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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탐구와여정 Oct 23. 2021

당신을 유혹할까요?

[그림이 던지는 질문들-12] 구스타프 클림트

'Danae'(1907), 개인 소장

구스타프 클림트의 'Danae'(1907)는 황홀감에 빠져있습니다. 벌거벗은 몸과 야릇한 표정에서 성적 유희를 음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나 캔버스 전면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허벅지에 시선이 갑니다. 특이하게도 허벅지를 육감적이면서도 관능적인 몸의 대명사로 과장되게 사용한 것이 현대적으로 느껴집니다. 더불어 홍조를 띤 볼과 약간 벌린 입술, 지긋이 감은 두 눈은 은밀하면서도 관음증적인 욕망을 깨워줍니다.

이쯤 되면 상당히 음란한 그림이라고 할 만합니다. 기존의 누드화가 순수하면서도 관능적이거나 유혹적이면서도 수동적인, 다소 이율배반적인 모습으로 그려진 것과는 달리 클림트의 그림은 대놓고 음란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관람객을 의식하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죠. 따라서 혼자서 음미하고 있는 그림 속 여인을 보면서 관람객은 자신의 은밀한 욕망을 들킨 것처럼 민망하고 기분이 개운치 않을 수 있습니다. 

클림트의 그림을 두고 외설적이라고 비난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습니다. 흔히 말하는 교양이 넘치는 순수 예술(fine arts)에서는 용납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클림트는 나름 절제를 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 정도를 가지고 놀란다면 클림트의 드로잉 작품들을 보면 아마도 놀라자빠질 것입니다. 




클림트가 나름 절제하여 그린 이 그림은 고전에서 작품의 대상을 따왔습니다. 다나에는 그리스 신화 속 인물로 그녀를 대상으로 한 누드화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꾸준히 그려져왔습니다. 청동탑에 갇힌 다나에를 탐해 황금비로 변신해 그녀를 범하는 제우스의 이야기는 누드화의 좋은 소재였죠. 더구나 다나에가 마치 황금에 눈이 멀어 제우스를 유혹하는 것처럼 해석하면서 그녀를 탐욕스러운 유혹녀로 그리기 일쑤였습니다. 마치 제우스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가슴을 풀어헤치고 다리를 벌리고 앉아있거나 누워있는 모습이 흔했습니다. 

물론 정반대의 해석으로 정숙하고 순결한 여인의 모습으로 그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화의 내용이라는 안전한 포장을 씌워 관능적인 여성의 누드를 감상하고자 한 관람객들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서는 전자의 해석이 훨씬 좋았을 것입니다. 

클림프의 해석도 이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황금비로 변한 제우스를 황금 동전으로 그려넣은 것이나 다나에의 다리 사이에 이를 아예 밀착시킨 것이나 다나에가 황홀해하는 표정 등이 이를 보여줍니다. 이렇듯 클림트는 고전에서 차용된 주제를 사용하되 극도의 에로티시즘을 추구하면서 교양과 음란의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교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그림이 아무리 교양의 탈을 썼다고 해도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공공기관의 의뢰를 받은 그림의 경우에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1894년 클림트는 비엔나대학의 대본당(Great Hall)의 천장을 수놓을 세 개의 그림을 의뢰받았습니다. 철학, 의학, 법학을 주제로 했죠. 

이전까지 다소 아카데미 스타일로 그림을 그렸던 클림트의 그림이 변화를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여성의 누드가 노골적으로 그려졌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다수의 누드와 대상들의 조합으로 난해하고 모호하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의학 관련 그림에서 음부를 강조하여 내밀고 있는 여성의 누드는 포르노그래피라는 비난을 불러왔습니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도대체 무엇을 표현하고자 한 것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도 한 몫 했습니다. 기존의 명확한 상징과 비유로 표현되던 것들을 모두 전복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의 그림이 처음 선을 보였을 때 사회 각계 각층에서 비난이 쏟아진 것은 당연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클림트의 그림을 받아들이긴 하되 대본당이 아닌 모던 갤러리에 전시하기로 결정했지만 이번에는 클림트가 이를 거부했습니다. 후원인의 도움으로 커미션 비용을 모두 되갚고 세 개의 그림을 자신이 도로 회수했습니다. 후원인에게는 철학에 관한 그림으로 보상을 했습니다. 

