질문들-14] 구스타브 쿠르베

The Hammock(1844), 

한 여인이 해먹에 비스듬히 걸쳐 잠을 자고 있습니다. 얼핏 보기엔 야외에서 한가롭게 자연을 즐기다 잠깐 졸음을 즐기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볼수록 무언가 이상한 부분들이 보이면서 의심이 들기 시작합니다. '이건 뭐지?'싶은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면서 화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첫눈에는 마치 동화 속 잠자는 숲속의 미녀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하지만 이내 에로틱한 요소들이 눈에 띄게 됩니다. 여인의 머리와 상체는 해먹에서 미끌어져 떨어질 듯 아슬하게 보입니다. 길게 늘어뜨린 곱슬곱슬한 금발의 머리는 탐스럽고 머리 위로 들어올린 가녀린 손의 모양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가슴이 시스루로 훤히 드러나 보입니다. 길고 꽉 조이는 드레스를 꽁꽁 싸매 입은 줄 알았더니 웃옷의 앞섶은 풀어헤친 채 투명한 쉬폰 소재로 된 망사만을 걸치고 있습니다. 하얗게 드러난 종아리와 속살이 훤히 비치는 오렌지색 발목 스타킹은 무척이나 관능적으로 느껴집니다. 

이쯤 되니 주변의 환경도 그저 가볍게만 보이지 않습니다. 무언가 음습하고 야릇한 분위기까지 느껴집니다. 해먹 바로 아래, 드레스와 발이 닿을락말락한 위치에 흐르고 있는 개울은 여성성을 표현하는 요소 중 하나로 쿠르베가 이후에도 자주 사용하던 장치입니다. 해먹 주변으로 스멀스멀 가지를 뻗치고 있는 나뭇가지와 장미덩굴도 의뭉스럽게 여겨집니다. 저 멀리 해가 들어오는 숲의 입구는 아득히 멀게만 느껴집니다. 




이 그림은 리얼리즘의 선구자로 아카데미 미술과 투쟁을 불사하던 구스타브 쿠르베의 초기 그림입니다.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그림이죠. 1845년 살롱에 출품했지만 낙선한 작품입니다. 쿠르베의 잘 알려진 그림들은 'The Stone Breakers'(1849), 'A burial at Ornans'(1849-50) 등 사회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노동계급이나 농민들의 핍진한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 것들입니다. 

하지만 쿠르베는 계급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전통이나 제도, 교양 등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억압적인 것들에 반기를 드는 저항적인 면모가 강했습니다. 이러한 면모는 어김없이 그의 그림을 통해 구현되었고 따라서 그의 그림은 기존의 그림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들을 뒤틀어버림으로써 아카데미와 평단, 대중의 경악을 불러왔습니다. 


역사화에나 어울릴 법한 커다란 캔버스에 농민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나, 특별한 스토리나 사건도 없이 그저 삶의 한 장면을 그려넣은 것이나, 그들의 모습을 미화하거나 낭만적으로 그리기는 커녕 있는 그대로 묘사한 것이나, 화면을 거칠고 투박하게 처리한 것이나, 어느 하나 전통주의자들의 구미에 맞는 부분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쿠르베의 누드화도 많은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아카데미가 여는 연례행사인 살롱전에는 비너스 등 신화 속 여신이나 성경 속 여인의 이름을 제목으로 한 수많은 누드화가 전시되었습니다. 사실적인 모습보다는 이상적으로 미화시킨 누드화는 미적(aesthetic)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채 남성 관람객의 품위있고 안전한 눈요깃거리가 되어주었습니다. 

이에 반해 쿠르베의 누드화는 너무 노골적이었죠. 위의 그림은 누드화는 아니지만 풀어헤친 가슴이나 훤히 드러낸 종아리가 충분히 선정적입니다. 더구나 세상 모르고 잠을 자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일상의 여염집 여인을 보는 것처럼 고상하지 못했죠. 단정치 못한 옷차림을 하고 무방비 상태로 잠이 든 모습은 노골적으로 상대를 유혹하는 것 같은 생각까지 들게 합니다. 누드화를 들여다보는 관람객의 음흉한 생각을 들킨 것처럼 느껴졌는지 심사위원들은 이 그림을 품위없다는 이유로 퇴짜를 놓았습니다. 