이후로 클림트는 공공 커미션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됩니다. 이 시기 등장한 것이 '골든 스타일'이라고 하여 황금 장식과 비잔틴, 이집트 양식의 특이한 문양으로 캔버스를 가득 채우게 됩니다. 위의 그림은 물론이고 클림트의 대표작 '키스'((1907-8), '아델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1907) 등이 이 시기의 작품들입니다. 




'The Kiss'(1907-8), 벨베데레 미술관

'키스'를 한번 볼까요? 서로 껴안고 키스를 나누고 있는 남녀는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작고 화려한 꽃들이 가득 핀 꽃밭 위에 가지런히 다리를 모으고 무릎을 꿇고 있는 여인과 그녀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있는 남자는 서로 빈틈없이 완벽하게 하나가 되었습니다. 오로지 옷의 문양으로 그들의 몸을 나눌 수 있을 뿐입니다. 절벽인 듯한 곳에 걸터있는 상태로 절박하게 키스를 나구고 있는 남녀는 위태로우면서도 감미로운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노골적인 누드나 야릇한 표정에서 많이 벗아나긴 했지만 두 남녀 사이에 흐르는 에로틱한 감성을 놓칠 수는 없습니다. 남자와 여인의 옷 문양이 특이하면서도 단순 반복적인 때문인지 혹자들은 에로티시즘의 연장선상에서 남자 옷의 길쭉한 사각형 모양은 정자를, 여자 옷의 넓적하고 동그란 모양은 난자를 의미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클림트의 그림은 무엇 하나 확실하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았고 자신의 사생활을 거의 노출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남자가 클림트 자신일 것이라 추측한다 할지라도 여자의 모델은 누구인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사돈지간으로 평생 긴밀하면서도 플라토닉한 관계를 유지한 에밀리 플로제인지, 염문설이 있었던 초상화 속의 여인 아델 블로흐 바우어인지, '다나에'의 모델이자 둘 사이에 자녀까지 낳았던 붉은 머리칼의 '레드 힐다'인지 알 수 없죠. 그저 풍문과 추측만 무성할 뿐입니다. 




분명한 것은 여성에 대한 클림트의 집착에 가까운 몰두였습니다. 마지막 10여년은 풍경화과 초상화만을 그렸는데 초상화는 오직 여성들만 그렸습니다. 그의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신비로운 초상화는 당시 상류층 여인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또한 그의 스튜디오에는 기꺼이 클림트의 모델이 되어주고자 하는 여인들로 넘쳐났죠. 

따라서 클림트가 그토록 고전과 신화로 가리고자 했던 에로티즘의 본질을 본격적으로 추구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공공 커미션도 받지 않았으니 어느 누가 뭐라 할 일도 아니었죠. 옷을 입고 있든 벗고 있든 상관없이 에로틱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의 그림들은 하지만 단순히 에로틱하다는 표현으로는 온전치 않은 것 같습니다. 남들에게 보여주거나 유혹하기 식의 에로티스즘이라기 보다는 여성이 스스로 자각하는 에로티시즘이라고나 할까요. 

사실 '다나에' 속의 여인도 남성을 유혹하기 위한 몸부림이라기 보다는 스스로 음미하고 만끽하고 있는 중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클림트는 그저 여인들의 성적 유희의 장면을 혼자건, 둘이건, 여럿이건 그 자체로 기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은 클림트는 관찰자의 시선이라기 보다는 교감의 시선으로 여인들을 그렸을 수도 있습니다. 대상에 따라 그림의 분위기가 조금씩 다르게 그려졌는데 그것이 단지 여인의 개인적 성격이라기 보다는 자신과의 관계에 따른 차이로 여겨집니다. 즉, 자신이 캔버스에 담은 여인마다 그녀에 대한 클림트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적 관계를 대상별로 차이나게 그렸던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든 확실한 것은 그림 속 여인들은 자신이나 클림트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그림 속 여성은 당신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림 속 여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당신은 이미 그녀에게 유혹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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