The Bathers(1853), 몽펠리어 미술관

그렇다고 굴할 쿠르베가 아니었습니다. 쿠르베는 1853년 살롱에 'The Bathers'(1853)를 전시했습니다. 'The Hammock'과 마찬가지로 숲 속의 한 개울에서 목욕을 마치고 나오는 여인의 뒷모습을 그렸습니다. 목욕하는 여인이라는 모티브는 살롱의 누드화로 흔히 등장하는 단골입니다. 하지만 쿠르베는 기존의 목욕하는 여인과는 사뭇 다른 여인을 등장시켰죠. 

육중한 몸매에 살이 덕지덕지 붙어 울퉁불퉁하기까지 한 여인의 몸이라니, 역시나 경악을 불러일으킨 것은 당연했습니다. 기존의 날씬하고 육감적인 몸매에 매끈하고 부드러운 살결과 눈부시고 하얀 살빛으로 대변되던 여인의 누드와는 완벽히 대척점에 놓여 있었습니다. 비평가들은 마치 아무렇게나 베어낸 나무의 몸통 같다고 비난하면서 여인의 모습이 추하고 심지어 야만적이라고 혹평했습니다. 더구나 부르주아나 귀족계층으로 여겨지는 여인을 이와 같이 표현한 것이 몹시도 거슬리고 참을 수 없었겠지요. 

그 와중에도 쿠르베에게 호의적이었던 줄스 샹플뢰리는 푸르동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를 옹호했습니다. 그의 요지는 아름다움 뿐 아니라 추함 또한 미술과 시의 영역이라는 것, 삶의 고통을 마주하고 비겁함을 부끄러워하며 압제를 혐오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 비계 낀 추접한 귀족의 누드는 기생적이고 거만하며 부패한 그들의 속성이 근육 하나하나에 층층이 쌓여 드러난 것이라고 말이죠. 

당시 사회주의 사상가 푸르동의 표현처럼 쿠르베의 의도가 꽤나 급진적이고 정치적이었는지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쿠르베는 분명 권위적이고 위선적이며 억압적인 기득권들에 한방을 날리고 싶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쿠르베의 누드가 추하거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의 그림은 살아있는 자연, 동물, 인간을 날 것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자연은 몸과 마음의 고향이자 영감의 원천이었습니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거나 마음이 지쳤을 때마다 자신의 고향 마을에 가서 지내곤 했습니다. 그곳에서 자연으로 나가 사냥을 하고 낚시를 하면서 그 풍경들을 캔버스에 담아냈습니다. 

이러한 그의 그림에는 자연의 넘치는 생명력과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신비로움이 표현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는 종종 어딘지 모르게 원초적인 모습을 띠었습니다. 고향 마을에 흐르는 강의 수원지인 동굴과 그 속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그린 풍경화 그 자체만으로 에로틱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탁월한 재능이 있었던 쿠르베입니다. 

1860년대에는 아예 대놓고 여성의 누드화에 탐닉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누드화는 사실적이면서도 노골적이고 마치 외설물과 같은 느낌이 드는 것들도 많았습니다. 레즈비어니즘을 연상시킬 정도로 파격적인 그림도 있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그림들을 모으는 고객을 위해 그린 경우도 많았죠. 

하지만 쿠르베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누드화에 대해 추구하는 방향이 분명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적이면서 여성성을 도드라지게 내세우는 성격이 강했습니다. 자신의 누드화가 선정적이고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살롱에서 거부되는 경우에는 약간의 변주를 통해 그들의 구미에 맞춰주면서 그 다음해에 기어코 당선이 되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즉, 약간의 순화 과정을 거치면 충분히 당선이 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누드화는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또한 쿠르베의 사냥 그림이나 바다 등 풍경을 담은 그림들은 평단이나 대중으로부터 인기가 상당했습니다. 




일견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쿠르베가 원하는 것은 단순했습니다. 포장하고 가면을 씌우는 부자연스러운 것들은 다 벗어던지고 생명의 본질적인 부분을 마음껏 드러내는 것이었죠. 그것이 위선적이고 오만하며 권위적인 정치, 아카데미, 귀족, 부르주아 등과는 어쩔 수 없이 동조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의 그림은 때로는 충격으로 다가오고 때로는 도전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진실이 불편하다는 것은 그만큼 부조리와 불합리가 판을 치고 있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따라서 쿠르베의 그리을 보며 기분이 나쁘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기득권의 위치에 있으며 거짓과 가장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겠죠. 

그림은 어떠해야 한다는 전통과 규정에 따르기를 거부하고 살아있고 존재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그토록 비난받고 매도되어야만 하는 일인가요? 민낯을 드러내는 것은 여전히 용기가 필요한 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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